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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2.01.09.주일예배(눅10:17~20절. 성도의 기쁨, 錄名)

by 설렘심목 2022. 1. 9.

2021.01.09.주일예배(눅10:17~20절. 성도의 기쁨, 錄名) 찬481장. 때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주님은 12제자를 파송(눅9:1-2)하신 뒤 따로 70인의 제자를 또 파송합니다. 이때는 이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6.)과 십자가 수난에 대한 두 번의 예고가 끝난 뒤였습니다. 주의 사역이 본격화하자 헤롯은 매우 당황합니다.

본문은 주님이 파송한 70제자가 돌아와 성공적인 파송결과를 보고하며 주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주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군요.” 제자들은 처음 경험한 주의 이름이 그토록 큰 권세인 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사뭇 다르게 이어집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님이 본문에서 지적하시는 진정한 제자들의 기쁨, 그리고 성경이 밝히는 더 깊은 기쁨은 무엇이어야 하는 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제자들의 가장 큰 소망은 생명책에 있는 자신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언제나 주님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는 오직 메시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거라면 아무리 진실해 보여도 그걸 신뢰할 순 없습니다. 그 진실에 영원한 보증이 없으면 잠시의 위로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골1:16)를 쥐셨고 영원을 주장하십니다. 주님껜 시간이란 단어가 소용이 없고 만세 전후를 손에 쥐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잠시 왔다 사라져야 하는 우리는 육신과 그 안에 갇힌 생명들입니다(시90:10). 그런 한시적 우리 인생에게 주님의 영원한 생명이 아니곤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으로 놀라 감동한 제자들의 믿음은 눈에 묶여 있어서 금방 일어난 일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향하신 주님의 눈은 하늘나라에 있는 생명책에 있습니다. 주님주신 기쁨은 잠시 사라질 기쁨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인 구원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몸은 비록 이 땅에서 흙을 딛고 살지만 우리들의 소망은 눈을 들어 주님 다스리는 하늘나라 천성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자들의 더 큰 기쁨은 생명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청년에게 부자아버지가 작은 농장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농장은 집에서 떨어져 있었고 청년은 그 농장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열심히 일합니다. 툭하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농장 한쪽에 마련한 임시숙소에서 잠을 자고 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일합니다. 농장은 날로 번창해가고 결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뻤습니다. 이 청년의 기쁨은 어느새 온통 농장이 돼있습니다. 농장을 주신 아버지께 전화 한번 하기 힘듭니다. 아버지에게 그 농장은 매우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 농장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연락이 뜸한 아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되었고 남은 여러 아들이 꾸준히 자신들의 유산으로 받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청년아닙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깨닫고 그 뿌리에 나를 묶어 놓을 수만 있다면 실로 그건 놀랍고 뛰어난 지혜 중 지혜입니다. 그건 기쁨의 근원에 연결되는 일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복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십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32:11에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라고 권면하고 9절에서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37:4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복음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듣고 복된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에서 복을 제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복의 근원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복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총체적 삶이 복음에 연결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굳건한 구원의 닻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결탁입니다. 합 3:17~18절을 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무화과 열매나 포도 열매나 양이나 소는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고 그걸 위해 어떤 희생도 결단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닮기 원하실 때 그리고 뭔가 선물을 주시기 전 먼저 사랑을 확인한다는 걸 기억하기 바랍니다. 참되 사랑은 조건을 무시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받을만한 아무 조건이 우리에게 없는데도 우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실은 충분히 감격하고 기뻐해야 할 줄 압니다. 그분이 우릴 불러주시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십니다. 너희의 숨통을 옭죄고 있던 모든 너희 허물과 죄는 내가 십자가로 해결했으니 그냥 믿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기쁨이 그리스도가 되길 바랍니다. 본문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3.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이들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불러주시고 파송하는 자에겐 능력을 주십니다. 크고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권세와 모든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중학생 교통봉사원이 교통정리를 하는데 이때 위반한 운전자는 경찰관이 봐주질 못합니다. 경찰의 신호보다 더 막강한 권세를 받습니다. 어린 봉사단원 뒤엔 경찰서장의 이름과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파송한 성도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막16:17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성도 여러분.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건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한 확정한 거고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으면 누구도 해치지 못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70인 제자들은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제압하고 악을 짓밟을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아무도 해할 자가 결단코 없다고 본문 19절이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하신 주님의 약속과 선포는 우리들의 안전과 평강이 오직 그리스도뿐임을 확신가운데 증거하게 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할렐루야.

우리의 기쁨은 더 높은 곳, 즉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높은 곳에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신 주님을 날마다 기리며 송축하고 찬송하여 오직 그분의 기쁨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