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 주일예배<사6:1-8. 하나님을 본 사람>
본문은 하나님께서 청년 이사야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르시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제사를 거창하게 드리는 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 알고 이런 일에는 힘을 썼지만 정작 그들은 매우 부도덕했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학대하고, 과부나 약자의 송사는 듣지 않고, 뇌물을 주고받으며, 사치풍조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부도덕을 꾸짖고 경고하며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앗수르라는 회초리를 사용하신다고 예언합니다. 아울러 앗수르도 회초리의 본분을 망각하고 포학한 죄에 빠진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 안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특히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당신의 성소로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신다고 역설했는데 그 예언은 끝까지 실현돼 이사야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머물며 이스라엘을 위로와 책망으로 사랑합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비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이사야는 경책과 아울러 장래 예루살렘의 회복과 메시아의 도래, 그리고 치유를 외치는 위로의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이름의 이사야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장면을 살피며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를 기뻐하는 사람의 이모저모를확인하며 함께 도전받고자 합니다. 누굴 사용하시는가? 첫째,
1.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바람직한 신앙발전은 보통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렘29:13절에선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전심으로 찾는 방법을 우리는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본문 1절을 제가 읽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는 웃시야왕의 유능한 정치로 살림살이가 제법 풍성해지자 늘 그러했듯이 왕과 백성들이 교만해져 서서히 하나님의 징계가 다가옴을 영적으로 직감합니다. 이사야는 종종 성전을 찾아 엎드렸고 그렇게 성전에 엎드렸다가 하늘 보좌를 본 겁니다. 분명 이사야는 천상의 하나님이 그 보좌에 앉으신 걸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도 엎드리면 간혹은 하나님의 옷자락이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런 신비나 환상은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건 모두 허락하시는데. 쉽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건 해롭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만나는 걸까?
1)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입니다.
왜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합니까? 사람도 자주 못 보면 점점 낯설게 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좋은 기계도 사용설명서를 따르지 않으면 고장이 나고 불편하거나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 성경이 내게 대한 설명”이라고(요5:39) 했습니다. 예수는 성도의 길이고 생명이며 진리십니다. 인생의 올바른 나침반이라는 겁니다. 험한 바다 헤쳐갈 때 나침반 없는 항해는 상상조차 힘듭니다.
이 시간 이사야서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우리가 지금 보는 중입니다.
2) 예배 중에 만나는 하나님입니다.
기도하는 젊은 이사야는 풍요가운데 점점 썩어가는 나라를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종종 성전에 가서 타락해 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엎드렸습니다. 기도 중 보인 건 기도의 제목인 유다 민족이 아니라 유다 민족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나라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성전에 가득한 자신의 옷자락을 보여주십니다. 아울러 천사 스랍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노래하며 주위에 둘러 있어 그 소리로 터가 흔들리며 집에 연기가 가득했다고 2,3,4절에서 이사야는 본대로 증거합니다. 그룹으로도 표현되는 천사 스랍은 미가엘이나 가브리엘과는 구별되는 천사인데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그리스도의 모습, 에스겔서의 하나님 모습,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본 하나님의 구름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놀라운 광경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사야처럼 예배 중에, 기도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찬송하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축복합니다. 중요한 건, 우리 안에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되어 늘 헤매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건 염려할 일이 아니라 엎드려야 할 일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은 우리가 그 죄를 스스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없는 자가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걸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구원받는 겁니다. 행13:48절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으로)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구원은 이미 하나님 손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은 믿음에서 나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즉 구원받기로 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이고, 즉 설교를 듣고 믿음을 갖게 돼 죄와 멸망에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결국 예배하는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 곧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사람마다 다른 건 흥미롭습니다. 입국허가를 받았는데 뭘 타고 어떤 길로 가느냐는 본인이 결정합니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물든 여러 관행과 악습으로 중환자실을 통해 하나님께 나옵니다. 형무소에서도 성령님을 체험합니다. 가족의 불행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사야처럼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거듭 선언합니다. 설교 듣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바랍니다. 5절입니다. “그때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는 순간, 그간 보지 못한 자신의 부정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로 결정된 사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보이는 일 두 번째
2.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자신입니다.
어떠한 모습입니까?
1) 죄 중에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자신도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부정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뵈면 현장에서 죽는 게 하나님의 법인데 이제 그 큰 사망의 화가 닥쳤다고 놀라며 두려워 떠는 이사야, 그렇죠. 지금도 죄는 영을 죽여 하나님을 못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죄 중에 보면 반드시 죽었던 구약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당시나 지금이나 죄와는 끝내 상종치 않는 하나님, 그래서 우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습니다. 그 이름으로 죄가 덮이고 의의 옷, 거룩함의 옷을 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보면 내가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나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며 택한 백성 중 귀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내가 보입니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 알면 적을 알게 되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봤습니다. 하나님을 본 뒤 입술이 부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자신을 발견한 자, 그 비참한 죄의 모습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사야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를 귀한 일에 사용하십니다. 본문 6~7절입니다. “그때 그 스랍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제단 성령의 불로 지진 입, 죄 중에 있던 입이 어떻게 됩니까? 악이 제하여졌고 죄가 사라집니다.
2) 하나님이 회복시키십니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으니 마땅히 죽을” 거라며 한탄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스랍을 보내 이사야의 절망을 회복시켜주십니다. 불붙은 제단 숯으로 죄와 악을 태워 용서하시는 장면은 오늘도 예배의 현장에서 계속 일어나는 치유의 현상,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부족과 불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입니다. 용기 중에 가장 위대한 용기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거며 진정한 실수는 실수를 감추려는 겁니다. 이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나라의 장래를 마음 아파하는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여전히 죄악 속에서 부정한 입술의 소유자임을 두려움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용서받습니다.
이 시간 선포되는 말씀의 숯불 그 뜨거움이 우리 심령과 입술을 지져서 온갖 악한 생각과 잘못 자리 잡은 고정관념, 의심과 표정까지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은 대로 됩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1.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그 하나님을 1) 성경 곧 설교에서 만나는 게 가장 바람직하며 2) 성전, 곧 교회 생활에서 만나는 게 좋습니다. 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2.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 자신은 1) 죄 속에 있는 모습이고 2)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는 겁니다.
끝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 자신을 발견한 자의 특성은 사명을 깨달아 주의 음성에 즉각 반응합니다.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음성을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제단 숯불로 회복된 이사야는 즉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죄가 씻겨지니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듣고는 뭐라 합니까? “그때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세 번째 주님이 쓰시는 사람은
3. 자원하는 심령을 받은 새사람입니다.
시 51:12입니다. “주님 베푸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구원의 감격으로 자원하는 심령을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자요, 자신을 발견한 자요, 음성을 듣고 사명을 본 자입니다. 사명을 깨달아 자원하는 자, 어떤 고난과 불행이 기다려도 그 길을 멈추지 못합니다.
주님이 여기 불러주신 저와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가장 효과적이며 힘찬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믿으면 믿은 대로 됩니다. 예배 중 예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려고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과 관계에 하나님이 주시는 각종 풍성함과 기쁨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자랑하며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모두에게 넘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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