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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04.14.주일설교<삼하19:1~8.다윗의 허물, 압살롬>

by 설렘심목 2013. 4. 16.

2013.04.14.주일설교<삼하19:1~8.다윗의 허물, 압살롬>

 

오늘 본문은 그렇게도 훌륭한 다윗왕이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갔다가 양측 군사가 전투 끝에 간신히 생명을 구하고 잃었던 정권을 회복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윗이 처한 입장은 실로 피할 길이 없는 함정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자신의 목숨과 측근부하들이 몰살을 당할 것이고 이기면 아들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기어코 아들이 비참하게 죽습니다. 삼하12:9~10을 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자신의 허물로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다윗은 차라리 자신이 죽었더라면 하면서 울부짖습니다. 이때 충신 요압이 바른 말을 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듣고보니 옳은 말입니다. 냉정을 되찾아 다윗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오늘 본문 줄거리입니다. 본문이 주는 첫 주제,

 

1. 어찌할 수 없는 아비의 애끓는 사랑입니다.

 

부자지간에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불행한 사태가 결국 자신의 죄값으로 시작된 일인 것을 아는 다윗의 고통을 누가 헤아리겠습니까? 충성스런 요압은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에 온 백성이 왕을 떠나 흩어질 거라고 각을 세워 직언합니다. 다윗은 지혜롭고 단호하되 정이 많은 어진 왕입니다. 즉시 돌이켜 왕좌에 옷매무새를 고쳐 앉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픈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아들의 죽음이 아들의 반역으로 인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간음과 무고한 살인때문으로 받은 다윗의 고통, 세상의 거의 모든 아버지, 아니 부모의 마음은 이렇듯 자녀의 불행 앞에 자신의 무능과 허물을 가슴치며 슬퍼하게 됩니다.

 

에덴에서 선악과 범죄로 쫓겨나 죽은 영, 육체로 살아가는 인류만민에게 하나님은 끝내 스스로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선악을 취할 수 있는 권리인데 이 권한에는 선택에 따른 책임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도 아담의 자유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충성하고 순종할 자유 외에 아무런 의지와 선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고 스스로 결정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그대로 닮되 사단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 아담이 속은 겁니다. 스스로 결정하되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어떤 소리도 아담은 듣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인간이 부족해 속은 죄를 생명의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지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이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십자가에 오르신 것은 하나님이 우릴 창조하셨다는 또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지으셨기에 죄값도 친히 갚아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영원히 품으신 창조주의 깊고도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이시간 애끓는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향해 늘 불타고 있다는 것을 잊지않기 축복합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그 순간에도, 엉뚱한 데 한눈을 파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릴 보고 계시고 끝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나님이 외아들의 생명을 내주시기까지 사랑한 저와 여러분인 것을 잠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7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본문이 지적하는 교훈 두 번째,

    

2. 챙기고 섬겨야 할 주변과 무리들입니다.

 

인생은 관계를 담고 굴러가는 수레입니다. 개인이 모여 단체가 되고 사회와 국가가 태어납니다. 다윗이 자기슬픔에 취해 자칫 백성들을 소홀하면 위기가 닥칩니다. 이럴 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함으로 백성을 챙기는 것이 국가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개인이 전혀 무시되면 이때 전체주의, 또는 사회주의가 되는데 결코 개인의 권리를 무시한 사회주의는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개인의 인권과 사회의 공익이 서로 조화를 이뤄가면 자유민주주의사회가 됩니다. 개인이 물러설 때 물러서면서 적절히 전체를 위해 양보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꾀한다면 그 유익은 끝내 개인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을 잘 조정해주는 게 정치입니다.

우리는 피끓는 슬픔을 즉시 조절해서 백성들에게 돌아와 왕좌에 앉는 다윗에게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백성을 살피는 왕의 위엄과 냉철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자신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피면 주님이 우리를 살피고 챙기실 줄 믿습니다. 먼저 이웃을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거로부터 시작하기 원합니다. 기도거리가 없는 이는 없습니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거리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생명 거듭남의 공동체에 헌신된 모든 것들은 결국 공동체의 거룩한 힘이 되어 개인 개인에게 돌려주실 줄 믿습니다.

8절입니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3.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운행입니다.

 

요압에게 또렷한 직언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다윗의 눈물을 그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백성들을 다윗에게 돌려주신 이도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삼하7:15~16절입니다.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다윗에게 오래 전에 하신 약속대로 왕의 직임을 허락하셔서 백성들이 왕 앞으로 나아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윗의 범죄와 압살롬의 죽음 뒤에 있는 하나님의 불변 약속을 봅니다. 인간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는 그 언약붙잡고 살아가는 천국시민권자들임을 기뻐하십시다. 다만 본문에서 보듯이 우리가 택한 우리의 허물은 이미 예수그리스도께서 치루신 대속보혈과 별도로 마땅한 고통을 통해 성화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를 감사하게 됩니다.

 

한번 더 살핍니다. 십자가는 죄많은 우리가 지옥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간다는 것을 먼저 믿음으로 보장해 줍니다. 한편 살면서 짓는 크고 작은 모든 죄는 십자가의 보혈을 근거로 모두 용서받되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일련의 경건훈련의 과정을 겪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도의 深化, 성화과정입니다.

 

즉,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보장은 다윗의 어떠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하자 그 서원을 갸륵하게 보시고 하신 약속인데 이후 다윗의 범죄가 태산같아도 약속은 불변 이뤄집니다. 다만 약속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성결의 조건을 갖추도록 훈련하며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본문은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귀한 예배자 여러분. 예수믿어 천국가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고 앉아있기에 인생은 해야 할 거룩한 과제가 너무 많습니다. 할 일 다하고 갈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은 저와 여러분.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적절히 희생하며 공동체의 유익을 꾀할 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이 개인들을 더욱 알차고 소망있게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 속의 귀한 개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