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6. 주일예배<창21:8-19.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
아브람 75세에 대대로 살아온 고향 갈대아우르를 떠나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00세에 이삭이 태어납니다. 큰 민족을 약속한 10년이 지나자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의 생각으로 재해석하고 맙니다. 창16:2절에서 사래는 자신의 태가 말라붙은 걸 알고 자신의 몸종인 애급 여인 젊은 하갈을 남편에게 씨받이로 청합니다. 그래서 출생한 이스마엘이 15살 되던 해에 늙은 사라에게 태기가 있고 드디어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되 사람의 생각 안에서 해석되지 않는 일들을 종종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하나님이 사람들 생각 안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활동하신다는 걸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는 계획에는 이처럼 긴 기다림과 성장의 세월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첫 시험에서 실패해 이스라엘의 대적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교회와 온 세계의 골칫거리, 이슬람을 만들어 놨습니다.
이삭을 낳고 시간이 지나자 늙어 얻은 귀한 아들을 15살 많은 이복형 이스마엘이 괴롭힙니다.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 믿음으로 하지 않은 일은 근심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보기 드문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나 너무 오래 걸리자 약속을 오해합니다. 처음 몇 년은 잘 기다렸습니다. 10년이 지나도 응답이 없자 아브라함 부부는 언약의 내용을 달리 해석하게 됩니다. 그들 부부의 생각에 중요한 것은 씨였지 밭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과거, 동서고금 어디서든 주인마님에게 아기가 없으면 마님의 몸종이 씨를 받아 출산해 젖만 먹이고 젖 떼면 즉시 마님 품에 바치고 몇 푼 받아 멀리 떠나야 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하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은 하나님이 의도와는 다른 일을 만들어내 괴로움의 시작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일은 근심의 시작입니다.
늙은 아내는 오래전 태가 막혀 임신이 불가능해도 10년씩이나 기다린 걸 보면 아브라함 부부는 대단히 무던한 편입니다. 그러다가 태어난 이스마엘은 불신앙의 결과요, 불순종의 열매입니다. 이스마엘은 영문도 모르게 불신앙과 육신의 족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성경을 그대로 이루며 자자손손 악역을 맡아 이스라엘과 교회를 쏘는 화살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제외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결정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이 되어 돌아왔습니까?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이 종종 불행의 씨가 되는 건 그 결정에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제 이후로는 매사에 하나님께 묻고 결정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기도입니까? 성경에 기초한 기도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즉 약속 붙잡고 주님 뜻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성경 중심적인 기도의 용사들이 다되실 줄 믿습니다.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드디어 어린 이삭을 희롱하고 본처를 업신여기던 하갈모자가 쫓겨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16~18절,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 인간의 죄나 생각을 앞서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스마엘은 비록 불신의 열매로 약속을 못 기다려 육신을 따라 태어났어도 그 울부짖는 소리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으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일은 이스마엘의 구원이 그 울부짖음 때문이 아니라 아브람과의 약속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자 사라는 하갈 모자(母子)를 쫓아내라고 남편에게 강력히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이 일로 근심하자 하나님은 아내 사래의 말대로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허락하시며 뭐라고 하십니까? 13절입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미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일찍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고(창12:2)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이스마엘까지도 아브라함의 씨라는 이유로 번성케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고 신실합니다. 아브라함 부부의 미숙함, 하갈과 이스마엘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이스마엘을 배려하십니다. 인간의 죄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즉 인간의 죄가 아무리 무거워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 죄악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지켜진다는 말로 구원의 은총을 어떤 죄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용서하시되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구원하신 후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언약은 반드시 지켜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0절,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3. 이스마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얻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부족에도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근거해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걸 본문은 증명합니다.
우리가 보듯이 중근동 지방의 오랜 역사는 이삭과 이스마엘 후손들의 싸움이고 그건 다시 예수와 바알의 싸움처럼 인류가 있는 한 멈추지 않는 두 편의 싸움입니다. 중공 러시아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북한이 하나되고 미국과 NATO 등 유럽과 대한민국이 우방으로 하나인 세계의 패권 다툼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영적 전투를 세계사라는 큰 테두리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에덴에 설치된 선악과와 생명과에 이어 리브가의 뱃속에 에서와 야곱을 비롯해 현재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근본주의 무장단체 I.S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미 주께서 마13:24~30절에서 하신 말씀처럼 끝날까지 함께 갈 가라지와 알곡의 필연적인 동행입니다.
가라지의 동행에 불평 대신 가라지를 함께 데리고 가게 하신 뜻을 바로 알면 오히려 완전하신 주님 뜻에 적극동의하고 평생 일상에서 어떤 가라지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줄 압니다. 마13:25절에 가라지는 사람이 잘 때 원수들이 씨를 뿌렸고 마지막 추수 때 뽑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건 함부로 뽑다가 알곡까지 다칠까 염려해서라고 말씀합니다.
21절입니다.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 그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하갈은 며느리감을 자신의 고향인 애급에서 구합니다. 이로써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가라지가 됩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의 활쏘는 사람이고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 앞에 목을 내민 순종과 언약의 아들입니다. 그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장남 털보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에 헷족속의 여인 둘을 아내로 맞았고 야들야들한 마마보이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라헬과 레아 그리고 그 여종 둘 모두 네 명의 아내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줄기를 타고 12족속이 태어나며 신약에서 이를 상징이라도 하듯 열두제자에 의해 교회의 터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유약한 이삭과 야곱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터프가이 이스마엘과 에서는 제사장나라의 가시가 되어 끈질기게 택한 족속을 괴롭힙니다. 눈여겨 볼 구절은 “익숙한 사냥꾼 에서”와 “광야에서 활 쏘는 이스마엘”이고 그들의 어미 라헬과 하갈의 며느리 선택입니다. 저들은 믿는 가문과 불신가문에서 각각 며느리를 데려오는데 그 결과는 뻔합니다. 거칠게 살며 익숙한 활솜씨로 계속 교회를 전갈처럼 쏘는 악한 도구지만 하나님은 그들까지 계속 남겨 두셔서 궁극적 교회의 체질강화를 기대하십니다.
둘러보면 주변에 단체나 가문이나 어디에도 꼭 없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진상이 한둘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존재도 필요해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험한 사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삶에 탄력을 얻고 텐션을 조절하여 힘있게 하는 것 믿고 아멘입니다. 활어수송에 쏘가리를 두어 마리 넣고 알래스카 원주민의 자살을 어떻게 방지했는지 등의 이야기는 해묵은 이야기라 생략하는데 누구는 허리 아픈 덕에 평생 건강을 유지합니다.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언제나 인간이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그건 근심의 보따리가 되어 돌아온다고 일러주시니 감사합니다. 늘 주께 여쭙고 허락받아 결정한 일은 과정이 어떠해도 불평대신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의 실수에도 빈틈없이 지켜지는 약속을 믿습니다. 66권 약속을 굳게 믿고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 바른 성도되게 하시고 생각하기 전 기도하며 결정하기 전, 고민하기 전, 아파하기 전, 분노하기 전, 낙심하기 전, 포기하기 전에 기도하게 하소서. 약속은 지켜져도 인간의 게으름과 실수만큼 대가가 따를 때 한숨 대신 말끔히 결산하는 자의 기쁨이 채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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