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연이 있다.
17세 여고생과 18세 청년은 서로 순전하게 좋아했다.
맺어질 수 없는 동성동본이라 소녀는 서둘러 혼인이 이뤄졌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들었다.
청년은 군에 지원입대했고 그녀를 못잊어 심한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도 간혹 꿈에 보여 그리움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아프기에 아픔으로 행복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받는 자보다 하는 자가 아픈 만큼 행복하다며
아직도 뇌리에 칼손의 아릿다운 소녀인 그녀가
지금 어떤 할머니가 되었고 어찌 지내는가는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다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도 가끔 그녀의 꿈을 꾼다.
해맑은 모습, 노년의 심장을 뛰게 하고 힘겹게 하는 그리움에 포로가 되어 그 여운으로 가슴이 아려와도
노인은 행복하게 들뜨고 만다. 그리고 심하게 아파한다. 그냥 한없이 그립고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또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유부녀, 할머니가 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고
그가 지금 그리운 건 이미 오래 전 사라진 칼손의 소녀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그녀도 노인처럼 가끔은 첫사랑의 남자로 아파할 재미교포 어느 할머니이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 앞에 철없이 무책임한 첫사랑의 짐을 지어준 죄인이다.
뜨거운 그리움으로 그녀를 못 잊어도 그를 만나기가 두려운 이유는
그녀는 이미 외모를 비롯해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보고 싶어 한다.
혹시 어린 날의 죄를 용서받고 그녀를 위로하고 서로 좋은 친구로 늙어갈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아름다운 시와 음악과 무엇보다 복음의 참맛을 주고받고 싶은 것이다.
칼손의 소녀를 보고 싶어하는 애련,
생전에 실현될 수 없는 하나의 꿈이련만 이리도 깊이 새겨져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실상이면서 허상이다. 외형으로는 실상이지만 실제로는 분명 허상이다.
DNA속에 있는 생물학적 그리움도 이렇듯 몸부림치는 허상으로 가득하지만
창조주를 향한 그리움은 허상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것이 가장 확실한 실상이다.
생명이 갖는 근본적 귀소본능이고 생존에 대한 마지막 허우적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 사귐은 육체가 늘 방해한다.
그래서 사도바울께서도 몸이 늙을수록 새로워지는 영을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시절, 그 음성 그 표정이 그리운 것이지 전혀 달라진 그녀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면서도
여전히 그녀가 그립고 못내 못 잊어 힘겨운 것은 무엇인가? 실상은 자신 안에 있는 추억이다.
그렇다면 실상과 허상사이에서 인간이 혼미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30년 만에 찾은 고향집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은행나무 뒷쪽 산은 어린 날 추억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앞쪽 마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전혀 낯선 아파트 숲이 되어 있다.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반은 살아있고 반은 사라진 추억의 현장에서 나는 보이는 것들의 허탄함을 순식간에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아이를 너무 예뻐했고 말할 수 없이 귀염을 떠는 그 애로 진정 행복했고 기뻤다.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우린 한동안 절규했다.
2년여 만에 만났는데 아이는 부쩍 자라서 귀여운 애기가 아니라 그냥 명랑한 소년이었다. 허망했다.
그토록 그립던 환상이 깨어졌다. 추억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 그 아이를 나는 오늘도 그리워하며 종종 아파한다.
실상의 그 아이를 두고도 다른 추억 속의 그 애기를 그리워하듯
그 노인은 할머니가 된 그녀가 아니라 칼손의 소녀를 그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래 전 내가 어린 내 아들딸들에게 받은 그 앙증맞은 귀여움의 위로와 기쁨을 지금도 못잊어
성인이 된 자녀를 보면서 추억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인간은 추억과 실제 속에서 늘 헤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진실한 사랑은 믿음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신뢰하면 그 신뢰로 힘을 더하고 힘은 운동한다.
운동력있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모두 허상이 아닌가?
첫사랑의 흔적으로 힘들어하는 인생들에게 선각자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언젠가 사라질 그림자 같은 허상들이고
실상은 믿음으로 확정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럼에도 실상인 천국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리석음이 있다.
그 어리석음을 불신, “믿음없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믿음이 능력인 것은 눈에 뵈지 않아도 분명한 실상으로 다가오는 주의 나라기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주의 나라는 주의 통치함이 머문 상태로서 그 분의 권능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께 붙잡혀서
그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구하고 기뻐하면서 절대신뢰로 자녀가 된다는 것만큼
힘차고 기쁜 일은 세상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