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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10.26.주일낮예배(마태복음 14:22-33. 물 위로 걸어오신 그리스도)

by 설렘심목 2013. 10. 27.

 2013.10.26.주일낮예배(마태복음 14:22-33. 물 위로 걸어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을 바라고 모인 오천 명의 군중을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셔서 12광주리가 남도록 먹이셨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뺀 숫자가 오천이니 전체는 2만 명 정도는 됐을 겁니다. 그런 후에 그들을 돌려보낸 뒤 제자들과 떨어져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풍랑이 심하며 배를 타고 힘겹게 건너오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자 놀라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 소리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밝히시자 베드로는 만일 주님이 틀림없다면 내게 명령하셔서 물위를 걸어 주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오라는 주의 명령에 따라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다가 바람에 놀라 두려워하는 순간 물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본문을 통해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과 물속으로 빠져가는 부족한 믿음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한 구절 한 구절씩 함께 읽으며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22-23 : 오천명을 먹이신 이적 뒤에 제자들을 서둘러 건너편으로 배태워 보내신 예수님은 즉시 기도하러 홀로 산에 오르셨습니다. 서둘러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건 무슨 이유입니까? 놀라운 이적과 능력 뒤에 있는 군중들의 환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혹 철없는 제자들이 가로챌 수 있는 위험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가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세상적 권세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중요한 건 예수께서 무리를 보낸 후 혼자 산에 올라 기도하셨다는 부분입니다. 기도없는 사역과 성도의 능력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의 십일조문제입니다. 선물 열심히 하는 자녀보다 자주 전화드리고 찾아와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자녀가 더 친밀합니다. 바쁠수록 고요한 시간을 따로 떼어 주님과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기대합니다.

 

24 : 이미 육지에서 제법 떨어져 돌이킬 수도 없는 험한 풍랑을 안고 뱃길에서 고생하는 제자처럼 되돌아 갈 수 없는 인생길에서 고난당하는 많은 인생들을 연상케 합니다.

갈길이 막막해 돌아가고 싶지만 온 길이 이미 반을 넘었습니다.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너무 멀리왔기에 그냥 간다는 겁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제법 왔는데 본문에는 물결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다에는 순풍도 있고 역풍도 있고 폭풍도 있습니다. 인생항로에서 순풍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때론 생각처럼 되질 않아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정말 원대로라면 깨달은 이 마음을 갖고 초등학교시절로 가고 싶지요.

 

25 : 4경이라면 새벽 3-6시를 말합니다. 한밤중입니다. 깊은 새벽에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깊고 깊은 밤중같은 인생의 흑암 한 가운데에서 죄중에 헤매는 인간을 찾아오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님은 변함없이 지금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십니다. 절뚝거리며 아픔을 호소조차 하지 못하고 안으로 슬픔을 삭이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찾아주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렇게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오셨건만 본토에서는 배척받았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의심하고 피했습니다. 오히려 방해했습니다.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생포하려면 동물은 죽는 줄 알고 생명을 걸고 도망갑니다. 사람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 곧 구원의 계획과 그 능력과 선을 아는 것, 최고의 복입니다.

 

26 :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 두려워 유령이라고 소리치는 제자들은 방금 전에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현장에서 주의 능력을 체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상식을 넘어선 예수님의 출현에 놀라 허둥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부족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홍해를 갈라 자신들을 애굽군대에서 구하시고 미리암이 소고치고 춤을 추며 노래한 것이 엊그제인데 사소한 불편으로 모세에게 대드는 이스라엘백성들과 같습니다. 은혜는 속히 잊고 불편에는 확실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의식構圖(scale)안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실수를 합니다. 물위에 우뚝 서심으로 예수께선 만유의 주재이심을 스스로 선포하시고 미약하고 곤고한 제자들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전에 기적을 체험한 그들이 소리친 내용은 무엇입니까? “유령이다.” 제자들의 상식으로 물위를 걸으면 유령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상식과 고정관념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27절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실존과 그를 믿는 믿음은 그 분이 친히 일러주시고 열어주시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를 교리용어로는 절대계시의존적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는 것은 온전히 계시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27: 두려워 소리지르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는 주님은 오늘도 시공을 초월하여 늘 그렇게 당신의 양들을 향하여 가장 절실한 목자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은 지금도 여전히 신음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세미하게 들려오는 위로의 메시지, 소망의 소리, 생명의 소리, 복음입니다.

 

28 : 즉시 나서서 응대한 사람은 역시 화급하고 적극적인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오고 있는 분이 진정 예수님이시라면 얼마든지 자신에게 명령하여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믿음위에서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이렇듯 확신하고 간구했을 때 그 믿음의 요구는 즉시 현실이 됐습니다. 믿음대로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드러내는 도구가운데 하나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9 : 베드로의 이 요청에 주께선 베드로를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죄인들을 찾아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을 딛고 서서 다시 우릴 부르고 계십니다. 성도는 주님이 부를 땐 가면 됩니다. 주저함이나 갈등없이 나아가는 베드로는 주님의 초청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30 : 믿음으로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출렁이는 파도를 보고 그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파도가 믿음보다 컸습니다. 늘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믿음이 능력이요. 믿음이 승리”라는 겁니다. 믿음이 파도보다 크면 아무리 험한 파도라도 믿음 앞에 작은 물결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으면 작은 물결이라도 큰 풍랑이 되어서 인생방주를 뒤집어 놓게 됩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눈에 뵈는 환경에 놀라 죄악된 나락으로 떨어지는 연약한 믿음의 지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간절히 구원을 청합니다. 우리는 힘든 일을 당하면 주님을 찾기보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활용하여 불행의 터널을 벗어나려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손을 내밀어 주실 주님을 잊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찾아야 합니다.

 

31 : 주님은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그 손을 잡은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새로운 가치관의 시작이요, 새로운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출발입니다. 손내미시는 주님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손을 들어 기도하십시오. 손을 들어 찬양하십시오. 오른 손을 높이 들어 결단, 결단, 또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32 : 베드로가 물에 빠진 건 믿음이 약한 때문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물에 빠지는 것과 물위를 걷는 것의 차이는 다름아닌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물을 딛고 서서 나아가는 능력된 삶과 물속에 빠져 허우적이는 모습은 대단히 큰 양극의 간격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운 타락과 사망의 모습이요, 하나는 세상과 환경과 육신을 정복하고 힘있게 주님향하여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믿음과 의심은 반대편 말입니다. 주님의 오병이어기적과 물위의 기적을 방금 보고도 믿지 못해 물에 빠졌다는 것은 인간이 본질상 믿음없는 진노의 자녀임을 여실히 증거하는 대목입니다.

 

33 : 배위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놀라며 감동한 제자들이 예수께 절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드러난 기적의 현실 앞에 그들은 유구무언, 주께 경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연약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곁에서 그를 따르며 그 놀라우신 역사를 눈으로 보며 그의 인격을 경험한 제자 중 가장 두각이 드러나는 베드로의 믿음과 그 고백과 행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보잘것없는 인생을 끝까지 구하시는 주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 .

① (물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주님_)구원은 찾아주시는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며

② (오병이어의 기적을 방금 전 경험한 베드로의 연약)인간이 갖는 믿음의 분명한 한계와

③ 주님의 구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궁극적 구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주의 구원과 인간의 믿음은 날마다 성령의 공급하심과 주님과의 인격적 교감을 통하여 주께서 친히 성숙시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직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 성령체험을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겁니다. 이렇게 미숙하고 연약한 베드로가 훗날 설교하면 수천명의 군중이 믿고 구원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머뭇거림 없이 순교를 자청합니다. 그는 살기위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음성을 듣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순교합니다. 성령의 충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항상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의 한계를 늘 인정하는 겸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도우시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한 절대신뢰의 믿음을 소유함으로 물위에 빠지지 않고 물위를 걸어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위에 드러내는 성령충만한 성도, 탁월하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