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6.주일예배<출 21:7-14. 의로운 율례-1/4.>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율법 안에 얼마나 사랑이 극진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7절과 8절은 히브리인 중 피치 못할 경제사정으로 자기 딸을 채주의 집이나 필요한 집에 팔았을 때의 경우를 설명입니다. 딸을 빚 때문에 첩으로 팔았는데 데려온 후 동침하지 않아 자녀가 없을 때는 그건 딸을 속여 약속을 어긴 것이니 빚은 이미 갚은 것이고 타인에게 되돌려 팔지 못합니다. 한편 소실로 사들이지 않고 일반 노동노예로 샀다면 그는 7년 만에 해방됩니다.
9절과 10절은 그 딸을 노예로 사서 아들에게 주어 소실이나 아내를 삼게 했다면 그를 딸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혹 그 여자노예를 둔 채 다른 여인과 혼인하여 외면당할지라도 소실이 된 여자노예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과 동침의 권한을 계속 허락해야 합니다. 이런 게 안 지켜지면 그대로 놓아줘야 합니다. 수천 년 전인데 얼마나 놀라운 자비와 사랑과 공평의 법입니까?
구약시대 한시적으로 허락된 노예제도는 당시 시대상황에 맞는 경제정의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빚은 갚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취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을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1.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5개 구절을 통해 보이는 하나님 마음은 불변하는 약속에 대한 신실성입니다. 사람은 도중에 조건 따라 감정 따라 말이 바뀝니다. 그러나 주께서 한 번 정하신 계약과 조건은 불변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받을 채무조건 대신 그 집의 딸을 데려올 때 소실로 삼겠다는 약조를 했다면 어떤 경우에도 소실에게 합당한 권리를 끝까지 허용하라는 게 본문 명령입니다. 처음 약조가 소실이었다면 그는 일반 노예로 전락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도중에 바뀐 건 채권자의 마음이지 약속이 아니라는 거고 이런 명령이 하나님의 신실성입니다.
죄에 빠져 죽어있던 인생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운동은 이미 에덴에서 가죽옷으로 시작됐습니다. 그 희생제사의 피로 시작된 예배는 훗날 성막제사로, 성막제사는 성전의 제사로, 성전의 제사는 예배당의 예배로 시대 따라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게 제사의 형식은 바뀌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건 하나님의 결정과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창12:2절의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줄 것이며 너는 복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포에 근거를 둡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 그리고 열두 이스라엘지파로 내려오며 순종축복, 불순종멸망의 길로 지켜져 내려왔습니다. 인류는 절대적인 죄성과 무능 속에서 뭐로도 씻을 수 없는 오류 속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게가 옆으로 걷듯이 인생은 늘 회의와 실패를 거듭하며 한번에 바로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신실하신 속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죄성과 신실은 서로 반대편에 있습니다. 죄가 들어온 순간 신실함은 사라집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신뢰가 이 땅에 없음을 각종 규제와 법률, 그리고 형무소와 법관이 그걸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4회에 거쳐 살피게 될 모세의 율법은 당시나 지금이나 얼마나 인간이 말로는 이끌어가기 어려운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가를 알게 할 것입니다.
2. 약자를 보호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살펴봤듯이 채권자가 채무자의 딸을 첩실 노예로 데려온 후 약조가 이뤄지지 않으면 이는 이미 채권이 끝난 거로 보아 놔줘야 합니다. 죄의 노예로 묶여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들여 자유롭게 하셨으니 이제 우린 우리의 신분이나 어떠함과 무관하게 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언제나 약자 편이신 히브리의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를 보고 계시고 고통 중에 있는 자를 보시고 좌절하는 자를 보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낮추어 히브리라고 고백하는 순간 거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무능을 고백하는 시간부터 임마누엘은 시작됩니다.
3.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 건 결코 인간의 생명을 해쳐선 안 된다는 생명 사랑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으니 생명에 관한 한 양보 없는 명령이 죽인 자는 죽이라는 겁니다. 다만 실수로 죽였거나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경우는 정한 곳에 도피처를 만들어 보호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수를 위장한 자는 역시 반드시 죽이되 비록 제단에 있어도 잡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합니다. 14절입니다. “사람이 그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하나님의 단에 있을 땐 법조차 강제로 집행하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살인자의 경우 예외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대사관과 교회나 성당은 치외법권지대로 통합니다. 경찰이 진입하지 않는 것이 사회 통념상의 묵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종교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오늘 우리는 12절에서 14절까지 살인에 관한 모세율법을 살피며 현행 사형제도 찬반에 관한 성경적 소견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살인만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일은 생명주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범죄 중 범죄입니다. 따라서 살인은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이 사람을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걸 만천하 백성이 알고 살인을 피하도록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사형을 받을 때 오판이 없어야 합니다. 사형수들의 사건비화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시효만료 며칠 전에 진범이 잡혀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생명을 건진 이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형을 폐지한다면 참으로 억울하고 슬프게 터무니없이 죽어간 사람들과 또 앞으로 계속될 살인범죄를 어떻게 예방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사형이 살인사건을 줄인단 증거는 없습니다. 사형제도가 있든 없든 살인사건은 그것과 무관하게 계속된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통계도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살인죄가 얼마나 흉측하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야 할 일인지를 충분히 계몽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사형제도는 유지하되 유예기간을 늘이고 살인범을 교화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기회를 넓히는 게 좋습니다. 이를테면 사형을 선고하되 그 집행은 매우 길게 유예해 사형수는 사형이라는 부담을 갖고 교화의 기회를 가지면 좋겠단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없어 살인이 없고 앙갚음과 사형이 없는 거기,..
다시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어 감동만 넘치는 거기,..
천국은 꿈이 아니라 현실가운데 가장 확실한 현실임을 믿고 힘을 내시기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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