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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03.23. 주일낮예배<민7:12-89(12-17봉독). 일대일로 공평하신 하나님>

by 설렘심목 2014. 3. 22.

 

2014.03.23. 주일낮예배<민7:12-89(12-17봉독). 일대일로 공평하신 하나님>

 

본 민수기 7장은 성경에서 상당히 긴 구절을 갖고 있는 곳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듣는 말씀 12절에서 89절까지 78개 구절은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말씀이 계속되는 걸 봅니다. 12절의 제1일 유다지파로 시작하여 각 지파마다 6구절에 당하는 말씀이 할당됩니다. 그렇게 12지파에게 72구절이 매 6구절마다 지파명이 나옵니다.

지금 눈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12절, 18절, 24절, 30절 이런 식으로 구구단 6단을 외우면 거기마다 6개 구절이 “제1일, 2일, 3일, 4일에는”이라는 말로 시작해 “누구의 아들 누구의 예물이었더라.”는 말씀으로 각 지파별로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 봉헌예물의 내용도 모두 동일합니다. 이쯤이면 읽는 사람들은 지루함과 함께 간단한 의문하나를 떠 올리게 됩니다. 요약을 좋아하는 저 같으면 모든 열두지파의 이름을 거명하고 “이들이 각각 드린 예물은 이러하니 곧 성소의 세겔대로 130세겔 중 은반하나와 70세겔 중 은바리 하나라.”이렇게 간략하게 줄였을 겁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본문은 89개 구절이 아니라 15개절미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매 지파마다 일일이 꼭 같은 말씀으로 그들이 드린 봉헌예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이고 편리를 추구하는 오늘날엔 이해하기 어려운 다른 표현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1. 하나님과 그 백성은 일대일 개별적입니다.

 

글자하나 틀리지 않는 같은 말씀을 성경은 각 지파마다 일일이 짚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신학교에서조차 모든 졸업식이나 표창식에서 첫 사람에게만 표창장 내용을 읽고 나머지는 “이하동문”이라는 말로 줄줄이 나와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퇴장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세례식을 할 때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성삼위일체께 명예와 영광을 올리며 물을 적셔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자가 많다고 대표 한사람에게 세례하고 나머지는 이하동문 해버리는 일은 영원히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예식과 하나님의 교회가 행하는 성례의 차이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에 결코 단체입장이나 단체구원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언제나 일대일이라는 사실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행16:31절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정성이고 매우 크셔서 그 가정까지 구원하시겠다는 것은 여전히 한 개인을 사랑하시되 그와 연결된 지체까지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한 영혼을 구하실 때 온 가정이 자동으로 함께 구원을 받는 걸 말하진 않습니다. 가정구원에는, 먼저 믿은 한 사람의 순교자적 희생이 따라야 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나야 합니다. 일대일로 받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어 다음은,

 

2. 하나님의 은혜가 공평합니다.

 

열두지파에게 주시는 명령과 은혜가 모두 같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공평함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평한 의무사항은 공평한 권리사항과 맞물립니다. 받을 자격과 권한이 대단하다면 그 의무도 가볍지 않습니다. 상위그룹의 사람들은 더 많은 의무와 헌물을 부담하게 됩니다. 빈곤층의 사람들은 많은 부분에서 면제받고 혜택이 주어져야 합니다. 세상은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바람에 없는 이들은 대를 이어 가난합니다. 대부분 가진 자가 권력도 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행정은 세상의 정치와 달라야 합니다. 빌딩 수위를 하시는 장로님이 그 빌딩 회장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며 나무랄 수 있는 것이 교회의 조직입니다. 모든 지파의 봉헌예물이 같다는 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복락과 은총의 분량이 꼭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하여 행복합니까?

오랜 가난에 찌들면 간단하게 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건강으로 놀라본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이라고 말합니다. 굴욕적인 대접을 받아본 사람은 아마도 권세라고 말할 것이고 심한 배신과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행복은 관계의 안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모두 맞는 답입니다. 이렇듯 행복의 가치기준은 환경따라 사람마다 다르고 느끼는 깊이도 다릅니다. 돈, 건강, 명예, 관계, 모두 귀한 것들입니다. 어느 하나 소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의 목적이 진실하고 바른 가치를 향하여 세워졌을 때 비로소 소중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감기한번 안 걸리면서 악한 일에 몰두하는데 있는 게 시간과 돈 밖에 없다면 정말 곤란한 일입니다. 즉 나쁜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여기저기 아는 사람 많고 건강하고 돈 많은 것, 공공의 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은 바른 사람이 받아야 크건 작건 진정한 복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우리가 모두 공평한 복을 사명과 함께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복락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는 관계의 문으로 열려야 하며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하여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기쁘시게 하는 일에 얼마나 성실하는가에 인생의 희비가 갈리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진정 복 받는 자의 마땅한 도리를 오늘 우리가 몸으로 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복 받는 자의 도리, 복 받을 자의 도리 그것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은 앞으로 자자손손 대를 이어 받을 하나님의 복과 직관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릇이 시원치 않아 주는 복도 다 받지 못하고 땅에 흘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자가 없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과 개별적인 일대일의 공평한 은혜에 이어 그 복받을 그릇의 준비는?

 

3.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먼저, 복받을 그릇 그 첫 조건은,

 

1) 하나님과 친교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 외에 모두 찌끼처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그리스도 안에서 고상한 여러분을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넌 누구냐? 곧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 비로소 내가 누구라는 사실을 기뻐하는 인생인줄 믿습니다.-빌3:7~9a” 매순간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기 바랍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사랑의 고백보다 탁월한 능력입니다.

 

(2)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갖습니다.

 

예배는 하나님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로 드려진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건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갈6: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예배를 통해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은 척박한 우리들의 영혼을 얼마나 기름지게 하며 유익한지요? 하나님과 깊은 가운데 교통한다면 더 이상 번잡한 우리들의 고민은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선포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가는 복된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인간의 이름 세자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모릅니다. 자기 자랑만큼 세상에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거듭 다짐하는 말씀이지만 모든 언어생활에서 “내가, 나는”이라는 주어가 차츰 사라지는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나는”이라는 말보다는 “우리가”라는 말이 더 듣기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말보다 “우리 좋으신 주님이”라는 말이 더 품격있고 아름답습니다. 자랑과 영광과 존귀는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한분께만 올려드리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꾸준히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주앞에 세워져가며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향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는가하는 문제만 남게 됩니다. 다시말해 은혜는 여전히 풍성한데 받을 그릇을 살피며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은 예배하는 우리를 보고 우리의 삶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어렴풋하나마 주님의 흔적으로 찾으려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래서 거룩한 부담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룩하신 이가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미천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빈곤하면 믿음 잃을까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너무 기름지면 교만해질까 나누는 마음을 주실 겁니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져서 주실 많은 것들을 기쁨가운데 나누는 복된 삶으로 예배자 여러분을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