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주일예배<골1:2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한 번밖에 없는 귀중한 인생을 사람들은 나름대로 보람있고 가치있게 살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죽은 후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인생을 바로 알려주는 답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외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시공을 넘어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롬11:36에서 만물의 존재근원과 과정과 종착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가 그 앞에 서면 어떤 일이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히9: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아멘.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메시아로 믿고 인정(롬10:10)하는 자만이 종말에 심판을 면하고(요5:24)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귀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데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겁니다.(마16:24)
바울은 복음전도를 인하여 여러 번 옥에 갇힙니다. 본서는 1차 옥중에서 이단에 흔들리는 골로새교회를 바로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겁니다. 저들은 유대교 율법과 그리스의 신화와 초보적 영지주의에 복음을 꿰맞춰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 외에 어떤 거로도 설명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인생들을 해석하고 찔러 쪼개어(히4:12)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바울은 충실한 에바브라의 보고를 듣고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증거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김으로 우리가 져야 할 우리들의 십자가, 어떠한 십자가여야 합니까?
1.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성경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룬 것이라고 20절에서 일러줍니다. 그 피는 죄인구원의 완성을 이룬 완벽한 종지부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할 성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우리 안에 남겨진 그 고난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성도의 길, 그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마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실존을 믿으며 전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자세를 뜻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과 발길로 주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는 그러한 능력이 이미 죄악으로 떠난 지 오래며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 그리스도의 임재와 동행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죄인인 백성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화목을 이루니 죄로 인해 닫혔던 문이 열린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먼저 나타나는 선물이 이웃과의 사랑이 회복되는 일, 곧 관계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찾아오시면 우리 안에 죽은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속에 갇혀 죄의 종으로 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 맡아 갚아주셨다는 걸 알게 됩니다. 거저받은 구원 앞에 감격합니다. 이는 놀라운 소식,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복음은 전파되는 능력이 있고 또 반드시 전파돼야만 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복음, 영혼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는 운동력이 없는 복음, 그런데 복음을 전파하고 지켜 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랑을 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이해하고 싸워가야 하는가? 우리 안에 결코 Agape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사랑의 뿌리신 하나님을 사모하고 의뢰하며 구하는데 이걸 끝내 가로막는 불신앙의 죄와 의심의 죄, 게으름의 죄, 이기심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이게 고난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복음이신 예수는 하나님의 영생이 전파되기 위해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선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즉 복음전파에 필요한 사랑을 주께서 친히 공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성도의 길을 가며 고난을 감당하는 것도 주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도 주님의 것이요, 능력도 주님의 것입니다. 다만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믿어드리려는 최선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조건없이 믿어드리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만이 주님이 열어주시는 구원의 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의 도리입니다. 뼈를 깎아내는 기도로 죄악의 씨앗들을 잘라내기 바랍니다.
2.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본문 24절은“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한다고 시작합니다. 바울이 옥에 갇힌 건 복음을 위한 거였고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으로 바울이 낳은 영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차라리 기쁨이라는 것에서 본문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실수한 아들을 대신해 감옥에 가는 부모가 얼마나 기쁠까?
교회는 가정과 함께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세우신 중요한 2개의 기관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가정은 또 하나의 작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건 그리스도의 명령을 잘 지킴으로 드러나고 그 명령은 교회운동을 통해 지켜지고 확장돼 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건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교회에 남겨진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남겨진 십자가, 곧 고난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1)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롬7:21절 이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본다. 오호(嗚呼)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신의 유혹과 게으름과 안일함과 이기심과 혈기, 증오심이 자신과 하나님을 끝내 방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는 자는 자기가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마귀와 싸워 이긴 자가 자신과 싸워 번번이 무너져 숨죽여 한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의외로 자신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건 매우 큰 위험입니다. 자신을 바로 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것도 결국 주님을 만나야 가능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만나 무력한 자신을 알고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옛 근성을 발견하여 예수의 이름과 보혈의 권세로 죽이는 것, 이 싸움은 그렇다면 어떤 싸움인가? 예, 영적전투입니다.
2)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인생만사 영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 영적인 싸움의 결과입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며 드러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된 거라고 히11:3절은 주님 재림하시는 그 순간까지 이 영적전투는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싸우는 이게 영적전투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악한 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고 보십니까? 공중권세를 잡은 자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엡6:12-13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전투대상=정권을 잡은 무리의 악행)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래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는 영적전투에 이기지 못합니다. 에베소서는 계속해서 영적전투의 무기가 복음과 진리와 믿음과 성령과 기도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베소서를 통한 영적무기를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굳센 믿음을 갖기 위해 성령충만해하야 하고 성령받기 위해 기도해야는데 기도는 진리와 복음을 붙잡고 주님께 간곡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악한 영은 예수의 영 외엔 제압하지 못합니다. 악한 영은 직간접적으로 연약한 믿음을 공격해 들어옵니다. 악한 영이 결코 험상궂은 모습으로 나타나진 않습니다. 매우 친근한 모습과 절실한 유혹, 달콤한 한마디로 다가옵니다. 즉 세상의 화려한 문화, 달콤한 정서나 육신의 정욕을 타고 들어옵니다. 세속문물과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3)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벗할 수 없습니다. 고후6:15절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요일 2: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린 끝까지 점점 썩어가는 향락주의, 세상의 문물과 싸워야 합니다.
누가 폰과 자동차와 시계를 소유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벗하며 살면 그건 문물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과의 싸움은 정신세계를 축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예수의 영입니다.
요16:33절 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예수의 이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유일한 능력이요, 소망입니다.
3. 육체에 채우는 고난입니다.
주님 허락하고 동참케 하신 성도의 길은 끝으로 육체에 채우는 고난으로 입증돼야 합니다. 지금까지 거론된 모든 영적인 전투인 세상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마지막 그게 자신의 육체 안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흙의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육신이 십자가의 보혈과 거기 동참하는 눈물의 기도와 통회와 수고의 땀방울로 채워지지 않으면 필경 그 육신은 사단의 먹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영적인 사역으로 눈물이 마르지 않고 예수의 피냄새가 배어있다면 사단은 달아납니다. 항생제 오래 복용한 이에게 모기가 덤비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몸에서 세상 흙냄새가 아니라 예수 냄새가 뿜어나기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은 완전합니다. 그리고 남은 교회운동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운동과 복음전파로 나라 확장을 이뤄갑니다. 이 운동은 주님의 영혼사랑을 근거로 하며 그것은 끝없는 영적전투로서 군사로 부름받은 우리의 거룩한 사역입니다. 이 부름은 한없는 영광이며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린 우리의 육신을 쳐서 순결을 덧입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은 모든 능력의 시작입니다. 믿음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육체에 채울 영광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믿음으로 시작되는 기도요, 성령충만이며 말씀충만이고 예수충만입니다. 영적으로 무장된 자는 그래서 결코 마귀의 밥이 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육체에서 곧, 우리들의 일상에서 썩는 흙냄새가 나지 않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부끄러운 세상 냄새가 나지 않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로 채워져 툭 치기만 하면 예수향기, 오직예수! 오직감사! 오직성경이길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믿는 자여. 성경읽는 자여. 기도하는 자여. 주앞에서 눈물흘리는 자여. 주님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이 넘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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