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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시사.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강종헌 간첩에게 과거 간첩동지가 보내는 공개서한

by 설렘심목 2012. 5. 14.

[국민대통합위원회 대표-과거 간첩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던 간첩혐의자, 김현장 편지]

 '부산美문화원방화' 주역이 진보당 비례대표 18번, 강종헌에게 편지

이석기 제명되면 막바로 강종헌 의원뱃지달고 그건 국회에 인공기를 꼿는 일이다.

간첩 감방동지의 폭로 "네 조국 北으로 가라!"

"평양 가서 밀봉교육 받고, 알리바이 만들고...더 이상 내 조국 망치지마라"

최종편집 2012.05.14 12:10:16

김현장이 강종헌에게 보내는 편지

“종헌아! 어서 빨리 너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것은 정말 너를 사랑하는 친구의 마지막 충고이다.” 金鉉獎(김현장)
 

못 잊을 나의 친구 종헌에게

종헌아! 나 현장이, 김현장.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대전 중촌동 형무소에서 또 대구 화원형무소의 바로 옆방에서 눈만 뜨면 함께 생활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복받친다. 며칠 전 모 신문에서 너의 이름 석 자를 발견하고는 내 눈을 의심하고 헛된 글자라도 보았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을 하였다. 역시 나의 친구 강종헌이더구나.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복역했던 김현장씨.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복역했던 김현장씨.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너의 이름 석 자가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한 착잡한 심정이 되어 내 친구 강종헌이가 아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 기사를 읽고 또 읽었건만 네가 분명하기에 나는 그만 서재에서 혼자 30분 이상을 울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종헌이 너에게 편지 형식으로 나의 진솔 된 友情(우정)을 전하기로 하였다.

 

종헌아! 너와 내가 30대 초에 지옥 같은 감옥에서 만나고 감옥에서의 우정을 끝으로 헤어졌다가 이제 환갑이 넘은 지금 다시 이런 식으로 상봉을 하게 되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이냐?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치는구나.

너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일교포 유학생 신분으로 재학 중에 소위 '서울의대 간첩단'사건으로 체포되어 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수로 7년 정도 복역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대전 중촌동 교도소로 이감되어 생활을 하였고, 나는 말도 많았던 1982년 3월에 일어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그 배후 조종자로 사형이 선고되어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어 대전 교도소로 이감이 되어 너를 만나게 되었지. 그때 함께 수감생활을 하였던 다른 선후배들의 이름은 낱낱이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너와 나는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유독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지. 그것은 나이가 똑같았고 사건은 다르지만 국가보안법 상의 사형수였다는 점만으로도 동병상련하는 정이 두터워져서 지옥 같은 옥살이에서 서로 의지하며 견딜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떤 면에서는 너를 만난 것이 마치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 같은 행운이었다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사형의 확정, 무기징역으로의 減刑(감형) 등 生(생)과 死(사)의 경계를 모르고 넘나들던 80년대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나의 정신 상태는 증오심을 빼고 나면 그저 멍한 상태였다. 햇볕을 마음껏 쪼일 수 있는 정도의 자유의 眞價(진가)를 받아들이기까지의 방황을 네가 잡아주지 않았느냐?

둘째, 너의 생활 자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단호한 눈빛, 극히 절제된 언어,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 이런 것들은 역시 정치범이 어떻게 옥살이를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典型(전형), 교과서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너는 수퍼맨 같은 친구였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두뇌의 명석함과 그 위에 음악적인 재능까지. 그래서 대전교도소 서부병사 담가에 심어져 있는 해바라기를 보고 네 스스로 작사, 작곡한 “해바라기”라는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고 네가 보고 싶을 때는 가끔 혼자서 웅얼거리기도 하였다.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는 이 땅에 심어진 희망의 꽃…” 하는 노래 말이다. 책을 보다가 녹슨 옥창을 잡고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우리 둘이서 합창을 했던 그 노래. 해바라기는 항상 나의 가슴 속에 종헌이 너로 자리 잡고 있다.
무기징역의 지루함을 “못나가도 좋고, 나가면 더욱 좋고” 하는 심정으로 세월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이겨 냈던 그 기백은 나의 사랑하는 친구 종헌이에게서 배운 소위 징역살이의 내공이 아니었더냐.
친구야, 나는 너를 일본말로 “야쓰” 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지. 그것은 너의 성인 강씨가 한자로 康이었기 때문이지. 불행하게도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돌아가셨다. 그래도 네가 옆에서 지켜 보아주고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지 않았더냐?

1988년 12월에 대구교도소에서 함께 출소하였고, 연세대 강당에서 재야단체 주최로 열린 출소인사 석방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늦은 밤에 함께 찍은 사진이 아직도 사진첩 어디인가에 꽂혀 있을 거야.

사실 이날로 친구와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으로 돌아섰었다. 그것은 친구였던 네가 사랑하고 청춘과 목숨을 바쳐 애국하는 祖國(조국)과 미우나 고우나 내가 사랑해야 할 祖國(조국)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는 철두철미하게 김일성 주석이 영도하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즉 38 이북을 너의 조국이라는 신념 하에 살아온 삶이었다. 13년의 옥살이를 통해서 더욱 단련되었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은 너의 육신을 불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뜨거웠다. 너에 비해 나라는 놈은 혁명적이지도 못하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도 없는 맹탕이었다.

친구야, 나라고 어찌, 기왕 옥살이를 살면서 차라리 혁명가로 존경을 받으면서 살고도 싶은 생각이 없었겠느냐? 한때는 나 혼자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여러 후배들과 혁명의 길을 걸어보고자 엄청 노력도 해보았지만, 너희의 이념에 관한 책을 접해 보아도 시대는 고사하고 우리나라의 상황에 너무나 어긋나는 논리뿐이었다. 자네들이 말하는 주체사상은 우리 남한 사회를 책임질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걸세.

북한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에게 우리나라를 맡기는 것은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드는 꼴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나는 다시 자네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네. 그저 지옥 같았던 옥살이 속에서 쌓은 우정은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고자 했다네. 자네가 통일운동단체의 일본 대표의 자격으로 왕래를 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굳이 수소문을 하여 만나고 싶지는 않았네.

그러나 최근 통합진보당의 내분에 관한 신문보도에서 친구의 족적을 발견하고 나는 한마디로 기겁을 하였다네. 그것도 전략공천의 몫으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18번으로 등장한 데 대하여 말문이 막혔다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의 젊은 친구들의 言行(언행)을 보면서, “어쩌면 저들이 직접 가서 보지도 않았고 체험하지도 않았을 것인데도 북한 노동당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할까?” 하는 의아심과 걱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네. 공식적인 행사에서 애국가나 국민의례를 거부하고 먼저 간 혁명동지들에 대한 추도묵념으로 대신하는 행태까지를 따라서 하니 말일세.

사랑하는 친구야!
강종헌이라는 만고에 변하지 않을 김일성주의 신봉자. 어린 나이에 서울 의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관련된 혁명가가 통합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비례대표에 추대될 정도의 핵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을 나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구나. 이제야 그 동안 의아하게 생각했던 그 당의 핵심 인사들의 행동 양식과 철저한 당원들의 행태에 대한 의구심이 깨끗이 풀렸다네.

종헌이 네가 그들의 뒤에 또는 함께 있는 한 이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행위가 당연하다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너에게 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의 결론을 먼저 적어 볼까?

“종헌아! 어서 빨리 너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것은 정말 너를 사랑하는 친구의 마지막 충고이다.”

왜냐고? 그래 너는 나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 그것도 결정적인 기밀사항을 이야기 한 적이 있지 않느냐.

 

 

네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기억이 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자.
너의 비밀스러운, 그것도 평양과 너만 알고 있어야 할 내용도 있지 않은가. 기억을 더듬고 잘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장소는 대전교도소 서부병사에서 생활할 때였고 함께 생활했던 정치범이 모두 출소하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지냈던 인하대 출신 김성진이 마지막으로 출소한 다음 무기수인 너와 나 단 둘이서 생활하던 때였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기는 어려우나 교도소가 중촌동에서 진잠으로 새로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생활하던 때였다.

이야기는 아마 너의 사건 공범인 서울의대생 서모 군의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냄으로 시작된 것으로 기억된다. 서모 군은 너와 관련되어 7년 정도 옥살이를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는 너의 사건이 정말 간첩단 사건인지 긴가 민가 하였고 네가 왜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지조차 의아해 하고 있었던 것이 그때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야, 종헌아, 너희 사건은 어떻게 된 일이니?” 하고 가볍게 묻는 나의 질문에 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대답은 청천벽력과 같은 내용이었다.

 

여기 그대로 옮기자면, 너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이름은 잊었지만)를 졸업하였다. 공작선을 타고 평양에 가서 초대소에서 지도원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때 마침 캄보디아 시아누크가 평양에 왔고 김일성 주석이 베푸는 특별공연이 있었는데, 너의 지도원이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여 따라 나섰는데 바로 그 시아누크 환영축하 공연장이었으며, 안내한 지도원이 말하기를 “주석님이 와 계시니 오늘은 멀리서나마 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 기회에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여 약 20m 떨어진 좌석으로 안내되어 김 주석을 보고 왔다고 했지.

 

그 무렵 여러 대학에서 재일교포 유학생의 간첩단 사건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졌는데, 부산대, 고려대, 서울대 등이었다. 이토록 어린 학생들이 남파되어 체포되고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고 김 주석이 對南(대남)공작의 총책임자인 김중○(정확한 이름은 기억 안남)을 불러 크게 화를 내고 꾸짖었는데 그 이유는 왜 서툴게 어린학생들이 희생되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김중○은 머슴살이를 했던사람으로 그 출신이 혁명을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으며 악수를 해보니 손이 노동자의 거친 손 그대로라고 했지.

 

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비겁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사실대로 조선노동당의 당원임을 떳떳하게 밝히기로 하였고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혁명가답게,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와서 활동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고 했지.

 

– 이 부분의 내용은 서모 군의 주장과도 같다. 종헌이가 재판 과정에서 간첩임을 인정하자 서모 군이 “종헌아, 왜 그러느냐 정신차려라” 하고 소리 지르며 흥분을 하여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서모 군의 가족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적이 있음-

 

그러나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면서, 1심 때 사실대로 인정하면서 재판정을 선전의 장소로 활용하려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2심에서는 1심에서 진술한 모든 것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고, 평양에 들어가 밀봉교육을 받았던 기간에 일본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제시하는 등으로 법정진술의 방침을 바꾸고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대법원까지 1심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었다고 나에게 말했지.

그 외에 두 번째 이야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동당 당 대회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필름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였는데, 제일 먼저 인터내셔널가(歌)를 부르고, 노동자 혁명을 위해 먼저 간 동지에 대한 묵념 그 다음에는 사회자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설 과정에서 먼저 가신 혁명동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서인데 누구, 누구, 누구라는 식으로 빨리 불러대자 김 주석이 “좀 천천히 하라우” 라고 하자 사회자가 템포를 늦추어 호명하는 중에 “통혁당 김종태” 라고 호명하자, 김 주석이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은 채 괴로워했으며 사회자는 김 주석이 고개를 들고 눈을 뜰 때가지 호명을 멈추었다는 이야기며, 그때 마침 고대 유학생으로 체포되어 무기수로 함께 징역을 살던 이철씨(현재 오사카 거주)가 인쇄공장이던가, 양재공장이던가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출력을 하고 있었지. 나도 오다 가다가 인사를 나누는 처지였고 그 유명한 신영복 선생과 같은 기결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제는 이철씨가 보기에도 나약하지만 생활 자체가 미덥지 못해 보였다. 이런 점을 두고 노동당 당원까지 된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걱정하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또 한 가지,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기타 치기를 좋아했고, 북한의 각종 기념일, 특히 김일성 주석의 생일 때는 찬양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북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며, 그때 마침 북한의 탁구선수가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게임을 하던 사진이 실린 잡지책이 들어 왔는데 여자선수들로 기억되는 선수들의 가슴에 붙이고 나온 북한 국기를 보고 감격스러워 했던 모습이며,
이 사진을 미전향수들이 요구하자 잘못하면 또 추가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면서 거절했던 일이며.

마침 그 가을 무렵인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갑자기 교도소 내에 비상이 걸리고 교도관들이 총을 들고 망대로 올라가고 출력 재소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입방이 되었지. 이때 버마에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아웅산 묘지를 참배하려던 찰나에 폭탄이 터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을 전해 듣고, 나는 “무슨 또 북한에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느냐”고 하자 심각한 표정, 아니 엄숙하기조차 했던 너의 입에서 의외의 답을 들었지.

 

“아니야, 북에서 한 일이야. 내가 잘 아는데 능히 북이 한 거야.”

 

北을 일본말로 “키타”라는 표현을 쓰면서 북의 소행임을 즉각 알아차리던 너의 판단력에 나는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대전 중촌동 교도소 서부병사에서 생활하면서 네가 나에게 보여준 위와 같은 언행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너와의 우정 속에 너의 사상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그저 두 젊은이의 고된 무기징역 생활을 하루하루 즐겁게만 보낼 생각 그 뿐이었다.

종헌아! 그 후 나는 청주교도소로 이감이 되고 너는 대구교도소로 옮겨간 후 잠시 있다가 내가 다시 대구교도소로 이감이 되면서 바로 한 방 건너 이웃 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지 않느냐.

 

친구야, 감옥에서 만난 누구에게도 특히 북쪽에서 스파이로 파견되었다가 잡혀온 분들에게 나는 나의 부모 형제에게 보여준 정성보다 더 진심으로 감싸고 돕고자 하며 지냈던 것을 너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내 살을 저며서라도 모시고 싶었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출소 후에는 한 분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참, 대구 어느 시설에 머무시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두 늙은 분들께 용돈 몇 푼 쥐어 드린 적은 있구나. 그것은 서로 갈 길이 다르고 조국이 다르고 애국의 관점과 길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었다.

 

종헌아! 친구 네가 자랑스럽게 목숨을 걸고 걸어온 길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조작에 의한 것이고 무고하게 옥살이를 하였다고 주장하여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너의 소명이 받아들여지고 고법에 재심을 요청하여 현재 재판 중이라면서?

이게 정말이라면 친구 너는 큰 일 날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니냐?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솔직하게 털어 놓자구나.

너는 너의 상부 조직으로부터 모종의 역할을 부여받고 정당에 들어왔다고 확신하는데, 그 역할이란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분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구나.

종헌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친 것 같구나. 아무리 우리 남한사회가 허술하고 반공의 틀이 느슨해져 있기로서니 친구 네가 이 나라 정당에 들어가 비례대표 18번까지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

친구야! 이 나라 대한민국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그 무지막지하고 잔인한, 그것도 20여 일에 걸쳐 벌거벗긴 채로 행해진 고문과 고통, 나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나의 가족을 거지로 만든 기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나는 이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친구, 네가 북한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듯이 나 또한 내 조국인 남한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평양에 계시는 너의 지존과 너를 파견한 상부조직에게 이 말 한마디는 꼭 전해주기 바란다.

정말로 북의 주체사상 체제가 남한을 지배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의 질과 조건을 더 향상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자고.
그러나 이미 너희 정치체제는 이 지구상에서 지탄을 받고 있고 때로는 조롱거리가 되어 있지 않느냐? 도대체 그 체제에 무슨 희망이 있다는 말이냐? 어디 그뿐이냐?

우리는 북쪽을 한 민족, 동포로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도와왔던 것이 지난 남북관계였다. 어떤 때는 주체성 있는 나라답지 않게 자존심이고 체면이고를 찾아 볼 수 없는, 정말로 지켜보고 있는 나조차도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구걸인지 협박인지 모를 발언을 서슴지 않는 북쪽의 지도자들의 言行(언행)에 절망감까지 느꼈다. 특히 시간만 나면, 어린 애들 교육에도 지장이 있을 욕지거리도 문제지만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더냐?


나는 알고 있다. 친구 네가 속해 있고 충성하고 있는 사회인 인민공화국의 체제가 얼마나 무서운 결속력과 단호한 행동력을 갖고 있는지를 말일세. 연평도 포격, 천안함 격침, 동해 잠수함 침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할 걸세.

천안함 격침 사건만 두고도 그렇다네. 시퍼런 우리 자식들 40여 명이 水葬(수장)되었는데도 이 땅의 난다 긴다는 지식인 집단은 미국의 잠수함이 다른 정치적 목적 하에 저지른 소행인 양 떠들어 대고 있다네. 국민의 30%가 정부의 발표를 안 믿고 있는 것이 남한 사회의 현실이네.


김일성 주석에게 충성 맹세서를 평양에 전달한 모 지하조직 사건에 관련된 분은 현재 남한의 집권당 거물급 정치인으로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천방지축 날뛰고 있네. 그 밑에는 대검찰청 공안부장까지 했던 자가 가방 들고 따라다니고 있는 꼴을 자네도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종헌이, 이것이 자유 대한의 되어가는 꼴이라네. 자네 지존께서 내려와 국회의원 시켜주겠다면 선착순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들 무리가 이 땅의 글 배운 놈들이라네. 어디 그뿐인가, 군대에 가보면 나약해 빠진 젊은이들뿐이라네. 어쩌다가 힘든 기합이라도 행해질라 치면 자기 집으로 전화하게 되고 밖으로부터의 항의 전화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도 힘든 것이 우리 현실이네.

오죽했으면 “신병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겠는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네들이 행한 천안함 폭침 직후 우리 대통령께서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의 기자 회견을 하였고, 이것을 본 군인들이 집으로 전화하며 “엄마, 전쟁 나면 우리 다 죽게 돼” 라고 매달리는 통에 한나라당에서 일하는 부모들까지 표는 야당에 던지게 되었다네. 그 결과, 지자체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를 당하는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하였네, 이것이 내 조국의 실상이고 보니, 실은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네,

 

어이 종헌아! 조금 긴 이야기가 되고 말았구나. 아무리 나의 조국 남한 사회가 이처럼 허술하기로서니 너까지 통합진보당에 들어가 국회의원까지 할 생각이라니 참으로 가당치 않게 보이는구나. 너의 간첩단 사건을 재심까지 신청하여 현재 고법에서 그 사건이 심리 중이라는 데는 더 이상 무슨 말인들 서로 통하겠느냐?

 

다시 한번 말하건대, 모든 것을 이쯤에서 접고 돌아가기 바란다. 그리고 너의 지존이 되는 분께 더 이상 남한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고 함께 살아보자는 이 말을 전해주게나. 자네나 나나 인생 살 만큼 살았으니 괜찮겠지만 저 길거리에 뛰어 다니는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불바다라는 말이 가당하기나 한가.

 

만약 자네의 뜻대로 남한에 머물면서 계속 자네의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 같으면 나는 내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겠네. 그리고 내 발로 걸어서 자네 고법 재판의 증인으로 나갈 셈이네. 나의 친구가 공산주의자, 그것도 평양에서 제대로 밀봉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던 핵심 분자라는 것을 나는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다만, 서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기에 참을 수 없을 뿐이네.


종헌아, 더 이상 나의 조국을 얕보고 능욕하지 말게나. 이 점이 바로 불쾌하다네.

친구 종헌아! 여전히 널 사랑한다. 앞으로도 너에게서 배운 ‘해바라기’라는 노래를 불러 보면서 너를 그리워 할 거야. 이제 분단 조국을 둔 죄로 정신의 친구, 지옥에서 만나 서로 의지하고 정을 나눈 마음속에서 못 잊을 친구인 너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이야기까지 하게 된 점 용서해 주기 바라네. 자네를 공항에서 손을 흔들면서 돌려보내는 심정으로 이 글을 맺겠다.

 

지금 너의 신분이 아닌, 참으로 자유스러운 처지의 친구이자 민족의 구성원으로 남한을 너희 가족과 함께 방문하고 나의 집에서 먹고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면 이게 헛된 기대의 개꿈에 지나지 않을까?

 

끝으로 나는 자네가 속한 조직의 힘을 알고도 남은 사람일세. 어떤 보복도 달게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네.

그리고 옥중에서 자네에게 들은 이야기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네. 그것이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내가 할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네.  보고 싶다 종헌아! 그립구나 나의 친구 종헌아! 깊은 산골에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실컷 울고 소리치고 싶다 종헌아. 더럽고 무상한 것이 인생일진대, 살아 숨 쉬는 날까지 부디 건강 하거라.

2012년 5월14일 金鉉獎(김현장)  연락처: 010-3602-9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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