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에서 되살아나는 박헌영의 예언
written by. 유명덕 - KONAS
(박헌영 1900년생) 박헌영과 여운형(1886년생)
사진의 아기 박헌영의 아들 1941년생 원경스님 박병삼은 2019.6월 현재 평택소재 만기사 주지승으로 있으며 철저하게 의식화된 두뇌가 명석한 좌파승려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 한국의 근현대사를 종북 좌편향으로 왜곡. 박병삼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맹활약한 현 서울시장 박원순. 그 외 한홍구, 이학영 등이 역사문제연구소 중고교검인정교과서집필진이 되면서 역사교과서가 종북 좌편향됨. 그래서 박근혜대통령이 국정 교과서를 새로 만든 것. 역사문제 연구소의 이학영은 이후 종북 좌파공작금을 마련하려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에 강도짓을 함. 뒤늦게 꼬리가 잡혀 옥살이, 이것이 남민전사건! 이학영이의 뒷바라지를 하고 출소 후에 선거자금을 지원, 국회의원이 되게 한 문재인이 노무현집권직후 남민전사건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을 뒤집음. 배상금으로 이학영 수십억챙김.
남한에서 ‘북한을 자극하면 전쟁이 일어난다’며 선동하는 친북세력들은 박헌영 예언의 실천가들이다.
2010년 9월 28일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해 점령된 서울이 수복 된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긴급히 철수하고, 10월 1일에는 국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점으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었다. 이즈음 10월 18일 김일성의 전쟁지휘본부인 평양의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에서는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북한의 1인자 김일성과 2인자 박헌영 간에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헌영은 "즉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한다"고 맞섰다.
그 후 얼마 안가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낙동강까지 진격하여 부산만 밀어 붙이면 그토록 원했던 공산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장담했던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이제는 오히려 함경도지역만 뺏기면 꼼짝없이 만주벌판으로 도망쳐야 하는 위급한 처지가 되었다. 이즈음 1950년 11월 7일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었던 임시 소련대사관에서는 다시 두 사람 간에 살기등등한 고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20만 명의 남로당 빨치산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냐?” 이에 박헌영은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다 내려 보냈나? "하며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느닷없이 책상위에 있던 잉크병을 박헌영에 던지며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 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하며 핏발을 세우며 악을 써 댔다.
김일성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박헌영이다.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신봉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공부했던 박헌영은 김일성을 도와 공산정권을 수립했고, 6.25 전후에는 부수상, 외무상,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김일성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북한지역 출신이 아닌 충청남도 예산 사람이다. 지주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출생성분 때문에 갖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공산주의는 이런 성장배경을 가진 박헌영의 눈에 확 들어오는 환상적인 이데올로기였다. 박헌영은 서울의 경성고보 시절에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경찰의 추적을 받자 상해임시정부로 들어가 독립운동에 잠시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소련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1929년부터 3년 동안 모스크바 레닌대학에서 혁명가양성코스를 이수했다. 그 후 박헌영은 서울에 고려공산당총국을 설치하기 위해 국내에 침투하여 활동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어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고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족주의민주전선' 등을 형성하여 이끌면서 그가 이상으로 삼던 소련을 분신으로 한 공산주의국가를 남한에서 건설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군정으로부터 박헌영이 주도하는 단체가 불법으로 판정되고 우익세력으로부터도 배척당하자 1948년 초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남조선로동당(이하 남로당으로 약칭) 간부들을 이끌고 월북하였다. 이때부터 박헌영은 김일성과 손을 잡게 되었고 1948년 9월 김일성이 주도하는 공산정권에서는 부수상 및 외무상이라는 2인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더불어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승인받는 등의 활약으로 나름대로 입지를 굳혀 나갔다.
특히 박헌영은 자신이 광복 이전부터 월북하기 직전까지 일구어 놓았던 남로당 조직들을 통해 전국적인 파업과 폭동, 그리고 군대에서의 반란사건을 일으켜 남한 내에서 공산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험해 본 적이 있으므로 이미 남침성공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에게 만약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한다면 남로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합세할 것이라고 호언하였으며, 남침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당(?)·정(政) 간부와 북한군 주요지휘관 연석회의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들고 일어나 인민군을 환영하고 진격의 길을 열어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 쳤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당시 남한사회의 혼란상을 보고 어쩌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3년간의 긴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김일성이 얻은 것은 폐허와 상처뿐이었다. 김일성은 1954년 12월 23일 조선인민군 군·정 간부들을 모아놓고 박헌영을 정조준하며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는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 남조선에 당원이 20만 명은 고사하고 1000명이라도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을 했더라면 미국 놈들이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남반부의 군중적 기초가 튼튼하고 혁명세력이 강했더라면 미국 놈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면서 박헌영을 숙청하기 위한 포문을 열었다.
결국 김일성은 1955년 12월 5일 박헌영을 미제 앞잡이, 반당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음모 등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재판에 회부하여 즉결 처형하였다. 최후 발언에서 박헌영은 “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그러나 남로당 간부들은 조국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 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죄 없는 남로당 간부들은 보호해 달라. 거듭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남한 민중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단독으로 공산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월북하여 김일성의 대남침략을 돕는 하수인으로 자처하며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고무되어 20만 명 봉기설을 주장함으로써 김일성의 오판에 한몫을 단단히 했던 박헌영의 종말은 이렇게 김일성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박헌영 20만 봉기설의 근거
그렇다면 박헌영은 어떤 근거로 20만 명의 남로당원 봉기설을 주장하였을까? 그 것은 박헌영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남로당세력들이 아직도 남한에서 건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세력들은 이승만정부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는 있지만 북한이 남침을 개시할 경우 호응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한다면 남한정부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박헌영의 이러한 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5년 광복이후부터 박헌영이 월북한 1948년까지 그가 저지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을 잠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일제 당시부터 사회주의를 가장한 공산주의 활동이 감시 하에서도 꾸준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박헌영은 그 중심인물이었다. 광복이 되자 남한지역에서는 여운형을 비롯한 사회주의 인사들이 주도가 되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으로 약칭)'를 결성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으로 약칭)'수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전국 140개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얼마 후 이 조직의 실세가 바로 박헌영이었다. 그러나 9월에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시작되었고 맥아더 포고령 제1호에 따라 국내 치안과 행정을 맡았던 '건준'과 '인공'은 불법조직으로 간주되었다. 이때부터 박헌영은 미군정을 몰아내고 자주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폭력투쟁을 생각하게 되었고 급기야 전국 인민위원회에 총파업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1946년 10월 1일에 일어난 대구폭동사건은 박헌영의 첫 작품이었다. 남로당의 총파업지시를 받은 대구시 인민위원회는 폭동을 주도했고, 급기야 이들을 막고 있던 경찰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자 대구는 순식간에 폭력의 현장으로 변해버렸다. 미군정에서는 급기야 계엄령을 선포하여 경찰을 앞세워 질서를 회복했지만 이 폭동은 경상북도만 해도 22개 군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다시 경남 11개 군, 충남 7개 군, 충북 2개시·군, 서울·경기도·황해도 전역, 강원도 4개 군, 전남 21개 군, 전북 2개 군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대구폭동사건이 발생한 이후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다시 무장폭력이 발생하였는데 이것 역시 박헌영이 만든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사건은 남한에서의 단독정부수립 반대를 위해 남로당 제주도당에 의해 주도되었다. 제주 4·3사건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렇게 폭동이 장기화 될 수 있었던 것은 “곧 인민군이 쳐 내려와 제주도를 해방시킬 것이다”는 남로당원의 선전선동에 선량한 주민들이 현혹되었고,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진압군을 쉽게 파병하지 못한 원인도 있었다.
그러나 대구와 제주도에서 좌익세력활동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폭력은 바로 군대에서의 반란이었고 그 중심은 무장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있었던 14연대 소속 좌익 간부들이었다. 당시 군에는 상당수의 좌익 세력들이 침투했고 이들은 점조직으로 그 세를 점차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제주도에 파견되는 1대대 군장검사를 마치고 읍내에 나가 대대 장교들과 함께 환송회에 참가한 후 영내외 숙소에 돌아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시점을 이용하여 반란주동자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부대 전화선을 절단하고 탄약고를 탈취하게 한 다음 연병장에 사병을 모아 놓고 "경찰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고 있다. 최대한 실탄을 나눠 갖고 응전태세를 갖추자. 동족을 살상하기 위해 제주도에 파병하는 것에는 절대 반대한다.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인민해방군이 된다. 조국통일을 위해 미국과 괴뢰를 쳐부수자.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들도 모두 죽이자"라며 선동했다.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를 필두로 한 남로당계 반란군은 곧장 지역의 좌익세력과 학생들을 선동하여 경찰서 등의 관공서를 무력화시키고 이어 순천까지 진격하였으나 토벌대의 진압작전으로 대부분이 지리산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비록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이 사건은 정부탄생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생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놀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좌익성향의 군인들을 색출하는 이른바 숙군(肅軍)을 단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1948년 까지 약 4년 동안 조직기반을 구축하고 공산주의를 의식화하며, 이들 세력이 주동이 되어 전국차원의 무장봉기를 폈던 좌익세력은 감시강화로 인해 활동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적어도 6·25 남침전쟁이 있기 전 까지 지리산 등 산속에서 유격전을 벌이거나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전세가 유리해질 경우 언제라도 공세로 전환하여 북한군을 지원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장한 측면도 있지만 당시 남한사회에 활동했던 남로당의 점재적인 파워는 박헌영으로 하여금 20만 명 봉기설을 확신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남한에서 박헌영의 예언을 실현하려는 세력들
박헌영이 김일성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 된지 55년이 지났다. 한때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꿈꾸었고, 그 꿈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자 공산주의 전략전술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수많은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남한사회를 피로 물들게 했다. 만약 이 땅에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북한에서는 김일성 공산정권이, 남한에서는 박헌영 공산정권이 각각 들어섰을 것이고, 두 정권이 통합되었더라도 한반도는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로 남아 오늘날 의 북한처럼 불행한 동토의 왕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이 당대에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60년 전에 그가 예언했던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라는 예언은 여전히 대한민국에 유효하며 그 파워 또한 점점 커지고 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이 "20만 명의 좌익세력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하며 박헌영을 추궁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오히려 그 몇 십 배의 친북좌경세력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살면서도 상황에 따라 여러 색채로 변신하면서 갖가지 언행과 술책으로 이적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북한은 민족·민주주의·반전·통일을 추구하는 진정한 평화세력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는 반민족적, 반통일적, 반 평화적인 대상으로 매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기억하기도 싫은 천안함 폭침사태 이후 나타난 친북좌경세력의 행위는 국가안보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고 있다. 과연 누가 이와 같은 엄청난 위험을 초래하며, 박헌영이 제시한 예언을 현실화하고 있는가?
그것은 먼저 국가관과 안보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북한을 자극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는 병약하고 굴종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사가 북한에 정조준 되고 있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발표를 불신하면서 갖가지 억측을 내세워 국민의 판단을 그르치게 함으로써 정부와 국민 간에 불신을 촉발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대한민국국회 역시 유엔과 세계 80개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동안 그 흔한 대북규탄결의안 하나도 내지 못하다가 사건 발생 89일이 지나서야 그것도 여당의 벼락치기로 겨우 통과 시켜 세계로부터 이상한 국회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것은 국군과 함께 안보를 공동적으로 책임져야 할 국민의 대표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비겁의 극치이며 직무유기로서 결국 박헌영의 예언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친북좌경 성향의 시민단체들 역시 같은 부류에 속한다. 진보를 앞세운 이들 역시 박헌영 예언의 실현을 긍정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친북성향의 진보단체들은 천안함 공격의 범인이 북한이 아니기를 내심 바라면서 오히려 미군의 격침설·좌초설·기뢰에 의한 폭파설 등 아군이 일으킨 문제로 여기고 싶었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에 대해 갖가지 의혹을 제기하고, 심지어 정부의 발표가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유엔에 보내 대북제재에 대한 국제공조를 이루려는 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러한 행위 역시 제 나라의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배신의 극치이다. 이들의 비상식적이고 불법적인 활동은 국민들로 하여금 사태에 대한 진실과 분별력을 잃게 하고 정부를 불신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국가안보의 역량을 현저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또한 친북성향의 종교인도 마찬가지이다. 북한공산체제는 무신론에 바탕을 두고 있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친북성향의 종교인들은 북한이 만든 가짜 종교시설과 종교인들을 보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북한의 땅에 신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상생의 은총이 있도록 진실하게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나라를 이끌고 지켜나가는 정부와 국군을 반통일, 반민족적인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기막힌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북한에서 지하교인 3명을 처형했다고 알려진 북한에 몰래 들어간 한 종교인은 "천안함 사태의 원흉은 이명박 대통령이다"라고 강변하면서도 김일성 동상 앞에서는 무척 감격스러워 했다. 이것은 종교인의 기본적인 사명을 망각한 것이며 문제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고 불의를 선택한 친북좌파의 아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부류가 있다. 그것은 친북좌파 성향의 역사관과 안보관에서 헤어나지 못한 교사들에 의해 어린 학생들의 의식이 멍들고 있다는 점 이다. 이는 여순 반란사건 당시 박헌영이 이끌고 있었던 여순 인민위원회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선동하여 무려 1천명이 무기를 들고 국군과 경찰에 대항했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판단력이 부족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을 의식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친북좌파적 교사에 의해 의식화된 학생들은 나라가 왜 중요하고,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무엇이며, 그 의무와 책임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역사발전과 미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9·28 서울수복을 다시 맞이하면서 우리는 적에 의해 대한민국 심장인 수도 서울이 다시는 점령되지 않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도 60년 전처럼 북한이 전쟁을 다시 일으켜 공격해 온다고 가정할 때, 그동안 북한의 심리전에 의해서 또는 자생적으로 친북좌파 활동을 함으로써 자의든 타의든 북한의 대남적화사업에 기여해 온 사람들의 마음과 몸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급선무는 국민의 안보의식이 잘못되어 자중지란으로 무너지기 전에 60년 전 박헌영이 호언했던 20만 명 봉기의 가능성을 이 땅에서 완전하게 종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이 55년 전에 '남한에서 혁명의식이 투철한 군중적 기초가 튼튼해야만 한반도 적화통일이 가능하다' 고 한 김일성의 말이 아직도 이 땅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그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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