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1.주일예배<사53:4-6.어린양 예수의 죄해결>
사람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좋은 직업과 훌륭한 인격을 지녀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깊이 분석하면 어렵지 않게 역시 인생은 죄가운데 깊이 묻혀있는 존재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시14편에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 안에는 물론 일부의 선도 있지만 대부분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이라고 하는 것들도 대부분 영악한 것이어서 철저한 계산속에 교묘히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있다하여도 잠시뿐 급하고 악한 상황이 닥쳐오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어버이마음, 즉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갖는 마음 외에 이른 바, 절대적 선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한 선은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사건을 인간의 사고와 정서로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 낯선 이스라엘 청년 한사람의 죽음이 우리 개인개인의 영혼에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동의가 됩니까? 십자가의 사건은 그렇게 납득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한번에 해결하시는 하나님만의 매우 깊고 정확한 방법이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입니다. 검은 피부가 유전되고, 에이즈보균 산모가 에이즈걸린 아기를 출산해 몇 년 살다가 슬프게 떠나듯 우리는 범죄에 오염된 채 죄인으로 태어난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안타깝지만 에덴동산에서 죄로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그 일로 우리가 죄인의 성향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불행한 출발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치 흑인으로 태어난 아이처럼 한과 눈물을 품고 태어난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떤 흑인 혼혈 아이하나가 냇가에서 돌로 손을 너무 문질러 피가 나는 걸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늘 우울했습니다. 우리는 철없이 아이노꾸라고 놀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도데체 우리안에 죄의 정체부터 알고 싶지 않습니까?
에덴에서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만 하였지 그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녕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러신 것이지 죽는 건 아니니 먹어도 된다고 유혹하였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깁니다. 명령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토록 죽을죄라고 까진는 동의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가 손상을 입은 것입니다. 선악과의 명령이 설명되진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지켜졌여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더 신뢰했다는 것이 죄의 핵심이 됩니다.
내 아버지 말씀보다 다른 이웃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겁니다. 죄는 신뢰가 깨어질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신뢰가 있는 곳엔 죄가 없으니 경찰도 재판도 필요없습니다. 믿지 못하니까 증서받고 보증을 요구합니다. 신뢰가 있는 곳엔 평화와 사랑과 희락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 일어난 에덴의 실수는 무엇으로든 회복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입장에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이 죄의 문제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인간 안에 깊이 박혀 있는 하나님불신의 문제였습니다.
이제 방법을 찾아봅니다. 세상에 답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신뢰를 놓쳐서 생긴 문제는 다시 신뢰를 회복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단의 말보더 더 믿었던 불신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으니 이젠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떠납니다. 불신이 떠나면 즉시 주어지는 것이 관계회복에 따른 화목입니다. 화평입니다. 기쁨입니다. 모든 기능의 정상회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도록 조치하는가하는 방법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상태의 불신세상은 그것을 문제로 보지않고 질문하거나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고민하긴 커녕 답을 갖고 찾아 온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난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난제는 없습니다. 다만 죄인사랑으로 아파하실 뿐입니다. 한번은 물로도 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는 근원적인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4절을 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리스도는 인생들의 모든 질고를 대신 짊어져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1:11~12절에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거합니다.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성경은 우리의 회복과 평화와 풍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때문에 얻어진 은혜, 곧 선물임을 증거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우리 죄를 감당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구원받을 근거를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행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온통 증거를 요구합니다. “내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어” “증거를 보여 달란 말입니다. 분명한 증거를..”믿을만한 증거가 눈앞에 있어서 믿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죄를 씻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마련하신 것이 십자가대속사건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넘어선 곳에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매우 특별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이치적으로 따져 믿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늘에서 열어주는 계시의 능력과 갈급하는 마음으로 열립니다.
인간의 머리와 가슴 그 범주 안에서 이해되고 증거되는 십자가사건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사건이 아니라 땅의 역사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받기 어렵고 도덕과 윤리체계 안에서 납득되지 않는 사건으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믿음의 문제는 신령한 계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한다면 너희들이 나를 불신해서 나를 믿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제단도 쌓지 못하는 너희들이...이래도 믿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지금까지의 불신을 용서하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정리합니다. 귀담아 들으시고 마음판에 깊이 새겨서 늘 기억하시는 진리생명되기 바랍니다.
1. 불신의 죄는 믿음을 심어줌으로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2. 믿음은 이해나 분석을 뛰어넘는 전적인 신뢰에서 출발합니다.
3. 십자가의 사건은 이성이나 상식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며 믿어드림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4.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영생의 길로 인도됩니다.
오늘 받은 진리복음이 여러분 평생에 예수능력으로 늘 함께 하시기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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