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4. 주일낮예배<욥1:20-22. 욥의 적신(赤身)신앙>
젊은 날 새벽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논길을 걸으며 새벽달을 가슴에 담았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어딘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 있을 거란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럽고 힘들 때마다 그곳을 상상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위로는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거기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가득 쌓이곤 했는데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인 걸 나중 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육신으로도 넉넉히 누릴 수 있는 믿음의 나라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창3:19-“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빈손으로 온 게 사실입니다. 벌거벗고 핏덩어리로 온 겁니다. 그리고 또 빈손으로 갑니다. 백만장자도 베옷 한 벌이오, 가난한 자도 베옷 한 벌입니다. “필경은 흙으로, . .”
오늘 설교제목이 적신(赤身)신앙입니다. 적신이란 붉은 몸, 곧 벌거벗은 알몸이라는 뜻입니다.
알몸으로 고백되는 신앙은 그 깊이가 다릅니다. 실제로 내가 지금 소유한 건 목숨 하나뿐이라는 데까지 내려가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앙고백이 바로 알몸 신앙고백입니다. 이 적신에 비하면 빈손이라고 하는 백수는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모릅니다. 혹 백수의 경험과 고백은 더러 있어도 알몸의 경험은 매우 드물고 그래서 귀합니다. 단지 드물어서 귀한 게 아니고 적신만이 맛보는 인생의 깊이와 폭과 결이 다르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욥의 고백 중 4개의 줄기를 봅니다.
①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다. ②알몸이 다시 그리(흙)로 돌아간다. ③하나님이 우릴 구원하시고 섭리하시고 영원히 그 나라를 통치하시니 찬송을 드렸다. ④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1. 세상에 올 때 알몸으로 왔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하나로 왔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저 사람은 3겹 색동옷을 입었는데 나는 간신히 홑겹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요. 갑자기 울적해집니다. 그러다 또 다른 이를 보니 그나마 한 벌 옷도 없어서 절쩔매고 있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양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왜 비교할까? 비교는 시기와 질투라고 하는 근본 인간 죄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교는 내가 적신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걸 잊으며 시작합니다. 왜 잊고 살까?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더 잘해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빈손으로 왔다는 걸 까맣게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많이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빠집니다.
2. 재앙입니다.
세상의 재난은 사람이 저지른 것과 하늘로 오는 천재로 구분됩니다. 인재(人災)든 천재(天災)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기까지 계속될 겁니다. 보통 인재(人災)는 깨달을 때까지 갑니다. 욥의 재난을 통해 인재와 천재로 구분해 살핍니다.
1) 인재(人災)입니다. 도적들이 와서 물건을 탈취하고 종을 죽였습니다(15절). 악당들이 와서 칼로 사람을 죽이고 짐승을 가져갔습니다(17절). 밤길에 제일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재난 중에 사람 죽는 게 가장 큰 재앙입니다. 순서 바뀌지 않고 가게 기도합시다.
2) 천재(天災)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사람을 태웠습니다(16절). 태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고 소년들이 깔려 죽었습니다(19절). 천재지변 앞에 인간은 할 일이 없습니다. 흔히 재해대책본부라는 말은 사실 재해수습본부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물론 준비는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사건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심한 가뭄. 지진. 해일. 홍수. 벼락. 원인도 알 수 없는 괴질, 우리가 아는 건 무엇이며 또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20~22절에 보니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엎드려 경배했다고 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3. 고난 중에 찬미하는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흉한 모습, 절규 중에도 하나님을 높이는 욥입니다.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그 모든 길은 오직 하나님의 품 외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린 재난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재난을 멈추게도 하시며 보내시기도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 함께 험한 인생길을 가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자녀가 죽었어요. 가축을 빼앗기고 종들도 죽었습니다. 그 고통과 아픔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욥은 이렇게 엄청난 불행을 당할만한 아무 근거를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없어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는 편안할 때 자녀들의 생일 때마다 혹 자녀들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배반했을까 하여 번제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욥1:1-5절에 욥은 ①순전하고 정직했다. ②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다. ③다복한 자녀가 있다. ④큰 부자다. ⑤예배하는 인생이다. 이렇게 순전하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우리는 쉽게 찾지 못합니다. 5절 하단에 성경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랬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산더미같은 고난, 큰 재앙이라는 파도 앞에 사람들은 대부분 망연자실, 넋을 잃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 마비되기도 합니다. 헛소리를 하며 헛것을 보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기능이 멈추거나 까무러치지 않으면 인간은 더 큰 일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었습니다. 괴로워하며 견딜 수 없어 하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렸는데 성경 말씀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22절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치 않으니라.” 이 모든 일이란 욥 자신이 전혀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을 말합니다. 그 일들 앞에 범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린 범죄의 의미를 바로 알고 지나야 합니다. 범죄는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것을 뜻합니다. 욥은 당한 불행앞에서 불행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불행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되는 현장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이 불행한 일을 지금 보고 계시며 나의 믿음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결단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보아도 욥과 같은 상황에서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원망은 억울해 하고 분해서 미워하며 탓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힘든 일 위에 하나님을 불신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더해집니다. 불행한 일 자체보다 마음의 원망으로 더 괴롭게 됩니다.
4. 세상 떠날 때 빈손으로 갑니다. 적신(裸身알몸)思想의 신앙고백입니다.
시103:14절입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세상에 올 때 알몸으로 왔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건 돌아갈 때 빈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올 때 다 잡아 보겠다던 야곱의 움켜쥔 손들, 세상 떠날 때는 길게 편 채 빈손으로 갑니다. (태아의 손과 망자의 손)
욥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욥의 고백은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른 고백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그래요. 세상에 나올 때 분명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다만 생명과 몸 하나로 왔습니다. 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주셔서 여기저기 넉넉한 것들로 인생이 풍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중 한 구석이 사라지면 그만 모두를 잃은 듯 희망을 잃고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원망합니다. 어찌해야 힘든 고통가운데 편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 욥의 적신사상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성경은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무(無),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주시고 몸주시고 사람 주시고 지혜 주시고 가정과 직장과 건강과 물질과 모든 걸 주십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떠나 영혼 하나만 남아서 하나님 앞에 가더라도 우리는 사실 잃은 게 없는 겁니다. 그냥 모두 제자리에 되돌아간 겁니다. 오직 영혼하나가 주님 앞에 서서 살아온 그간의 모든 평가를 받는데 그나마 그 영혼마저 도둑맞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 내 곁이 텅 비어도 내 영혼 주를 찬양한다면 우린 잃은 게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시면 아멘입니다.
이게 욥의 적신사상(赤身思想)입니다.
흑해연안 시노페의 유명한 통나무철학자 디오게네스, 아테네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통나무에서 청빈한 삶을 자유롭게 즐기고 있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왔습니다. 알렉산더는 명예도, 부도, 모든 것을 버리고 통나무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를 진정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하신 게 없습니까?” 디오게네스가 말합니다. “좀 비켜서시면 그늘이 지진 않을 것이오.” 이후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스토아학파의 통나무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고향 시노페에서 추방당한 이유가 뭡니까? 위조지폐제조혐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채울 때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건 부끄럽거나 흉한 게” 아니라며 긍정적이고 청빈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의 진리와 얼마나 다른 말로 모두 아는 척하는 자들이 철학자라는 걸 알게 됩니다. 본문 말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언젠간 적신으로 돌아간다는 욥의 고백은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채우는 게 행복”이란 말로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는 철학자의 말과는 놀랍게 다릅니다. 아무리 깊은 학문의 도가 열려도 성경의 감동을 모르는 사람들은 씨없는 수박이나 계란같아서 먹기는 좋아도 더는 열매나 생명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만 있습니다.
욥이 큰 재난에서 하나님 앞에 죄짓지 않고 찬송할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재난이 괴롭고 힘들어도 이것이 결론이 아니라는, 믿음의 위대한 힘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과정을 결론이라고 말하는 실수가 없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온 알몸이 돌아갈 때도 여전히 알몸에 베옷 한 벌 얻어 입고 빈손으로 간다는 걸 늘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상이 적신사상입니다. 분명한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손에 쥔 게 없으면 다 잃었다고 생각하는 상실감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억울하단 생각과 분노로 드러나 고통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본래 있었던 걸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서 옵니다. 죽어 헤어지든 살아 떠나든 사랑하는 이들과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헤어집니다. 억울한 일로 재산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희귀병에 걸려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더 가슴 아픈 건 다신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잃었습니다. 잃은 것들은 즉시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내 곁에 잔상으로 남아 날 괴롭힙니다. “그이가 있었더라면.” “그 돈이면 지금쯤” “그때 거길 가는 게 아닌데.” 눈에 선하게 보이는 아쉬운 기억들, 알고보면 거저 왔다가 갈 때도 올 때처럼 거저 가는 것들입니다. 억울할 게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우린 늘 억울합니다. 본래 세상에 태어날 때 많은 걸 갖고 온 사람처럼 늘 억울합니다. 잔뜩 갖고 갈 것처럼 억울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통은 동일한 것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자세로 고통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는 걸 막을 순 없어도 우산을 준비할 수는 있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라면 그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질병이나 고통스런 사건을 바꿀 순 없어도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을 때 배의 방향만 잘 잡으면 배는 오히려 빠른 속도로 나아갑니다. 바람이 심할수록 나무의 뿌리가 깊어집니다. “나는 신음한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는다.” 리챠드 백스터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자세가 올바르게 잡혀 있다면 우리는 삶의 고통가운데서도 훨씬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알몸으로 왔습니다.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하나님이 거두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게 하신 주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 주님이 채우시는 줄 믿습니다. 적신신앙으로 늘 기뻐하하게 하시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벌거벗은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기뻐하는 믿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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