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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2.01.02. 주일예배<요4:23-24.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by 설렘심목 2022. 1. 2.

2022.01.02. 주일예배<요4:23-24.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예배의 본질은 받는 게 아니라 드리는 겁니다. 오늘은 내게 있는 무엇을 어떻게 드릴까 하며 예배당을 향해 온 여러분이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성실한 드림의 결단과 부푼 마음이 있다면 주께서는 여러분의 가슴을 말씀과 감동으로 그리고 결단으로 가득 채우십니다. 여러분의 전인격과 관계와 삶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건 기쁨이요, 예배의 결산입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고 영혼과 삶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는 것, 우리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어있는지조차 전혀 모르는 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주신 겁니다. 깊은 어둠에 살던 우리에겐 죄를 용서받을만한 아무 근거도 없었고 아무 감각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의 하나님을 자청하고 선포하신 주께선 가난한 우리를, 허약하고 천박한 우리를, 헐벗고 굶주린 우리를, 억울하고 서럽게 절망하는 우릴 찾아오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성령 충만함과 오직 복음에 이끌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왜 찾습니까? 깊은 관계를 원하시는 겁니다. 왜 깊어지기 원합니까? 관계형통, 각성, 결단, 행함, 주실 게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 어떻게 드립니까?

출5: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1. 광야에서 거룩함으로 구별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광야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신 영과 진리는 바로 예배자가 서 있는 광야를 바탕으로 시작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흠뻑 부어주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예배에 넘쳐날 때 가슴을 열고 그분의 영을 흠뻑 맞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자 여러분, 광야는 메마르고 거친 곳입니다. 광야에 서 있는 심령되기 축복합니다. 하늘을 봐도 땅을 보고 사방을 봐도 전혀 의지할 아무것도 안 뵈는 광야의 가난하고도 절박한 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권유합니다. 은행 잔고가 있습니까? 믿을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이 승인하시고 보호하실 때 비로소 물질은 거룩한데 쓰일 것이고 관계는 거룩한 동지가 됩니다. 특별히 여러분 자신의 믿음과 육신을 너무 믿지 의지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건 무릎꿇어 기도가 그치지 않고 있을 때 여러분 안에 함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는 애굽의 풍요와 기름진 가운데 드려지는 게 아니라 황량한 광야에서 진실해집니다. 다음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란, 신12:11절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2. 희생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엔 희생이 꽃입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백성들과 희생을 드렸습니다. 희생이란 뭡니까? 짧게 말하면 ‘더 큰 걸 위해 어떤 걸 아낌없이’ 드리는 건데 문자로는 ‘대신 죽는 짐승’입니다.

1) 희생은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겁니다.

세상에 살면서 지혜로운 투자를 잘해서 성공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예배에서 하나님 앞에 희생되기를 주저해 늘 힘겹게 사는 걸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난 왜 예배에 뜨거운 감동이 없을까? 영적인 체험과 능력이 없을까? 왜 안 믿어질까? 희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피 흘려드리는 희생이 없어서입니다. 드리긴 드리는데 피를 안 흘리려 합니다. 계산이 야곱이나 가룟유다처럼 빨라 받은 만큼만 드립니다. 손익계산에 익숙한 현대인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2) 희생은 중심을 담아서 드리는 겁니다.

시간을 드릴 때 그 시간 안에 가득 중심을 담아 드려야 합니다. 간곡해야 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시간을 드리기 바랍니다. 예배자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나 같은 것이 어찌 여기에’ 하는 겸손한 맘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겁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종이 어찌해야 할지를 말씀으로 일러주소서. 그렇게 시간과 몸을 드리는 게 희생입니다. 또 물질을 드릴 때도 사랑과 중심을 가득 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뭔가를 줄 때 거긴 더 주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도 더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하지요. 은혜를 깨달아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우린 늘 죄송한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은혜도 깨닫지 못하면 은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송도 중심을 온전하게 담아서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희생은 그러므로 애굽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건 예배를 잃어버린 자들이 광야에 나와 예배를 회복하여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의 결과는 감동이며 기쁨이요, 화목이며 생명입니다. 이걸 여러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진리는 반대로 돼 있습니다. 올림픽이나 운동경기에서 우리는 감동적인 승자의 메달을 보게 되는데 그건 어느 날 갑자기 행운과 함께 굴러든 게 아닙니다. 거기까진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선수의 남다른 수고와 노력이 있었다는 걸 말합니다. 그는 승리에 이르도록 무섭게 노력했고 그 경기장에서는 공정하게 인정받으려 한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면류관은 그것과 반대의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 구원의 抒情은 먼저 주님이 승리를 확정,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경주를 해야 할 선수인 우리가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준비하셨습니다. 롬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남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아멘. 그렇습니다. 구원도, 성화도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후 우리에게 믿고 따르기만 하면 이뤄지는 믿음의 길, 곧 예수복음의 길, 시온의 대로를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의 신이 넘치는 것 그게 신령입니다. 여기 지금 하나님의 신이 넘치심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주의 신,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넘치십니다. 지금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성도의 능력, 무엇이 능력입니까? 지식입니까? 재산입니까? 건강입니까? 가문입니까? 인격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라고 고백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능력이며 그 믿음은 반드시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겁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세상이 내 안에서 작아지며 힘을 못 씁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그러므로 믿음입니다. 환하게 웃으며 찬미예수요, 찬송천부 하나님이 입술과 삶에서 그치지 않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