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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1.08.22. 주일예배<사6:13. 그루터기>

by 설렘심목 2021. 8. 22.

2021.08.22. 주일예배<6:13. 그루터기>

그루터기란 밑바닥, 기초로서 본래는 잘려나간 나무의 밑둥치를 말합니다. 보통 나무들이 잘려지면 그루터기 옆으로 새순이 돋아나서 다시 갱생의 삶을 시작합니다. 작년 우리교회가 철거로 문을 닫기 직전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됐고 정치방역으로 국내 모든 교회가 심각한 재정난으로 문을 닫거나 예배방해를 당하며 오늘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해괴망칙한 정권이 청와대를 장악했습니다. 주적인 북한 중국과 공산주의엔 우호적이고 혈맹 미국과 교회와 재벌을 주적으로 하는 암묵적 계도로 국민을 세뇌해가고 있습니다. 체제를 바꾸려는 무서운 음모는 이미 오래전 시작되었습니다. 5.16혁명 이후 똘똘한 아이들은 데모시키지 말고 유학보내 공부시키라는 김일성의 교지는 천하에 드러났고 지금도 나라 곳곳에 김일성장학생이 똬리를 틀어 오늘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온통 나라를 두 패로 나누어 전문지식이 없어도 함께 데모하던 동지면 한 자리씩 다 앉혀 경제를 비롯 언론, 사법부, 문화계, 심지어 종교계까지 각 분야가 민족끼리라는 명분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교회가 풍요로워 대형화하고 성도와 지도자가 세상 부자들을 닮아가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적 신앙적 위기에 우리가 교회의 그루터기인 것을 믿고 말씀을 받을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새싹이 움터날 줄 믿습니다. 그것은 어떤 새싹입니까?

본문 13절 앞부분만 다시 함께 읽습니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1. 황폐해진 데에서 움트는 새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언제 일하십니까? 부르짖을 때 하십니다. 어떻게 부르짖을 때 일하십니까? 내가 참으로 황폐하다고 울부짖을 때 돌아보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황폐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생각 안에 갇혀 있으면 끝내 알지 못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깨어짐으로 시작됩니다.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생각이 어딘가에 부딪혀 깨어져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며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알고보면 그동안 숱하게 들어온 설교내용이고 또 주변에서 자신도 하며 주고받던 말입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변해 위급해지기 전까지 그런 말들은 한낱 겉치레에 불과했던 겁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어져 나가고 주변이 황폐해질 때 사람들은 드디어 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처럼 이제는 그루터기의 영광을 보일 때라고 하십니다. 화려한 궁전이나 푸르고 기름진 초장이 아니라 풀 한포기가 없어 마른 밭에 먼지가 나는 황폐한 현장에서 주님의 돌보심은 새싹을 일으키십니다. 본문은 황폐한 곳과 베임 당한 곳에서 남겨진 그루터기를 주목합니다.

 

2. 베임을 당한 곳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싹입니다.

 

칼로 몸을 베어본 사람은 그 아쓱한 느낌의 잔혹을 잊지 못합니다. 잘려나간다는 것, 그것은 아픔이기 전에 생존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한 엄숙한 감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잘려나가는 두려움, 버려지는 아픔이 현실적인 고통과 역사로 나타나기 전에는 이사야의 가혹한 예언은 항상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책망은 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뒤에 달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삶에는 언제나 우리들의 미숙함과 욕심으로 상당부분 어려운 일들이 재난과 함께 복병처럼 기다린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믿음의 그루터기들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항공기는 바람을 안고 뜨고 산란기를 맞은 고기들은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갑니다. 물길 따라 편안하게 둥둥 떠가는 건 죽은 물고기들뿐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새싹으로 싱싱하게 키워가는 것은 황폐와 베임으로 시작된다는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골고다의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2: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주의 영이 수많은 영혼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뿌리, 교회와 성도의 그루터기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베임 당하고 그 몸이 황폐한 가운데 십자가로 올려질 때 수많은 영혼의 새싹들이 올라온 겁니다. 본문 13절 뒷부분 밤나무부터 함께 읽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 땅에 번져갈 복음의 씨, 우리들의 든든한 기초는,

 

3. 거룩한 씨, 하나님의 백성,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우상숭배로 영적간음 속에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이스라엘의 성읍들은 모두 황폐하게 돼 주민이 없고 가옥에도 사람이 살지 않아 무너져 내리는데 토지는 방치된 채 잡초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는 이마다 다시는 이 땅에 히브리인들이 안 뵐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약속의 하나님, 용서하길 기뻐하시는 하나님,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 함께 하시고 고치시며 돌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족해도 그렇게 좋으신 주님의 자녀요, 택하신 백성이요, 몸된 성전으로 신부라고까지 불러주시기를 주저하지 않는 약속의 귀한 생명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람과 기쁨과 의미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기뻐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거룩하고 존귀한 자들입니다. 아니, 거룩해야 하고 존귀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기 전에 주의 목표요, 주님의 활동에 대한 중대한 증거기도 합니다.

즉 주님께서 분명히 죽었다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이제는 거룩한 씨 우리가 그루터기에서 새순으로 움터 자라나는 것이 부활의 증거인 것입니다. 성도가 무슨 증거라고요? 그래요. 부활예수의 산 증거입니다. 주께서 죽음을 이기신 증거가 성도라는 놀라운 사실에 이제 이 말씀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새 힘이 넘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거인 성도의 육체는 비록 100년 안팎, 짧아도,

 

1) 영생의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현실적 삶의 애환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우리는 영생의 주인들입니다. 하숙집에 몇 달 머무는 하숙생도 하숙생 나름입니다. 돌아갈 집에 아버지가 거부인 사람은 비록 하숙생활이 고달파도 짜증내지 않습니다. 천박하게 굴어 아버지 체면을 구길 수 없습니다. 그의 기쁨은 여기 잠시 스치는 하숙집이 아니라 곧 돌아갈 아버지의 집 따스한 아랫묵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도와주고 살펴줄 이웃이며 관리해야 할 큰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인 삶의 능력으로 육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육신은 짧은 한평생 모든 결론에 매달려 비굴하다 해도 영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본향을 두고 한낱 과정에 불과한 육신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 있고 그래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기를 주님이 우리에게 하듯 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3) 지켜지는 약속으로 늘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주님과 맺은 언약은 주님의 기쁨과 우리들의 행복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즉 우리가 행복할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은 바로 믿고 바로 행할 때 비로소 우리 손에 주어집니다. 성경은 그 행복의 열쇠인 말씀이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손과 입술에 붙어 있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지켜지는 하나님의 언약 구약과 신약 속에 살면서 기뻐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할렐루야.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힘있고 보장받은 저와 여러분의 출발은 언제라고 했습니까? 황폐하고 베어진 그 자리입니다. 베어진 그루터기에 뿌리를 둔 새싹이 솟아납니다. 그것은 그루터기의 부활이요, 끝없는 생명사랑의 하나님형상들입니다. 이스라엘의 패망은 그래서 더욱 겸손하고 담대한 출발일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새출발은 언제나 말씀을 받은 그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신비요, 권능인 줄 믿기 바랍니다. 그것은 또한 거룩의 씨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둔 저와 여러분의 생애가 주님의 명예요, 권세이니 오늘 새영으로 받은 말씀을 따라 모두 승리하시기 주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