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 주일예배<출4:24~26. 언약의 증표, 할례>
모세는 가족과 함께 애급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큰일을 앞둔 모세를 길 가는 중 숙소에서 죽이려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상태가 위중합니다. 십보라는 남편을 잃지 않기 위해 그동안 고집해 왔던 율법 중 할례를 속히 양보하여 출발 직전에 낳은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양피를 벰으로 남편 모세의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모세는 선민으로서의 당연히 지킬 생후 8일 만의 할례에 부부가 합의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를 쥐고 애급으로 향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계약의 기초조차 이뤄지지 않은 매우 불손한 일이며 불행한 출발이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미디안제사장의 딸로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그 증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아들을 낳으면 8일 만에 할례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일이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그 갓난것의 몸에 피를 흘리며 고통을 주냐는 겁니다. 그래서 갓 낳은 아들의 포피를 베지 않은 채 함께 출발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여기서 할례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의 여부입니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사명을 받은 자가 부부의 신앙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청산해야 할 불순종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할례입니다. 그러함에도 위대한 사역 앞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생명을 볼모로 잡으며 원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 가정이 하나가 되는 순종입니다.
가정이 하나 되는 것은 먼저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이며 다음엔 부모와 자녀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할례의식을 두고 이방인 아내 십보라와 모세는 평소 서로 다른 신앙의 견해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부부가 몸만 하나가 돼 아이낳고 살아도 다른 것에서 일치되지 않아 불행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모두 하나되라고 하십니다. 거기 행복의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할례가 못마땅했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냐는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할례에 대해 견고한 언약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출발에 앞서 낳은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할례를 생략하고 떠나게 됩니다. 아마 하나님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으셨다면 엘리에셀은 율법을 어긴 무할례자로 평생을 지냈을 것입니다.
다음, 하나님 앞에 모세를 죽이고서라도 지켜져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창17:14절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라.”
2. 언약의 실행과 성취입니다.
할례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약속의 기초가 되는 증표요, 명령이었습니다. 창17:14절의 명령을 통해 할례는 당시 으뜸가는 언약증서의 조인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할례는 생명을 건 약속의 증표였고 이에 모세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할례가 몸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증표한다면 오늘날 세례는 물로 몸 전체를 씻어 과거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거듭난다는 중생의 의미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끊어내는 할례의 피 예식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신 흘리신 피를 통과함으로 씻어내는 성결예식, 곧 세례로 바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의 끊어냄이나 세례의 씻어냄이나 그 피와 물의 예식이 한결같이 죄에게 노예였던 죽은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언약의 증표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보배 피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또한 할례자의 분명한 흔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거듭나지 못한 자를 “할례받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즉 끊어낼 것을 반드시 끊어냄으로 언약이 실행된다는 사실을 본문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안에 무엇이 아직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모세가 범해서 죽을 뻔한 할례의 지체가 우리 안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모세는 아들의 할례를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오늘 교회들은 무엇을 자꾸 미루고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깊이 살피고 돌이켜야 합니다.
옛말에 小貪大失이란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 탐내다가 큰 걸 잃는다는 건데 우리가 삶과 신앙생활에서 끊어낼 것을 끊어내지 못하는 무할례로 인하여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자꾸 뒤로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허망한 세속의 고리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결단은 하나님의 공급이 매우 막중하고 풍성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인생들이 새롭게 거듭나는데 필요한 할례의 종류는 무수히 많습니다. 몇 개만 봅니다
나쁜 버릇 끊어내는 습관의 할례, 사물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위한 시각의 할례, 부드럽게 말하고 먼저 사과하는 겸온과 입술의 할례,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는 고집의 할례, 모든 공적에 내 이름을 지워버리는 자기영광의 할례,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생각하기 전에 엎드리는 무릎의 할례, 등 많은 할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들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성령세례로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할례로 비견되는 오늘날의 성령세례와 그리스도의 보혈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본문에서 모세가 죽음의 위기를 무엇으로 면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까? 할례의 피였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에 이르는 것과 이생과 내세의 모든 평강의 보장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흘리신 피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 피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죄를 잘라내고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는 거룩한 어린 양의 보혈입니다.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져 죽음을 면한 것도,
죄용서는 피 흘림이 없이 불가능(히9:22)했기 때문입니다.
3. 피로 청산해야 할 죄 문제입니다.
십보라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소이다.”였습니다. 즉 피로 값주고 산 남편이란 뜻입니다. 그렇게도 피 흘리기를 꺼렸던 이방 여인 십보라가 남편의 죽음현장에서 깨달은 것은 피로 세운 하나님과 언약은 생명을 건 엄위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피 묻은 양피를 던지며 하는 말이 “피로 사들인 남편”이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 이제 당신의 언약대로 할례의 피를 드리니 내 남편을 용서하시고 살려주십시오.”라는 탄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언약을 어긴 죄 앞에 죄의 값인(代價) 피를 드리자 모세가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에덴에서 불순종한 아담이 짐승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그 가죽으로 앞을 가려 수치를 면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죽은 영들이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살아나서 하나님을 믿고 그 영원한 생명에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 안에 모든 생명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거기서 주님이 대신 죽은 증표가 보혈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우리들의 거듭남은 피로 인한 언약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릴 대신하여 죽어주신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 영적이며 역사적 실제 사실 앞에 인생의 모든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전인격적 도전과 고찰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주어진 육신의 짧은 세월을 주소도 모른 채 여기저기 돌처럼 굴러다닐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무렇게나 육체를 따라 살다가 늙어 죽기에는 그 안에 너무나도 고결하고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인생입니다.
사경을 헤매는 모세의 발 앞에 아들의 피 묻은 포피 조각이 던져졌습니다. 모세가 주장하는 율법을 인간의 문화와 관습으로 여겨 받지 않았던 십보라의 항복선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선 하나님을 떠난 불신의 죄인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예수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극명하게 증명하는 십자가에 예수께서 올라가신 겁니다. 지난날의 모든 허물을 덮는 예수보혈, 창조주가 인간을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증거의 표상(表象) 십자가 보혈, 오늘 피냄새가 나는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끝으로 오래전 들은 할례에 관련된 팁을 확인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할례는 그 언약의 서명(sign)을 왜 남자 성기의 끝에 해야 했나? 하루에 몇 번은 보며 만지며 확인되는 언약 조인의 싸인, 그 확인된 언약이 씨를 가진 남자의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씨를 주고받을 때 피차 거룩한 백성의 태동과 하나 되는 화목의 기쁨이 약속의 조인(調印)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이에서 벗어나 그것이 단순한 몸으로 변질되면 짐승 나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확인하는 기쁨이 짐승의 그것과 뒤엉키는 세상은 그래서 불행합니다.
누가 말했습니다. 나도 내가 싫은데 누가 날 좋아할까? 그래요. 우리 모두 다시 태어나기 원합니다.
거듭남에 필요한 여러 할례를 그 보혈에 의지하여 결단하면 죽음을 이기신 주의 권세 우릴 통해 선포되고 실현될 줄 압니다. 이 보혈 이 약속 붙들고 육신을 벗는 그 날까지 고귀한 믿음 잘 지켜 영원한 생명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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