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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2.12.10. 주일예배<민3:44-51. 맏이를 대신한 레위인 2/2 (봉헌예물)>

by 설렘심목 2025. 8. 1.

2022.12.10. 주일예배<3:44-51. 맏이를 대신한 레위인 2/2 (봉헌예물)>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나올 때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사망사건에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는 물론 그 가축의 첫물도 보존됐습니다. 그렇게 유월절 사건 이후 모든 이스라엘의 맏물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나님의 소유임을 선언하셨고 여기서 대신 갚는 대속(代贖)의 원리에 따라 모든 첫 생명을 하나님의 소유로 돌렸는데 이스라엘 장자의 숫자 대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레위의 수효가 273명이나 부족합니다. 이 부족한 레위의 수 1인당 5세겔씩 속전을 드리라는 게 본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45절부터 1절씩 함께 살핍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장자는 하나님 소유인데 그 장자를 바쳐서 제사의 일을 전담케 하는 대신 레위인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인은 모든 장자 대신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라고 이미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레위가 바쳐졌다는 걸 구체적으로 봅니다. 한 가문의 장자를 대신해 레위 한 사람이 하나님 성전에 바쳐져서 성막 일을 평생 하게 합니다. 그 레위인은 가축이나 농토가 없고 성막봉사가 주된 업무입니다. 성막이 옮기는 일과 머물 때 성막을 치고 제사업무를 돌봅니다. 이러한 레위인 한 사람은 곧 한 가문의 장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가문과 가정들은 다 한 사람의 레위인을 장자처럼 섬기야 합니다. 이는 레위인의 생계를 보장함으로 각 가정의 제사 헌신을 온전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통 한 가문의 장자를 포함해 다른 형제들의 수를 합산하면 오늘날의 십일조를 비롯한 우리들의 통상적인 헌금생활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다만 형제들이 많으면 장자 한 사람을 보전하는데 부담이 좀 가벼울 거고 형제가 적은 가정은 부담이 좀 더 늘어나는 정도입니다.

이게 훗날에 성전세로 바뀌어 헌금과 각 예물은 일상화된 현실적 신앙고백으로 옮겨갑니다.

이를 신약에선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일러주는 말씀으로 십일조를 비롯한 봉헌이 신앙에서 중요한 자리임을 주께서 친히 밝히셨습니다. 잘 아시는 고린도후서 8장엔 마케도냐교회의 복된 일을 소개됩니다. “그들은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헌금을 했도다. 내가 증언하는데 그들이 힘에 부치도록 자원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이상으로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헌신했도다.” 무슨 일입니까?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함께 계시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음 47절인데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성전세를 드리고 속전은 따로 정했습니다.

 

47한사람에 5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대로 받으라.” 1세겔이 노동자 4일 품값인데 20일분의 임금 정도를 드림으로 유월절의 감동을 잊지 않고 기념하라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 외에도 봉헌물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액수보다 중요한 건 봉헌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의 헌금생활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물이 어느 헌신보다 소홀치 않은 건 장자의 생명을 담보로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430년 애굽노예로부터의 해방은 장자의 죽음을 마지막 재앙으로 하신 하나님의 구원방법이었습니다. 그 구원의 유월절에서 장자를 보호받은 모든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레위인과 그 속전이 모든 예물의 기본입니다. 즉 죄와 사망이라는 애굽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이미 우리는 우리 삶의 장자권을 레위인에게 의탁한 겁니다. 장자권은 제사권, 곧 예배를 주관하며 위하여 평생 헌신하는 걸 말합니다. 성도 모두가 전임 사역을 하기 위해 신학을 하기 어려우니 레위, 즉 우리의 장자권, 예배 인도권을 택하신 일정 사역자들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레위가 생활을 유지하게 장자속전을 드린다는 겁니다. 예배는 감사, 회개, 죄용서와 그 반응인 찬양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생명의 예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레위인이 집례하던 제사는 이미 골고다의 어린양 보혈의 제사로 완성됐습니다. 그 골고다의 십자가 어린 양의 제사가 우리의 사망을 끊어내고 허락된 영생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된 건 오늘날 예배라는 은혜로운 절차로 구약의 제사를 대체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심으로 드리는 헌금생활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속전의 마땅한 상징을 기쁨으로 기념하는 겁니다. 즉 우리의 모든 예물은 죽을 자를 살려주신 생명의 속전을 드리는 건데 이는 생명의 값을 현금으로 치르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를 따르는 겁니다.

 

49절입니다.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레위인과 대제사장은 적어도 나라와 온 백성들의 흥망성쇠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으로 지켜가야 하는 중요한 영적 일군으로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속전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성직자는 세금을 물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형평성을 따지니 이단이나 불교나 모두 종교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문체부에 일정 요건을 갖춰 종교단체 신고만 하면 세금을 면제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모든 율법에 따른 명령들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상당부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 의미는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신약의 말씀과 명령안에서 부드럽게 인격적으로 자율적으로 폭넓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오늘 레위인을 대신한 속전 5세겔이 약 200~300만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건 장자의 생명을 대신하되 은혜로 계산한 거저 받은 은혜의 상징일 뿐 진정한 장자의 가치는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새 생명의 값은 십자가에서 장자시며 흠과 티가 없는 대속제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계산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을 무엇으로 환산합니까?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대신 죽으신 그 피값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 어떤 거로도 대신할 수 없는 높은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선 값을 묻지 않고 중심을 원하십니다. 생명 살리신 값을 우리들의 중심으로 갚으라는 오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중심의 진정된 표현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시간과 중심과 물질인 줄 믿고 아멘입니다.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헌금을 한 고린도 교인들, 힘에 부치도록 드리고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원했던 저들의 헌신, 분명 일반 교회와는 달랐습니다. 뭐가 다를까? 보통 교회와 성도들이 환경과 싸울 때 저들은 자신을 어찌하면 더 예수께 드릴까 하는 헌신의 문제로 씨름하며 기도했습니다. 부활과 승천과 제자들의 순교를 본 선대들이 늙고 죽어가는 시점입니다. 생생한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직 피 냄새도 생생했던 시절,

이젠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돌아봐야 합니다. 믿음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잘 살기 위해 우린 목표와 용어부터 바로 정리해야 합니다. 잘 사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자로 사는 게 잘사는 게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게 잘사는 겁니다.

다음 유능해야 잘살게 됩니다. 못사는 건 가난한 게 아니라 바르지 못하고 능력이 없는 겁니다.

하나씩 정리해 봅니다.

못사는 건 가난한 걸 말하지 않는다. ? 가난은 바르지 않을 때 결과로 나타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바르지 않다는 건 성경의 기르침과 멀리 떠나서 생각하고 행동해서 그게 일상이 됐다는 걸 말하는데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자 해도 실제 행동은 세상을 따라 하고 싶은 거 다 합니다. 바르지 않습니다. 바르지 않은 건 옳지 않은 거고 옳지 않으면 잘하는 일, 즉 잘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양심과 물질관 둘을 다 말합니다.

다음엔 무능입니다. 이건 학력이나 배경이나 스펙이나 재산이나 영리한 걸 말하지 않습니다.

능력, 할 수 있는 힘을 일컫는 말입니다.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오늘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헤미아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수만 생각하면 가슴이 지르르 녹아 흐르는 이게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동과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이제 분명 승리하고 그걸 간증하게 될 겁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그걸 지키지 않을 때 가장 치명적인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뭡니까?

마음으로는 원이로되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너 계명성이여,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생각하라.’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고 분석해도 뼈저린 U턴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겁니다. 나는 폐습에 젖어 뒤집기 힘드나 주님께 의뢰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믿음으로 힘있게 나아가면 됩니다. 먼저 시간과 중심과 물질을 감동에 따라 성실히 하나님께 드리기 바랍니다.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열심히 드리게 했다는 말씀을 잊지 않기 축복합니다.

나 하나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나와 내 가정과 특별히 후손이 보장받는 이 일에,

앞다퉈 열심을 내시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그들은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헌금을 했도다. 내가 증언하건대 그들이 힘에 부치도록 간곡히 원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니 우리가 바라던 이상으로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헌신했도다.” 오늘 주신 생명의 양식으로 이제 예배 후는 예배 이전의 우리가 아니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