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2.주일예배<사53:4-6. 죄의 해결>
사람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좋은 직업과 훌륭한 인격을 지녀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갖고 동의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깊이 분석하면 어렵지 않게 역시 인생은 죄 가운데 깊이 묻혀있는 존재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젖먹이를 보면 압니다. 좋으면 신뢰하고 싫으면 멀리하다가 철이 들면 대처하는 방법을 익히고 자신이 누군지 서서히 알아갑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러나 죽기까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손익을 계산하는데 익숙해질 뿐입니다. 도덕과 윤리는 그것을 더욱 깊은 데로 인도해 내면의 부끄러운 본성을 적절히 억제하는 강제를 체질화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른바 인격화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인격화해도 그 본성은 항상 자기라는 주체가 사라지지 않아 기준점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계리 계산하는 동물, 선악과의 생명체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를 시14편에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나사렛 마을에 뭐 선한 게 나오겠냐던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한 말은 “와 보라”였습니다. 자기에게 오는 그에게 하신 말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인간 안에는 물론 선도 있지만 대부분 죄악으로 차 있고 선이라고 하는 것들도 영악한 것이어서 철저한 계산속에 교묘히 위장하고 있습니다. 또 있다 해도 잠시뿐 위급하고 악한 상황이 닥쳐오면 본성으로 돌아가 자기보호에 충실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어버이의 마음, 즉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갖는 마음 외에 이른바, 절대적 선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한 선은 십자가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사건을 인간의 사고와 정서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 낯선 이스라엘 청년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개개인의 영혼에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건은 납득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이 열어줘야 감동하게 되는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일시에 해결하시는 하나님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입니다. 검은 피부가 유전되고, 에이즈보균 산모가 에이즈걸린 아기를 낳아 몇 년 살다가 슬프게 떠나듯 우리는 범죄에 오염된 채 죄인으로 태어난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안타깝지만 에덴동산에서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그 일로 우리가 죄인의 성향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불행한 출발입니다. 마치 흑인으로 태어난 아이처럼 한과 눈물을 품고 태어난 생명들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떤 흑인 혼혈 아이하나가 냇가에서 돌로 손을 너무 문질러 피가 나는 걸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늘 우울했습니다. 우리는 철없이 아이노꾸라고 놀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 안에 죄의 정체부터 알고 싶지 않습니까?
에덴에서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만 하였지 그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녕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러신 것이지 죽는 건 아니니 먹어도 된다고 유혹하였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깁니다.
명령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토록 죽을죄라고는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가 손상을 입은 것입니다.
선악과의 명령이 설명되진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지켜져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더 신뢰했다는 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내 아버지 말씀보다 이웃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겁니다. 죄는 신뢰가 깨어질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신뢰가 있는 곳엔 죄가 없으니 경찰도 재판도 없습니다.
믿지 못하니까 증서받고 보증을 요구합니다. 신뢰가 있는 곳엔 평화와 사랑과 희락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 일어난 에덴의 실수는 어떤 방법으로든 회복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이 죄의 문제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인간 안에 깊이 박혀 있는 하나님 불신의 문제였습니다.
이제 방법을 봅니다. 세상에 답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신뢰를 잃어서 생긴 문제는 신뢰를 회복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단의 말보다 더 믿었던 불신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으니 이젠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떠납니다.
불신이 떠나면 즉시 주어지는 것이 관계회복에 따른 화목입니다. 화평입니다. 기쁨입니다. 모든 기능의 정상회복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도록 하는가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상태의 불신세상은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고 질문하거나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고민은커녕 답을 갖고 찾아온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난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난제는 없습니다. 다만 죄인 사랑으로 아파하실 뿐입니다. 한번은 물로도 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는 근원적인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스도는 인생들의 모든 질고를 대신 짊어져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1:11~12절에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성경은 우리의 회복과 평화와 풍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때문에 얻어진 은혜, 곧 선물임을 증언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우리 죄를 감당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구원받을 근거를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행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온통 증거를 요구합니다.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어” “증거를 보여 달란 말입니다. 분명한 증거를..”
믿을만한 증거가 눈앞에 있어서 믿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죄를 씻기에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마련하신 것이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넘어선 곳에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매우 특별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이치로 따져 믿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늘에서 열어주는 계시의 능력과 갈급하는 마음으로 열립니다.
인간의 머리와 가슴 그 범주 안에서 이해되고 증거되는 십자가라면 그것은 하늘의 사건이 아니라 땅의 역사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받기 어렵고 도덕과 윤리체계 안에서 풀리지 않는 사건으로 믿음으로만 그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신앙은 신령한 계시의 사건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한다면 나를 불신해서 믿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제단도 쌓지 못하는 너희들,
이렇게 너희를 위해 죽는다면 믿겠는가?
정리합니다.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서 늘 기억하시는 진리와 생명되기 바랍니다.
1. 불신의 죄는 신뢰라는 믿음을 심어줌으로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2. 믿음은 이해나 분석 즉 선악과를 뛰어넘는 전적인 신뢰 생명과에서 출발합니다.
3. 십자가의 사건은 이성이나 상식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며 믿어드림으로 신뢰로 인한 구원이 이뤄지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4.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영생의 길로 인도됩니다.
오늘 받은 진리 복음이 여러분 평생에 예수의 능력이 되어 늘 함께 하시기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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