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강단

2023.01.01. 주일예배<창25:19-23.언약의 열매, 현실>

by 설렘심목 2025. 8. 1.

2023.01.01. 주일예배<25:19-23.언약의 열매, 현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뤄지는 현실입니다. 21절입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 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알려진 것처럼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불신앙의 증거요,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얻은 육신의 아들입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은 이미 약속처럼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자손의 첫아들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이토록 미약합니다. 대를 이은 심한 가난으로 늙어 결혼해 100세에 낳은 이삭도 40에 결혼했는데 또 임신이 안 됩니다. 리브가에게 자녀가 안 생겨 이삭이 기도로 태어난 게 에서와 야곱입니다. 한편 약속에서 벗어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오히려 열두 아들이 열두 방백의 조상이 돼 야곱보다 앞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에게 뭘 의미합니까?

 

1. 허약해 보이는 약속의 출발입니다.

 

언약의 시작은 그렇게 미약했으나 그 끝은 매우 크고 풍성한(8:7) 성취로 언제나 약속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스스로 증명합니다. 3:28~29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가 예수믿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녀가 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서 약속의 자녀가 첫 시작을 어떻게 합니까? 이삭은 자녀가 없어 기도했는데 응답으로 얻은 자녀가 태 안에서부터 벌써 다투기 시작합니다. 부모의 행복은 자녀의 화목과 번성에 있습니다. 두 형제가 서로 싸워대면 그건 부모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위대한 하나님께서 하신 큰 민족의 시작이 이렇게 매끄럽지 않다는 걸 성경이 말합니다. 여기 저와 여러분을 향한 위로의 음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현재가 절망적입니까? 참으로 변변치 못해 누굴 만나는 게 두렵습니까? 하나님을 먼저 만나세요. 말씀 안에서 분명한 약속을 붙잡기 바랍니다.

약속의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가문이 창대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십니다. 비참한 마음으로 올린 기도가 큰 복의 문이 되었지만 그렇게 간신히 얻은 쌍둥이가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으니 싹이 노랗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삭의 후손은 약속대로 수많은 민족이 되어 약속을 바라보는 언약백성의 씨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 복의 근원이 되는 다윗의 가문을 이어갑니다.

 

이번엔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국민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로마서 9장에선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9: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어떠함이나 자격과 무관합니다.

 

2. 자격없이 거저받은 구원입니다.

 

9:15-16절을 제가 읽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요,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뜻으로 우리를 불러주셔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거저받은 구원이 감사해서 말씀에 순종하기를 결단하고 충성된 자로 살기를 노력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소원하고 노력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우리들의 소원과 노력은 거저 받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당연한 반응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의 지적처럼 에서나 야곱이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야곱이 택해졌고 에서는 동생의 나라를 섬기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서가 불평할 아무 이유가 없는 건 그게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9:19-23절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피조물의 항변이 의미가 없다는 선언적 기록이 있습니다. 그건 질그릇을 만드는 자가 큰 그릇과 작은 그릇과 비싼 그릇과 허드레 그릇을 만드실 권한이 있다는 말로 하나님의 주권 앞에 모든 이견을 물리칩니다. 감히 피조물이 어찌 꾸짖듯이 질문(詰問)할 수 있는가? 피조물은 그저 자신의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그뿐입니다.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충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 받은 구원에 다만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송으로 주를 높이기 원합니다.

우리는 다 야곱같이 아무 자격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물은 다만 기뻐하라고 주는 겁니다. 우린 선물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기뻐하며 감사해서 남은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다 드려도 시원챦은 큰 은혜를 받은 우리입니다.

 

본문 25-26,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 이삭이 60세였더라.” 에서는 나면서 털보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을 붙잡고 나왔습니다. 이 두 마디는 쌍둥이 형제의 성정을 말합니다. 27절에 에서를 들사람이라고 해 그의 야성적인 면을 말한데 비해 야곱은 엄마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로 소개합니다. 거듭 말해도 이웃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에서이지 야곱이 아닙니다. 꾀돌이 야곱, 중요한 건 하나님의 선택기준이 사람과 다르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기서 우린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언제나 약자 편에 서시는 우리 하나님 앞에 에서는 늘 자신만만한 사나이였고 야곱은 엄마가 없으면 허전하고 불안하고 혼자서는 뭐든 자신 없는 유약하고 눈치만 빠른 아이였습니다.

늠름치 않아도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 설 수 없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생 필요한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반면 야무져서 스스로 해낼 수 있다며 아무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급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겸손을 붙잡기 바랍니다. 낮은 자의 주님이 자칭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고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비록 엄마 치마끈을 놓지 못하는 겁많은 아이였지만 그런 겁보에게 위대한 하나님의 유업권은 이어집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앞이 안 보인다면 그는 복됩니다. 반면 뭐든지 자신만만해 무능한 사람을 보면 한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실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 주님 이름으로 권합니다. 끝내 낮아지기 축복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주여, 저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이 제게 있습니다. 주님없인 잠시도 버틸 수 없는 인생입니다. 오직 불쌍히 여기소서.” 아뢰는 순간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즉시 찾아주셔서 들어오십니다. 그 하나님과 사귀어 살면 여러분의 인생은 좋은 곳을 향해 출발합니다. 100 평생에서 영원으로 옮겨갑니다.

옹색한 죄악의 세계에서 광활하고 끝이 없는 공평과 풍성과 기쁨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건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될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손아래 놓인다는 건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거듭남의 경험이 또렷하지 않으신 분은 오늘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겁니다. 이미 구원의 확신이 있고 성령의 체험이 있는 분들은 다시 하나님과 깊은 교통으로 영혼의 새 힘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대로 될지어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