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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01.12. 주일낮예배<민14:28. 네 말대로 이루리라.>

by 설렘심목 2014. 1. 12.

2014.01.12. 주일낮예배<민14:28. 네 말대로 이루리라.>

 

독일 프리드리히 대왕(1740-1786)은 한가지 실험을 했는데 고아 몇 명을 데려다가 풍족히 먹이고 입히며 외부세계와 차단된 공간에서 다른 아무 것과도 접촉치 못하게 했습니다. 특히 일체 하인들에게 말을 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고아들은 말이 없는 세계에서 여러 가지 넉넉한 가운데 동물처럼 끙끙대며 자라나서 결국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죽었습니다. 인권이 말살된 실험이었지만 말은 인간의 생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대부분 말하지 못하는 분들은 청각장애를 겸하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들은 것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말하게 됩니다.

듣고 말하지 못하면 홧병이라도 날 겁니다. 누가 그러는데 남자들은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서 문제가 되고 여자들은 양쪽 귀로 들어서 모두 한 입으로 쏟아내서 문제라고 합니다. 사실 문제는 성경의 말씀처럼 듣기는 속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지경에 와서 그때 침투시킨 12명의 지파별 정탐꾼들이 돌아와 열명이 불신앙의 보고를 하는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모두 절망스런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하는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민 14:28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말씀이 올 한해 우리교회와 저와 여러분 가정에 큰 복을 이루는 기초가 되길 바랍니다.

 

1. 말에는 이뤄지는 능력이 있다.

그렇습니다. 말은 어떤 말이든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말엔 뜻이 담긴 말과 의미가 없는 소리가 있습니다. 비록 무의미한 소리라 할지라도 그 소리는 소리를 낸 사람에게 어김없이 돌아가는 걸 종종 봅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약3:2절을 함께 찾아 읽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이어서 6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세치 혀가 온몸을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고 즐겁고 기쁜 천국에서 살게도 합니다. 야고보서는 사람에게는 실수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눅6:45절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은 그 중심에서 생각한 게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말하며 대답할 때 느끼고 깨닫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세치 혀를 잘 통제하는 인격이란 결국 한 사람의 모든 됨됨이를 의미합니다. 그 됨됨이 즉 말을 삼가는 게 결국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아래 진행되는 출애굽 여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한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민14:2-3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쓸어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어 22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기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그들의 말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듣고 말한 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부정적인 보고로 본 자와 들은 자가 다 함께 하나님을 불신하고 절망하여 말한 그대로 그들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겸손과 비굴은 다릅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결코 부정적인 견해를 갖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릴 위해 일하시되 주도면밀하시고 신실하시며 실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의 흉을 보는 것도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더욱 부끄러운 게 많기 때문입니다. 혹 그의 수치가 나보다 더할지라도 흉을 본다는 것은 이미 내가 상대적으로 위로받고 있으며 그만큼 교만해졌다는 증거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약3:8절은 우리의 교만한 악과 혀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를 지적하는 성경구절은 롬1:29절에도 있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기억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비와 같이 땅에 적시고 씨를 트이게 하고 열매 맺듯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도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열매입니까? 그렇습니다. 복된 말은 복을 열매를 맺습니다. 수군거리는 말은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니 파멸과 실패와 슬픔의 열매를 맺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하며 자기비하의 말은 자신을 비참한데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귀한 존재들입니다.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복받은 자녀들입니다. 제자입니다. 신부된 자들입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된 자들인데 우리 입에서 나온 중심의 생각과 표현들은 먼저 사단들이 듣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덕스러운 말과 음성으로 온유하게 하는 격려의 말들은 사단의 힘을 빼 맥을 추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위로하며 사랑하는 현장에서 심한 몸살을 하고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찬송을 부르며 뛰며 기뻐하고 구원의 감동으로 눈물흘리는 그 현장은 사단을 결박하여 추방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단을 결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단을 즐겁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의 고백과 말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표현을 몸에 익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거울이요, 상급인 자녀들이 보고 그대로 따라할 것입니다.

 

2. 말은 치유와 파괴의 능력을 지닌다.

 

잠16:24절입니다.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말에는 살리는 말씀과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잠12:13절입니다.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살리는 말을 하도록 입술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말은 성경의 말씀처럼 죽음의 덫이 되는 것입니다.

 

베거스에서 오스틴이란 여성이 옷장사를 해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다루는 옷은 특별한 게 없는데 싸이즈마다 이름이 특이합니다. 16-20을 꼬마형, 22-26을 요염형, 27-33을 아가씨형, 그 이상을 여왕형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스틴은 어떤 싸이즈도 기분좋은 이름을 붙여놓아 성공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적으로 내 뱉은 부정적인 말,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 말 그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말이라는 씨가 뿌려진 그대로 현실이라는 열매가 되어 돌아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은대로 될지어다, 주님의 말씀은 곧 나타날 현실인 것을 믿기 축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소개되는 경건한 어느 백부장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눅7:6b-7절을 읽겠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대단한 믿음과 경외심입니다. 백부장은 백부장의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하인의 병이 낫습니다.

언즉인(言卽人) 필즉인(筆卽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은 즉 그 사람의 사상과 인격을 표현합니다. 물론 언행일치의 인격인 경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으로 수석제자와 사도의 자리에서 온전한 헌신으로 순교합니다. 그 고백이 능력이 되어 고백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도로 한번 설교에 수천명이 구원받는 놀라운 사도의 길을 가다가 영광스런 순교자의 이름으로 형장의 이슬되어 사라집니다.

말은 한 인생의 장래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가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자신과 상대방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처를 싸매줄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혈기가 신앙인격이라는 휠터를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올라오지 않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건 노력은 한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기쁨인 것입니다. 반면 올라오는 혈기를 그대로 드러낼 때 교회는 멍이 듭니다. 주님의 가슴이 다시 그 혈기진 말, 그 창에 찔려 피멍이 터지고 고통하십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는 잠언22:4절의 말씀은 이제 우리가 다 압니다. 외운 말씀으로 입술에 선하고 긍정적이고 온유한 말을 내어 모두 부자되시고 명예스럽고 경건한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모두 되시기 축복합니다. 입술에 할례받은 자마다 만복이 넘치는 올 한해가 될지로다. 입술을 제어하며 인내하는 자마다 부요할 지어다. 복된 말로 격려하는 자마다 부자될 지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