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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03.31.부활주일설교<요11:24~27. 성도의 부활영생>

by 설렘심목 2013. 3. 30.

2013.03.31.부활주일설교<요11:24~27. 성도의 부활영생>

 

오늘은 기독교 삼대명절인 성탄절, 추수감사절과 함께 주님 다시 사신 부활을 기뻐하는 복되고 화려한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는 죽은지 사흘되어 얼굴에 베를 감고 냄새가 나는데 주께선 죽은 게 아니라 잠시 잔다고 말씀하신 뒤 본문의 내용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이란 말이 성경과 세상에선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걸 우린 압니다. 진정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 못 받아 죽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음부에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 그리고 우리들의 부활을 살피는 오늘 모두에게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 그 기쁨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히8:5절에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와 땅에 있는 율법의 제사장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행사가 천국의 그림자인 줄 믿습니까? 오늘 이후 불변하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될 본문 24절을 함께 읽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부활절에 듣는 복된 소식은 첫째,

 

1. 주님 앞에 사는 성도는 몸을 버릴 때 죽지 않고 부활합니다.

 

마르다가 믿고 알듯이 우리도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성도들에겐 당연한 이 사실이 세상에선 전혀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일입니다. 문제는 성도들에게도 이 놀라운 사실이 종종 남의 일처럼 낯설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뜸해져서 영혼이 힘을 잃으면 그렇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받는 가운데 주님 부으시는 힘찬 새 영을 받기 축복합니다. 여기서 잠시 진리를 봅니다.

여러분, 진리는 단순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진리는 하나요, 단순명료합니다. 진리는 참된 이치를 말하고 이치는 사물의 정당하고 당연한 조리라는 사전적 정의를 뒤로하고 그냥 뭔가를 말할 때 그건 그런 거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정의를 내릴 때 그것을 진리라고 할 것입니다. 그 진리라는 많은 포장을 열고보면 사실 진리는 하나,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 진리 중 진리는 그러면 무엇입니까? 기억하하십시다. 첫째,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되 영원히 계신 분이라는 것, 둘째, 하나님이 사랑 그 본체시라는 겁니다. 사랑을 말할 때 하나님없이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기억하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신데 언젠가는 썩고 사라질 만물처럼 손에 잡히는 물질이 아니시고 눈에 안 뵈는 영이시라는 특별한 점입니다. 셋째, 진리는 그분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시되 당신의 본질인 사랑을 구현할 대상으로 당신을 닮은 최고의 명품 인생들을 창조하셨다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넷째, 그 인생들에게 자유함과 의지라는 인격을 주셨는데 그 자유의지속에는 스스로 결정하고 강제해서 자신을 누르고 순종할 힘뿐 아니라 자기생각을 따라 결정하고 책임질 권한까지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 베풀어 놓으신 생명과와 선악과의 깊은 의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자 사랑이시며 품격이십니다. 생각없는 로봇의 고백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한 의지적 강제의 인격과 고백을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라셨던 겁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배신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까지도 주셨습니다. 물론 책임은 인간이 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복음이신 구원의 주님과의 교제관계를 잠시 살폈습니다.

 

마르다가 받은 부활의 신앙은 이미 우리도 받았습니다. 중요한 건 깊이의 차이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부활신앙고백이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뜨거운 감격으로 저와 여러분의 남은 삶을 전혀 새롭게 하길 간절히 구하면서 이 설교를 주님 앞에 올립니다.

 

부활절이 기쁨일 수밖에 없는 이유, 주님이 죽음과 무관하게, 육체와 무관하게 다시 일어나셔서 영원을 주장하시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고 보살피실 뿐 아니라 영원한 삶, 영생을 보장하셨다는 것입니다.

 

2. 부활을 약속받은 성도는 땅에서 거듭나는 삶으로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파송받은 천국선교사들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오신 것처럼 우리도 육신의 옷을 잠시 입고 하나님의 나라완성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파송이나 출장은 일정기간 다녀가는 겁니다. 거기 머물러 사는 자들이 아닌 나그네인데 마치 그 땅의 원주민처럼 생각할 때 모든 삶이 세속의 노예, 흙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무엇에나 승리를 보장받은 것은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승리의 본을 보이셨고 모든 잠자는 자들에게 첫 열매 곧 부활의 증거가 되어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요, 믿음은 여전히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크기와 깊이에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거저 받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보람과 가치와 기쁨을 더해 주시려고 의지적인 인생들의 몫을 침범치 않으시고 늘 기다려 주십니다. 기어오든 걸어오든 달려오든 그건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셨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찾아주셔서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흙에 돌려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화의 구원은 오늘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부활을 약속으로 받아 넘치는 감격이 있어도 육체는 죄질이라 죄쪽으로 기울어 자꾸 왼편으로 몰아갑니다. 이때 필요한 게 부지런한 신앙활동입니다. 시들어가는 영혼 안에 주님의 보혈을 부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되 내 안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피에 우리 몸을 담그는 신앙고백이요, 그 믿음으로 일상에 돌아가 살아가는 것이 미션이고 신앙활동이며 전도입니다.

 

끝으로 고전15:19절을 함께 읽기 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활동함으로 만유를 주장하시되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특별히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하시는 것에 귀한 도구요, 증거자요, 선포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살이에서도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몸을 통해 증거될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의 능력은 하늘에서 더욱 선명하게 펼쳐져 우리가 비록 여기서는 힘겹게 견딜지라도 부활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된 언약백성들은 결코 불쌍하지 않습니다. 가련하지 않습니다.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부활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보장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