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5. 주일예배<눅23:39~43. 십자가 왼편과 오른편>
인생의 어떤 문제도 골고다 십자가 아래서는 다 풀어집니다. 즉 모든 답은 골고다 언덕 위에 있는 십자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처형은 당시 극형 중 극형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을 심하게 가하는 사형에서 인류의 구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약속의 완성이며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동시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류역사상 최대 최고의 복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엔 진정한 의미의 진선미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선하며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든 의미 곧 사랑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의 보혈이 땅으로 흘러 떨어질 때 죄로 오염된 온 땅이 생기를 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 십자가의 권능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어떤 세상 문제도 없음을 우린 믿습니다. 주님이 우릴 위해 달리신 십자가 양옆에는 흉악범 두 사람이 각각 달려있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죽게 됩니다. 그러나 가는 길은 다 다릅니다.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온 인류를 구원합니다. 행악자 중 하나는 주님을 따라 천국을 보장받고 또 하나는 지옥을 갑니다. 두 사람의 흉악범이 전혀 다른 다음 세상을 만나게 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오늘은 십자가 양편을 살피며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십자가의 양편은 각각 어떤 차이와 의미가 있는가? 본문39~41절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말이 오갑니다. 즉,
1. 십자가는 분기점(分岐點)입니다.
분기점은 길을 가다가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나는 지점 곧 갈림길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며 숱한 분기점을 만납니다. 선택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한다는 말 많이들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8시경 이른바 십이륙 사태에서 초긴장 상태의 세 사람, 김재규중정부장, 김계원비서실장, 정승화육참총장은 남산으로 갈까? 남영동으로 갈까? 갈림길에서 “혹 병력을 동원하려면 남영동이” 좋겠다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사심 없는 한마디가 끝내 김재규와 몇을 교수대로 가게 했고 전두환을 대통령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이렇듯 사망과 생명의 갈림길이 순간의 선택으로 결정되듯이 지옥과 천국의 갈림길이 십자가인 것 믿습니까?
십자가를 기점으로 개인과 가문과 인류의 역사 그 기원이 갈립니다. 하나는 율법의 시대요. 십자가를 통과한 후로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십자가를 기점으로 구원 이전과 구원 이후로 갈라지며 새 하늘, 새 시대가 열립니다. 십자가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극명하게 갈라놓았습니다. 기원전 BC와 기원후 AD, 죄인과 의인, 불신앙의 저주와 신앙고백의 축복, 동행과 분리, 사랑과 두려움, 슬픔과 기쁨, 노래와 한숨, 막힘과 열림 등 많은 갈림길이 십자가로 시작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망과 영생의 갈림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의 길로 들어선 후에는 십자가를 통과한 믿음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 믿음인가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무게와 가치를 달리합니다. 40~42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십자가를 통과하는 믿음은,
2. 온전히 거듭나는 길입니다.
십자가 양편으로 구원의 길이 갈라지는 것을 봅니다. 구원받지 못할 한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조롱하며 모욕합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한 사람은 주님을 알아보고 옆에 달린 행악자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첫째 구원받는 자에게 십자가는 거듭남의 증표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과해 부활로 승리하는 표적으로서 그 목적을 고통에 두지 않고 고통을 통한 영광에 둡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두 번째 구원받는 자에게 십자가는 의탁하는 믿음을 완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면 평생 하지 못할 고백과 의탁으로 구원받는 장면입니다. 당신의 나라라고 말함으로 주님이 왕 되심을 인정했습니다. 천국이 도래한다는 것을 믿는 이 사람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영원한 그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비록 흉악범이었으나 새로 오는 저 세상에서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로 밝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겁니다.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주님 옆에 달린 행악자는 주님을 인정함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옮겨졌습니다. 즉 자신안에 있던 죄로 죽은 영혼이 주를 인정하는 동시 의로우신 주님 안으로 영입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잠자던 영혼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리고 입술로 시인하며 믿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할 때 구원받았습니다. 주안에 들어온 영혼은 주님의 보혈로 되살아납니다. 회생입니다. 부활 예수님은 모든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시려 이 땅에 오셨기에 주님만 만나면 잠자는 어떤 영혼도 살아납니다. 신4:29에서도 “마음과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43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3. 주님지신 십자가는 구원의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구원과 언약을 동시에 완성한 하나님의 완벽한 의이며 선포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구원은 주님의 절대 권능에 의한 선포입니다. 지금도 믿는 자와 교회를 통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십자가의 의를 통해 많은 이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선포 즉시 확정되는 하나님의 권세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내가 오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선포하시는 구원의 음성을 듣고 새날을 약속받기 축복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킬리만자로의 눈”“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책을 써서 돈을 많이 벌었고 부자가 된 그에겐 친구도 많았습니다. 미남인 그는 아내도 여럿을 두었습니다. 뭐하나 부러울 게 없었고 모두 존경했습니다. 그런 그가 엽총으로 머리를 쏴서 골이 흘러나와 죽습니다. 이 외에도 뭐하나 부러울 게 없는 역사적 인물이나 유명인사의 자살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평상인의 몇 배가 된다고 합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공백과 정신의 혼수상태는 예수만이 해답입니다.
성도여러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가여운 우리들의 영혼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말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리스도께만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구원은 몸을 버리면서 시작되는 영생구원뿐 아니라 이제 육체로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역사하는 주님의 권세요, 능력이 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저와 여러분은 이제 스스로의 몫으로 진 십자가를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들은 말씀처럼 그것은 곧 다가올 소망과 좋은 날들이 고통이라는 겉옷을 입고 잠시 찾아온 귀한 손님인 것을 바로 봐야 합니다. 손님은 결국 떠납니다. 눌러사는 손님은 없습니다. 피하지 말고 눈을 바로 보세요. 닥친 문제의 핵심을 바로보고 성실정직하게 응대하면 반드시 불행과 아픔이라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안에 감춰져 있던 기쁨의 새날이 열릴 것입니다. 말씀이 권세요, 능력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오늘 십자가 구원의 능력이 임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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