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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06.09.주일요예배<출33:1-6. 단장품을 제하는 이스라엘>

by 설렘심목 2013. 6. 13.

2013.06.09.주일요예배<출33:1-6. 단장품을 제하는 이스라엘>

 

모세가 우상숭배하는 아론과 백성들에게 분노하여 십계명 돌판을 던져 부수고 하나님앞에 엎드려 탄원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일단 용서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노여움이 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본문 1절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선 “너는 네가 애굽땅에서 인도해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은망덕한 백성과는 함께 가지는 않으시겠다는 건데 그 이유는 아직 분이 삭지 않아서 언제 백성들을 돌격하여 모두 죽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 하나님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용서는 하셨지만 아직도 개운치 않은 하나님을 보면서 우린 뭘 배웁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의 후유증입니다. 우상숭배는 영적간음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행음장면을 목격한 자의 분노, 바로 그것입니다.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는 분노. 사랑은 그래서 고통입니다. 지금 모세 때문에 용서는 했지만 다 가라앉지 않는 분통은 사랑하기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 백성들과 함께 가다가는 자칫 다 죽여버릴 것 같은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신 사랑앞에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그리고 당장 몸에서 단장품을 제하여 버리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미 고개를 떨어뜨리고 걸음도 무겁게 걷습니다.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명령하십니까?

 

 

1. 몸에서 단장품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3000명을 칼로 베어 죽이고 초상난리를 치루며 회개했지만 아직도 얼떨결에 몸에 걸치고 있는 단장품에는 당시 가정수호신 등 갖가지 우상과 동물의 아로새긴 모습들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조차 싫었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마치 바람피워 이혼직전까지 갔다온 남편의 해묵은 수첩에서 발견되는 김마담전화번호같은 것입니다. 비록 끝난 일이지만 울화가 다시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당시의 단장품이나 오늘날의 단장품에서 변함없는 한가지는 그것이 하나님과 무관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등진 것으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몸에 걸친 장신구를 살펴보세요. 몸은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 몸과 삶에 걸쳐있는 장신구를 살펴보세요. 거기 무엇이든 어떤 형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게 우상이 되질 않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믿음이 무너져서 장신구를 애지중지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뭔가를 더 의지하려는 것 그것은 조심해야 할 삶의 장신구, 곧 단장품입니다. 단장품은 꾸미는 악세사리를 말합니다. 뭔가를 꾸민다는 것 자체가 실체의 모습보다는 아름답게 하려는 의도가 있고 그것은 선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위장인 것입니다. 뭔가 그럴싸하게 보이려는 마음. 인정받고 싶어서 튀고자 하는 행위들...몸, 곧 삶의 단장품들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부풀려 꾸미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겉치레보다는 부족한대로 진실한 모습으로 주앞에 꿇어 엎드리는 자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해야 합니다. 끝까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실보다 비싸게 보이려는 어떠한 의도도 단연코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단장품이라는 것이 대부분 아로새긴 형상들이 꾸며져 있어서 사람의 눈을 현혹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에도 갇혀 있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외모를 꾸미는 것보다 더 혐오스럽고 두려운 것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을 꾸미고 위장하려는 의도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2. 기도에서 단장품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사람은 멋진 기도라며 은혜를 받아도 하나님이 외면하는 기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대표기도를 하거나 공중기도를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기름이 흐르는 듯한 세련된 기도로 은혜를 끼치고자 애씁니다. 이는 하나님앞이라는 생각보다 사람앞이라는 생각의 기도로서 하나님과는 무관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은혜받으라고 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앞에 진실로 올려드리는 기도는 듣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할수록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합니다. 안보이는 하나님의 영보다는 보이는 사람들이 우선인 사람은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입니다. 비록 어눌한 말로 더듬거려도 순결과 거룩이 배어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이 감동하게 됩니다. 6절입니다.“이스라엘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단장품을 제하니라.” 기도에서 단장품을 제하는 저와 여러분되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3. 헌신에서 단장품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헌신이란 말은 몸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몸은 삶을 말합니다.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인데 이는 한마디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과정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헌신이라고 부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헌신자들입니다. 다만 그 농도와 순도면에서 어느 정도의 격차는 있지만 분명히 우리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헌신된 성도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이미 하나님의 거룩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단장품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몸을 드려 하나님을 향하여 새생명을 살기로 결단한 그 대견한 회개가운데 나의 일신상의 안락이나 편의를 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단장품입니다. 순결한 헌신은 아닙니다. 모세를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모세는 여러 가지 단장을 멋지게 한 귀족적 이스라엘 청년이었습니다. 궁중의 고급 엘리트교육과 훌륭한 외모, 애국애족의 열정 등으로 단장된 멋진 청년, 모세는 그 단장품이 다 제하여 지기까지 40년을 하나님은 기다려주셨습니다. 40년 키우시고 다시 40년 단장품을 제하신 뒤 순수한 영혼이 되었을 때 헌신토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단장품이 사라지고 순결해지자 모세를 하나님은 뭐라고 부르십니까? “이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이렇게 단장품이 제하여진 모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면하십니까?

 

4. 친구하고 대면하여 이야기하듯 말씀하십니다.

 

믿을 건 모세하나였습니다. 그런 모세가 13절에서 다시 백성들을 위해서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봅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이것은 1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한 데 대한 간구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14절입니다.“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아멘.

동행으로 편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행은 보호와 안식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든 꾸밈과 허영과 자기위주의 단장품을 제하여 버린다면 우리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구처럼 마주서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대화는 깊은 기도입니다. 깊은 기도는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신앙인격을 세워 갑니다. 그리고 깊은 영적인 능력은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의 능력을 드러내며 주신 삶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삶과 기도와 헌신에서 자신을 위한 단장품을 제하여서 주님과 대면하여 교제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로 멋지게 사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