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2. 주일낮설교(애3:48~50. 않는 전도자의 눈물)
복음시대에는 사도바울을 눈물의 사도라고 했는데 구약시대엔 예레미아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그들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가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눈물은 인간의 마음을 닦아주는 특별한 힘이 있지요. 꽉 막힌 마음이 울고나면 다소 후련해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늘 날 믿는 우리들은 모두 전도자요, 선교사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이름을 붙잡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주님이름으로 축복하고 안수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만 하던 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전도자의 눈물입니다.
본문 애3:48절을 함께 읽습니다.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전도자의 눈물 그 첫째,
1. 미래를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골고다언덕을 오르시는 주님이 따라오며 우는 여인들을 보고 하신 말씀 우리가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23:28)” 아멘.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영생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힘겨운 현실에 살고 있으나 우리의 기쁨은 하늘에 있고 그 하늘은 어김없이 다가오는 뚜렷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과 현실을 보고는 우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눈물은 우리의 기도를 먹고 자라나는 우리의 미래, 조국의 미래, 가문의 미래, 교회의 미래인 자녀들을 향해 준비돼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아가 딸 내 백성의 파멸 때문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아에겐 다가올 이스라엘의 미래가 자신의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그는 훤히 보이는 이스라엘의 파멸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백성과 지도자들을 보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망하기로 작정한 자들처럼 우상숭배하면서 방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부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동서고금 저와 여러분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죄성이 예수십자가 앞에 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도록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들의 미래인 자녀와 믿음의 후진들을 위해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성령께서 울게 하시면 울고 깊은 묵상을 주시면 깊은 묵상 가운데 주님만나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흘리는 전도자의 눈물은 탄원과 간구, 그리고 깊은 묵상을 드릴 때 울부짖는(울며 부르짖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의 시간이 간곡하고 뜨겁고 깊기 위해 그만한 회개가 선제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최고의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진실한 회개가 앞선 기도입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뜨거운 회개는 뜨거운 기도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 때 올리는 간구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드릴 것이고 그렇게 속 시원한 회개를 하면 소리쳐 기도하지 않고 고요한 묵상만으로도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충분합니다.
묵상이란 영문‘meditation’은 히브리어로 hagah인데 사자가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사31:4)의 ‘으르렁거리다’입니다. 먹이를 움켜쥐고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내는 환호 ‘하가’, 시편에서 우린 ‘으르렁거리다’로 번역했고, 영어는 growl, roar 등으로 번역했는데, ‘으르렁거리다, 환호성, 포효하다.’라는 뜻으로 전리품을 손에 잡고 감격하며 내는 소리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확인되는 구원과 영생의 놀라운 선물로 인해 내면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환호하고 감격하는 순간이 묵상의 본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감동적이고도 힘있는 전도자의 멈추지 않는 눈물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든 미래를 붙잡고 간곡히 아뢸 때 우리에겐 울부짖는 주님과의 교통이 기도와 묵상으로 3층천의 체험이 될 것입니다. 49절과 50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전도자의 눈물 그 두 번째,
2. 주님을 만나야 멈추는 눈물입니다.
예레미아의 눈물이 그치지 않고 쉬지 못하는 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와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면 예레미아의 눈물은 찬송이 되었을 겁니다. 예레미아의 심정으로 주변과 가정과 교회와 통일한국의 미래를 돌아보시면 우리의 눈물이 쉽게 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생활구조에 한가하게 앉아 주님을 묵상하기란 시간사정이 쉽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고 마음이 없는 것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일 뿐입니다. 내가 자녀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나아가 통일조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하고 요긴하며 귀한 일이고 또 특권인지를 안다면 결코 그 일에 게으르지 않게 됩니다. 아니, 게으를 수가 없게 됩니다.
시119:136절에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시편기자처럼
이제 멈추지 않는 전도자의 눈물은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의무이며 특권인줄 알았습니다. 이 말씀 받은 후로 우리
모두 전혀 새로운 기도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렇게 예레미아의 영을 받으려면 첫째, 짧든 길든 시간을 내야 합니다. 기도의 깊이는 길고 짧음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선 들어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이도 있지만 이는 훈련하기에 따라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을 일러드립니다. 가능한 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시간이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개인 일과를 살펴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중심, 물질, 시간 그 어느 것에도 인색하지 않아야 풍성한 주님과의 교제를 허락받게 됩니다.
둘째, 적절한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훈련이 부족한 이들은 이 장소에 예민합니다. 허나 훈련된 이들은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무시기도란 기도를 하지 않는 이들의 핑계가 되기도 하는 한편, 마음만 먹으면 즉시 가슴이 전율하는 기도로 기도의 달인, 영적인 사람들이 하는 기도의 독특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영을 감각하여 전율하듯 느끼며 감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우리는 사람을 기뻐하고 사람에게 분노하고 사람 앞에서 구걸하듯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했는지요? 정녕 주님의 실존 앞에 떨며 감동하기까지 우리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고 달려왔습니다. 때로 사람이 감동을 줄 때 그 사람 뒤에 계신 주님의 숨결을 깜빡 잊고 사람에게 빠져 취했습니다. 얼마나 허탄한 일이었는지 그 세월을 한탄할 것도 없이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듯 뜨겁고 절실한 교제를 통해서 사람으로부터 자유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하여 진정 진리로 인한 자유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리될 줄 믿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요, 능력입니다. 사람보지 말고 하나님께로 더 깊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보면 구하려 했던 모든 것이 주님 손에 있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살아계신 생명의 구주, 영생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시오니 오직 그 앞에 주님 눈앞에 살기를 소원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눈에 속지말고 깨어난 영, 살아 숨쉬는 건강한 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깊은 교제권 가운데로 가게 하옵소서. 잠시면 끝나는 흙의 길에서 한 사람도 낙오없이 전도자의 눈물로 주님 앞에 서서 칭찬받는 영의 아들들로 복음의 씨가 다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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