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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05.26.주일오후예배<창17:15-21.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

by 설렘심목 2013. 5. 28.

 

2013.05.26.주일오후예배<창17:15-21.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

 

 

성경에는 간혹 하나님이 바꿔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그리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개명됩니다. 부모가 지은 이름은 부모도 책임지지 못하고 이름처럼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라면 하나님이 이름에 합당한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브라함부부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사라의 몸에서 아기를 낳게 되리라고 약속한 건은 아브라함의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이 백인데 사람이 무슨 출산입니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보존되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어이없어 웃으며 믿지 못합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몇이라고 했습니까? 89세입니다.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서 출산할 것과 태어날 아이이름까지 정해주셨습니다.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아들도 감사한데 더 감사한 것은 그 아들과 하나님께서 친히 또 언약을 세우시고 그것은 그 후손들과 영원한 약속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상최고의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더 잘 살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린 비록 고생스러워도 자녀들이 잘 산다는 보장만 있다면 지금 이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고 있는 복된 여행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장래 아들을 예고받는 기쁨에 이어 그 아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언약을 받습니다. 인생이 세상살면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최상이요, 기쁨이요, 영광이며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복된 언약을 확인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손님을 맞는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18:2절을 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여 몸을 땅에 굽혀”그렇습니다. 달려 나갔습니다.

 

1. 진실로 나그네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환영하며 맞았습니다. 몸을 땅에 굽혀 깍듯하게 예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마음을 쾌활하게 한 후 가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하나님의 천사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뉘신지는 몰라도 귀한 분들이 여행길을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대접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히13:2절에서 히브리서기자는 이 장면을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함으로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서 다시한번 복된 언약을 받습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하나님과 그 사자들을 말하는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1)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주신 하나님이며 (2)환영 후대하는 아브라함에 (3)불신하여 허탈하게 웃는 사라입니다. 사라의 허탈한 웃음은 17장의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아브라함의 자세는 특별합니다. 6절에“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사라에게 떡을 만들라고 하고 7절에는 “짐승에게 달려가서 좋은 송아지를 잡아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했다고 말합니다. “급히”라는 말이 두 번. 달려간다는 말이 한번 나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귀한 손님들에게 매우 성실했다는 걸 말합니다.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는 잠시 왔다가 훌쩍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짧은 시간 최선을 다하는 아브라함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나그네 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모두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부지중에 잘 대접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셨고 그들에게 언약을 확인받습니다. 대접한 송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것, 곧 자손과 그들의 보장이 되시는 여호와의 언약을 받습니다. 셋 중 한 분은 하나님이셨는데 이 부분은 영적인 신비에 쌓여서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난해구절입니다. 아무튼 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돕기 위해 예수님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10:42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그렇습니다. 나그네가 이 땅을 살아지나가면서 다른 고달픈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일은 곧 그 나그네를 통한 하나님사랑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일에 하나님이 보상하신다고 하십니다. 좌우를 한번 보세요. 함께 천국을 향해 가는 길동무들입니다. 서로 잘 섬겨주고 잘 챙겨주시고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언약이 확인될 줄 믿습니다.

 

2. 아들의 약속을 확인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잘 대접합니다. 이 말씀은 평소 나그네나 이웃에게 아브라함이 헌신적이었음을 증거하는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느날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늘 하던 대로 했고 이는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낯선 이에게 친절히 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나그네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것은 대접을 융숭하게 받은 뒤였습니다. 9절에서 “사라는 어디 있나?” 사라의 이름을 부르면서 물었다는 것은 새 이름 사라를 지으신 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고 아브라함은 즉시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래도 사라는 장막 뒤에서 손님들과 남편의 대화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맙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미 속마음을 아시고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느냐? 내년 이맘때 내가 올텐데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그런데 사라가 어찌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웃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사라가 놀라서 웃지 않았다고 하자 “아니. 웃었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증표를 어디에 남깁니까? 바로 내년 사라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17:19절에서 벌써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으로 지어주십니다. 17:17절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심중에 웃으며 말했다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도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으며 믿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하나님의 예고를 믿지 못했습니다. 노부부에게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앞에서(범죄치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아니다. 네 몸에서 낳을 것이고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너희가 웃었으니 이름을 웃음 즉 이삭이라고 하거라.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사실 아브라함부부의 믿음을 도전하고 깨워 일으키는 경각의 이름입니다.

 

어느 권사에게 하나님이 큰 재산 주면 뭘하겠냐고 물어서 “제게 그런 큰 재산생길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는데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복합선교건물을 훌륭하게 세웠는데 큰 빌딩의 이름을 뭐라 지을까 궁리하던 중 하나님이 네가 어처구니없다던 건물이니 어처구니빌딩이라고 하거라 해서 그 건물이름이 어처구니빌딩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부부가 아들을 부를 때마다 인간의 상식과 과학을 넘고 자신들의 몸을 뛰어넘어 이뤄진 하나님의 약속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아들을 부를 때마다 신실하신 여호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아들이삭을 그러한 믿음의 다짐을 통해 모리아산으로 데려가게 한 것입니다. 아들이삭은 자신들이 그렇게 피식피식 웃으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던 비상식이 현실로 드러난 증거입니다. 그 증거를 날마다 입술로 하루에도 몇십번씩 부르며 살아갑니다. 기가 막힌 이름입니다.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하는 이름 이삭입니다.

 

여러분. 오늘 두 가지 주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고 성실히 대하는 아브라함의 평소 삶의 태도는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극진히 모십니다. 그리고 복된 약속을 확인받고 구체적인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은 약속앞에 허탈한 웃음을 웃은 아브라함부부였습니다. 그 부부에게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요, 어미가 되게 하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그 아들의 이름을 아예 “웃음”즉 이삭(아이츠하크)이라고 명명합니다. 대단하신 배려였습니다. 훗날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려가기까지 이삭의 이름은 믿음의 도전장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한번 잘 섬겨보라고 강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내 모습, 이웃을 향한 내 마음, 이웃을 향한 나의 평소 삶은 그대로 하나님앞에서의 내 신앙고백인줄 믿기 바랍니다. 아름답고 진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평상의 삶이 하나님앞에 늘 칭찬받는 고백되시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