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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출14:21-31

by 설렘심목 2025. 8. 1.

2022.08.21.주일예배 <14:21-31.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10가지 재앙 중에도 마지막 장자의 죽음은 애급에게 치명였습니다. 제발 나가 달라며 은금 패물까지 주며 보내던 애급인들과 파라오, 그런데 막상 떠나보내고 보니 또 마음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이때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한다는 건 역사를 주장한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요셉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을 메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13:19) 이제 한숨돌리고 부지런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애굽군사들이 따라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약 200여 만이 떼를 지어 행진합니다. 짐작이 쉽게 않는 장면입니다. 100명 단위로 폭 50Cm에 앞뒤 1m간격으로 따라와도 200만이면 20km라는 거리와 폭 100m라는 엄청난 무리의 대장정입니다. 명령이나 주의사항 하나가 전달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인도 외에 설명이 불가한 거대한 장면입니다.

 

출애굽의 여정에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돌보심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출발하는 코스부터 다릅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그들과의 전쟁으로 행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할까 해 그리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홍해쪽 광야길로 인도하실 때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처럼 4계절 뚜렷하여 땅좋고 물좋아 복받은 나라는 전 세계몇 안됩니다. 출애급 현장 거긴 일교차가 심하고 그 많은 인원이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에 대해 대책이 없습니다. 한낮에는 보통 섭씨 40-50도 안팎에 쩔쩔 끓는 사막길입니다. 밤중에는 건조한 지방이라 복사냉각으로 10도 미만 심하면 0도까지 내려가기도 합니다.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우리가 한여름 35도 이상이면 숨이 막혀 열사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그런데 사막은 40도 이상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사막여행은 노중에서 잠자리 대책이 없다면 그건 곧 자살을 의미합니다. 또 낮에는 얼마나 뜨거운지 맨몸으로는 화상을 입는 온도입니다. 실제로 포크레인 장비 위에 달걀을 깨어 놓으면 즉시 반숙이 된다고 합니다. 거기 200만 인구의 이동에 먹을 것, 입을 것과 잠자리, 모세의 대책은 하나님의 보호였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란 말은 바로 이런 현장감각이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가 되는 절박한 대목입니다.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어주시는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깊은 지리기후의 이해가 필요한 내용입니다. 동일한 기도라도 얼마나 성경의 시대 공간적 배경과 문화정서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깊이를 갖게 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생명과 직결된 보호장치였습니다. 며칠이 아니라 자그마치 40년이었습니다. 낮의 구름은 그렇다 해도 밤에 불기둥은 얼마나 장관을 이뤘겠습니까? 또 얼마나 따듯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미래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보호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훈련을 통한 성숙과 인내를 통해 견고함과 고난을 겪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않는 바른 예배자의 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고난없이 바른 예배자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배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건 무엇보다 이집트의 파라오였습니다.

애급의 바로왕은 히브리 노예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갑자기 썰렁해진 현장에서 마음이 변합니다. 전차특수대 600(1200)와 다른 예하부대 전차병력을 다 동원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추격대장이 미리암의 사위 아메노피장군이라고 합니다. 멀리 전차부대의 진격으로 먼지가 뽀얗게 보입니다. 아무 무장도 없는 백성은 마치 범 앞에 토끼처럼 겁에 질렸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대책이 없으니 두렵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이집트에 우릴 묻을 땅이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나왔냐? 그래서 우리가 그냥 거기서 종살이하는 게 더 낫다고 하지 않았냐?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애굽 종살이가낫겠다는 겁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다신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입을 열어 패역한 불신의 말을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라는 겁니다.

불평은 완전무흠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19~20절입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가깝게 접근한 적군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더 이상 접근치 못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던 백성들이 얼마나 민망하고 죄송했는지를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러한 불평과 구원의 기적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계속하여 반복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천박한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들의 얕은 믿음을 결코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뙤약볕 아래 전 가족이 생존을 걸고 하나님만 바라보는데 생각보다 예민해 있다는 겁니다.

 

드디어 모세가 명령대로 바다를 향해 손을 올렸더니 밤새도록 바닷물이 물러가 길이 열립니다.

막혔다고 생각되면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서 손을 높이 들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바다처럼 막혔던 염려와 근심거리가 둘로 갈라져 훤한 길을 내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할 줄 압니다. 믿음의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곳에 역사는 시작됩니다. 영의 눈이 열립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거기 천군 천사와 하늘 곳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곳간이 있습니다.

 

긴 이스라엘의 행렬이 홍해를 건너자 곧이어 애굽 추격부대가 뒤따라 쏜살같이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로 따라 들어옵니다. 이들은 잠시 후 모두 빠져 죽는다는 걸 모릅니다. 모르면 용감합니다.

25절에 하나님이 전차 바퀴를 모두 벗겨버리시니 병사들이 심히 당황해 튀자. 여호와가 저들을 위하여 싸워 우릴 친다.” 28절 끝에 보면 바로의 군대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전멸입니다.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인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번엔 요20:29절을 찾아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봤기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하시니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본 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제자 도마, 토마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의 실체에 대한 우리들의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불평하며 애굽 떠난 걸 후회하던 백성들이 눈앞에서 애굽 군대가 몰살당하자 그제야 하나님과 그 종 모세를 믿습니다. 여기 큰일을 보았으므로라는 말은 조건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시면 믿고 안 주시면 믿지 않는 매우 얄팍하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믿음입니다. 물론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얼마나 속이 탑니까? 그러나 불평한다고 하나님께서 계획을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뒤에 바짝 따라붙은 애굽 추격대와 앞에는 바다를 두고 이제 하나님이 아니면 그대로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과연 우리라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건 지금까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밤낮으로 에워싸던 하나님인데 전차부대 앞에서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애굽 군대로 죽일 백성이라면 무슨 이유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지금까지 인도하신 걸까? 한 번 정도는 믿음으로 밀고 나갈 법도 한데 성경 어디서고 이스라엘백성이 그랬단 말이 없습니다. 이걸 아시고 광야 길 훈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째, 믿음의 손을 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잘못 구함이라고 지적합니다. 참마음으로 주님의 뜻 가운데서 구하는 것이라면 분명 채우신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손을 들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믿는 자의 특권 중 특권입니다. 불평하지 않고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이에게 속히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에 노예가 된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 키우시는 일,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주님은 여러분의 손을 꼭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가 힘들다는 건 주 앞에서 아직도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힘을 다하여 귀한 믿음을 소망한다면 모두 하나님의 복된 도구가 될 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약속에 근거하고 약속은 하나님의 생명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증거를 보여야 믿는 이스라엘이지만 지속해 키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미약하기 짝이 없는 훈련생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훗날 차지하게 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제사장된 백성으로서 경건의 삶을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의 교육과 훈련이 있더라도 훈련 후의 영광을 기억하며 성실하게 임하면 주님의 아름다운 때에 놀라운 것으로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변 사랑이신 주여! 오래전 불볕 사막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바다를 가르시며 전차바퀴를 벗기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변함없이 지키시니 그 감사를 어찌 입에 다 올리겠습니까? 더 많은 시간 더 깊이 예리하게 주 예수를 묵상하여 구원의 감격이 세상과 몸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