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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2.10.09. 주일예배<고전3:9-15. 하나님의 집>

by 설렘심목 2025. 8. 1.

2022.10.09. 주일예배<고전3:9-15. 하나님의 집>

그리스의 왕 필립스는 철학자출신입니다. 그는 노예에게 당부하여 아침마다 냉수 한잔을 침소에 들고 와 큰 소리로 자신을 깨울 때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왕이시여, 왕께서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오늘도 잊지 마소서.” 로마시대 승전장군이 돌아올 때 노예를 시켜 뒤에서 Memento mori를 외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왔다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 아는 사실인데 까맣게 잊고 삽니다. 9:27절에는 이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데 그때가 언제인가? 그때를 본문은 그날로 기록하고 있고 구약성경에선 그날을 여호와의 날, 또는 심판의 날로 규정합니다. 그날을 잘 준비하는 오늘 말씀이 되길 축복합니다.

 

9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해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두 방향에서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대충 지을 순 없습니다. 튼튼하고 아름답게 지어야 합니다. 다음엔 하나님이 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들어와 계시고 하나님이 사신다면 우리는 더욱 아름답고 튼튼하게 집을 짓고 또 깨끗하고 청결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비전동에서 교회를 짓고 방을 하나 늘리기 위해 주차장을 없애고 그곳에 보일러 선을 깔고, 방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배밭 가운데 외진 데라 슬쩍 내달았는데 민원이 들어가 벌금 5백에 건축비 상당 금액을 날렸습니다. 법대로 바로 하지 않으면 낭패가 됩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준공검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기준을 가지고 검사를 하는가? 그건 얼마나 멋지게 지었냐는 외형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단단하고 실용적으로 지었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뭐에 관해 튼튼한 집인가? 성경 곳곳에 마지막 날 불시험을 예고합니다. 재료를 사용할 때 불에 강한 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은 두 부류의 재료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금은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 , 짚입니다. 속에서 불이 올라올 때 잘 견디는 자료, 무엇일까? 짚은 구하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집을 지을 때 쉽게 세울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금은보석은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 이런 재료들로 집을 세운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구하기 쉽고 짓기 쉽다고 나무, , 짚을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장은 편하고 쉽지만, 여기서나 심판 때나 결국 불에 다 타 없어져 수고와 땀과 노력이 결국 허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조심조심 공들인 전도대상자, 한순간에 다신 못 보게 되는 일 종종 있습니다.

비용을 힘겹게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집은 귀한 자재로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재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루터나 칼빈 등 개혁주의자들은, 전도자들에 의해 전파되고 가르쳐진 각종 교리들을 먼저 봅니다.

좋은 목자를 만나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세우려면 집을 세우기 위한 재료들 금, , 보석 등은 지속적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어진 바른 말씀입니다.

반면, 나무, 풀은 약하고, 흘러가는 세상 지혜와 잘못된 교리를 상징합니다. 불에 타서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신앙과 말씀의 재료를 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입에는 다나 배에서 쓴말씀, 여기에서 우리는 뭘 보게 됩니까? 지금 우리가 살며 겪는 아픔들, 건축자재를 바꾸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보통 딱딱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으로 집을 세우기보단 듣기 좋은 흥미 설교, 축복설교만을 원합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 희생하라는 참된 말씀에는 귀를 막는 대신, 들으면 재미있고 또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서 복 받아 풍족하게 살지 입맛에 맞는 설교를 골라 헤맵니다. 그러나 1~15절 말씀처럼 공적에 따른 상이 있고, 또 불에 타 사라질 집처럼 부끄러운 구원도 있습니다.

 

성경이 밝히듯 우리의 구원이 이렇다면 우린 바른 신앙의 교리에 의해 하나님의 집이 지어진다는 그 사실을 알고 저와 여러분, 안일한 신앙생활을 두려워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단단한 집을 짓기 위해 바른 교리체계를 정립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선악과의 그게 아니라 생명나무의 그겁니다. 헤아림, 계산이 아니라 친밀함을 뜻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그래서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외칩니다. 여기서 야다를 기억해내야 합니다. 부부가 한 침상을 사용하는 걸 말합니다. 바른 지식이 바른 신앙의 기초이고 바른 신앙이 바른 삶의 기초인데 하나님을 아는 바른 앎은 결국 우리 신앙의 견고함을 더하게 됩니다. ,,의가 확실한 균형을 잡으면 흔들리지 않는데 인간은 이 균형감각이 약합니다. 바른 교리 지식을 가슴으로 느끼는 정, 그리고 의지적인 신앙구현의 삼각대가 제자리를 단단히 지켜야 합니다. ()에 기울면 머리만 자란 가분수, 달변의 신학자는 될 수 있습니다. ()에 기울면 성경말씀보다 체험을 중시해서 서서히 신비에 묻히게 됩니다. 귀신 불러들이기 딱 좋은 영적 위험한 환경을 만든 겁니다. 끝으로 의()에 기울면 뭐든지 내가 나서서 고생해야 편하고 내가 희생해야 신앙생활하는 것 같고 내 이름을 위해 순교라도 결단하는 이 자기의는 주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우상입니다. 자기우상 만한 악한 우상도 드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지식 곧 진리는 삶과 동떨어져 머릿속에만 머문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흐르는 물처럼 내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묶어 삶에 묻어나게 됩니다. 귀로 들어 머리에 간직된 말씀이 가슴을 강타하여 그 감동의 진동파로 손발이 움직이지 않곤 견디지 못하는 그겁니다. 그렇게 내 삶 가운데 나타나는 진리의 선포, 그리스도의 향내, 그 앎, 야다는 관계를 통한 앎, 경험을 통한 앎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는 몸이 하나 되는 앎이요, 삶이 하나일 때 알게 되는 가슴 저미는 지식입니다. 주께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완벽한가로 준공검사를 끝내는 게 아니라, 그 바른 앎을 바탕으로 얼마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기뻐 활동하신 당신의 열매를 보십니다. 여기선 결과만 보는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이 계획하나 그 길을 지도하시는분을 봐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의 순결입니다.

필리핀에서 폭도들에게 폭행으로 만신창이가 된 현지봉사자를 아내로 맞이한 젊은 선교사님의 사연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지금도 목이 메입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 이런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진리를 지켜가는 삶에 대한 갈급함 그게 있는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과연 얼마나 간절한가?

종종 우리 교회는 이 간절함의 문제가 항상 신앙의 핵심문제라고 일러드립니다.

혈기가 변하여 간절함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크게 축복합니다. 아멘대로 될지어다.

 

성도 여러분, 다른 구원은 없나니 천하 어떤 사람에게도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외엔 내 신앙의 기초는 없다고 고백, 선포하고 하나님을 아는 일과 자신을 쳐 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여 그 위에 아름답고 튼튼한 진리의 보물로 자신을 잘 세워가 오늘 여기서 그리고 그날 거기서 칭찬받는 귀한 하나님의 집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