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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窓가에서

2013.09.27. 여기 이 땅에는 답이 없다.

by 설렘심목 2013. 10. 29.

 

    2013.09.02.월요.

    서로 부족하여 아옹다옹하는 여기 이 땅에서는 답이 없다.

    이 땅에서 답을 구하려는 그 생각이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다.

    그런데 불행과 고통은 다르다.

    이 땅, 여기서 답을 구하려는 게 불행이라면

    그럼에도 여전히 버겁고 피하고 싶어 몸부림치면서 자유하지 못하면

    그것은 고통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이다.

    이 땅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 명료한 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자유하여

    고통과 서름없는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려면 소망의 원천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어야 한다.

    본래 부조리한 여기에서 다 내려놓은 뒤 위를 바라보되 現時的 확신에 차야 한다.

    분명한 목표가 선명하면 가슴뛰는 설레임으로 소망하는 그 나라가

    결코 환상 속에서만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 하늘나라의 기쁨이 가득하다가

    눈을 뜨면 삭막한 세상이어서 깨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척박한 이 땅이 곧 하늘나라의 입구 바로 앞에 펼쳐진 진흙밭임을

    영의 눈으로 보고 육체조차 희망에 기뻐 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몸은 날로 삭아져 가도 영은 더욱 새로워져 그 깊은 희열과 감동을 어찌 다 말하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장 24절 ) 

 

2013.09.27.

사람은 배운대로 가지 않고 감동따라 간다.

우리는 무엇에 감동하는가에 따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아름다운 꽃과 향내, 경이로운 풍경, 극도의 훈련으로 연출되는 기교 등

보이는 것에 대한 감동과 극진한 희생이나 신의, 사랑처럼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감동이 있다.

뵈는 것에 대한 감동은 뵈는 동안에만 감동할 수 있고

그 기억에 한하여 감동할 것이다.

그러나 뵈지 않는 것에 대한 감동은 그 지속력이 뵈는 것에 대한 감동보다는

크고 오래일진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감동은 결코

정황적인 사고판단이나 사고추리에 따른 믿음과 감동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영이 활동함에 따른 신비요,

특별한 생명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감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다만 죄인이 등을 돌려 그 빛을 외면하여 못보고 빛이 없다고 하는 것 말고는...

 

2013.10.05. 토요.

지식과 지성은 다르다. 지식이 내린 바른 판단과 소신에 의해 활동하면 그것은 지성이다.

지식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세상 앞에 소심하지만,

진정 지성인이라면 세상 앞에 담대하고

하나님 앞에선 아주 작아져서 소심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바른 지성에 의해 내가 낮아진 만큼 하나님은 높아지시며

내가 작아지길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내게 그리 큰 존재가 되질 못한다.

그런데 비극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심과 절개, 지조는 결국 자신을 가장 미워하는 일이 아닌가?

 
주께 맡기라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얼음처럼 녹았듯이 
내 삶을 짓누르는 이 모든 근심 걱정 
주 앞에서 다 녹으리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얼음처럼 녹았듯이 
내 삶을 짓누르는 이 모든 근심 걱정 
주 앞에서 다 녹으리 
우리의 힘으로는 조금도 어찌할 수 없으나 
전능하신 주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네 
못하심 없네
태산처럼 보이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주 안에서는 평야 같이 되리 
하나님께는 길이 있네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다네 
우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세 
주께 맡기세 


2013.10.18. 금요.

오늘은 좀 앞당겨 오른쪽 눈물관 시술 마무리로 관확장을 위해 넣어두었던

가는 루프선을 제거하러 김안과에 간다.

둘러보면 거저얻은 귀한 선물 아닌 게 없다.

생명과 몸과 가정과 신앙과 바른 가치관과 글을 좋아하는 것 외에 허물까지도

교회와 자신의 유익으로 그리고

영광은 주께로 돌리게 하시는 각성이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들로 주변은 풍성하다.

다만 그 풍요를 어떻게 어디에 잘 사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숙제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사용하는 자신으로부터 행불행이 갈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기(애3:33)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난지도(註 : 여의도 옆 마포나루터에 마련된 쓰레기 하치장,

계속 토적처리로 이젠 작은 산이 되었다.)에서 들려오는

밀양아리랑(날좀보소, 날좀보서,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으로 법적댄다.

부패한 가스가 숨을 죄여오는 이 땅에서 모두들 날 좀 봐달라는 것이다.

관심 좀 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이뤄논 일 내 소망, 내 그리움과 아픔을 좀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녹녹치 않아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걸 쉽게 알지 못한다.

최선을 다해 꾸미고 나가지만 그걸 가장 많이 봐주고 관심하는 사람은

허망하게도 자신 외에는 거의 없다.

그냥 내가 내게 취해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외롭지 않으려면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게 결국 나를 아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살피고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면서 기억해주면 그는 반드시 나를 기억해낸다.

그 역시 자신을 위해 그리하는 것이다.

 

아침 예배당가는 길의 잡초를 몇 개 뽑으면서 생각했다.

초는 비가 온 후에 뽑아야 부드럽게 따라 나온다.

그러면 지저분한 밭이 말끔하게 정리된다.

궂은 날이 지날 때 누구든 아우성치며 신음하지만

그 날이 지난 후에 회개할 여러 가지가 상당부분 뽑혀나가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밭이 개운해 지는 것은 신음할 때 주님이 찾아주셨고

그 순간 마음의 제초작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잡초를 없애는 귀한 삶의 자산이다.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 보혈로 채워진 생수의 강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불평등한 곳에서 평등의 장으로 나오는 것이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곳으로 나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평과 투정이 변하여 감사와 노래가 되고

아픔과 수치가 변하여 즐거움과 자랑이 되는 유일한 지름길이기도 하다.

공짜는 없다. 고통 없는 성장은 결코 없다.

바울사도께서 고백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십자가를 묵상한 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불결과 부단히 싸워 어떤 아픔도 마땅한 것으로 여겨

다소 그리스도의 대속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주의 영광을 다시한번 경험하는 일이다.

예레미아 애가3:27절에서도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일렀다.

어떤 답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환히 보이는 정답으로의 출발이 십자가통과, 그것이다.

 

조선시대 17세기 이전만 해도 시집가는 게 아니라 장가드는 것이었다.

어린 딸이 낯선 곳에 가서 적응하기보단 그래도 사내가 장인댁에 와서 적응하는 게 낫다는

선조들의 배려가 나라의 풍조로 있던 때,

17세기 이후에 접어들면서 성씨를 잇는 가문에 가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굳혀

어린 딸들의 애환은 시작됐다.

가뜩이나 남존여비사상이 강한 때에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여자들의 근본 죄였고

말을 해도 죄, 안 해도 죄, 모든 것이 여자이기에 죄였던 시대에

여인들은 어찌보아 출생이 죄였던 때였다.

이젠 훼미니즘이 넘쳐나서 오히려 여성상위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건국의 아버지대통령. 가난과 공산위협에서 나라를 건진 구국박정희대통령에 이어

이젠 그 따님인 박근혜대통령이 집권8개월째이다.

박정희대통령이 흉탄에 돌아가자 그를 보필하던 전두환장군이 자릴 차지했고

이어 그 친구 노태우장군이 이어받았으나 모두들 때를 따라 하나님이 쓰시긴 했어도 돈에 흔들렸다.

이어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나

좌파성향의 김대중과 노무현은 놀랍게도 편향된 민족주의자였다.

그래서 어떤 일보다 민족이 통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국 이나라를 종북좌파의 온상으로 만들어 놨다.

어떡해든 북한의 깡패세습왕조가 쓰러지지 않도록 도왔다.

국내에선 간첩이 국회에 합법입성하도록 그 배경을 광범위하게 넓혀 주었다.

각계각층에 투입된 종북주의자들은 이제 거의 다된 적화라고 쾌재를 부르면서 가일층 내분을 조장하며

지금도 선동선략에 올인하고 있다.

요즘 통일부가 북한에 강력한 대응메시지를 보내고 국방부에서 심리전풍선대포를 쏜댄다.

종북의 극성으로 그간 엄두도 못낸 일들이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막말을 하는 북정권에게는 더 강해야 한다.

그들은 김일성을 태양신으로 모시는 거대사이비종교집단으로서 강적에겐 약하며 약자에겐 강한 점령자가 된다.

박근혜대통령은 이승만박사와 부친 박정희장군에 이어 역대대통령 중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정희같은 막무가내 딸은 끝까지 가시엉겅퀴로서

우리가 받은 복을 복으로 깨닫게 하는 옆구리의 가시이다.

이석기는 한층 더 나가서 이제 내란음모죄로 몇 년 살다나오면 남쪽의 김일성으로 자리매김할 판이다.

과거같으면 사형감이지만 법조계에도 종북법관이 진을 치고 있어서 필시는 몇 년 있다가 나올 것이다.

젊은 그는 이제 죽지만 않으면 북한에서 인민최고영웅이란 칭호를 받아논 셈이다.

종북세계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미래지향적인 진일보한 정치행보이다.

주님은 그래도 그들까지 함께 데려가라고 하신다.

그들 종북주의자들의 비상식과 억측이 적절하게 통제되기만 하면

한민국은 그 절실한 tention을 결코 놓치지 않을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