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오는 窓가에서

2021 비오는 窓가 작업창(외부손님출입정중사절^^)11-13

by 설렘심목 2021. 8. 13.

2011.01.11. 화요.

주께서 우리에게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어찌하면 네가 행복하겠느냐?” 하실 때

우리가 주께 올리는 말씀은 아버지, 무엇을 어찌해야 주님이 기뻐하시겠나이까? 무엇을 드리리까?”

그 변함없는 고백으로 우리의 삶은 가득해야 하리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간절히 원하옵기는 주여,

종의 손에서 좋은 것들이 누구에겐가 받으면서가 아니라

주고로 마무리되게 하소서. 아멘

 

2011.02.25. 금요일.

베토벤 바이올린 D, 가슴에 절절히 녹아드는 감동.

너무 아름다워 섧지 않은 설음이 아스라이 밀려온다.

가녀린 어깨를 후득이며 생의 환희로 떨던 어린 날들,

그 투명한 날들이 다가온다. 때 묻지 않았던 날의 잔상이여.

바순과 바이올린의 대화 속에 베토벤의 고통과 기쁨이 일렁인다.

 

*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여. 열 고을 권세를 주리라.

* 작은 것에 감사 감동하는 자여.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 모든 고통은 나의 결과요, 복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배웠으나

지혜를 바로 구하고 바로 사용하는 자는 많지 않다.

지혜가 있으면 함정도 기회가 되어 승리하지만

지혜가 없다면 모처럼의 기회도 함정이 될 것이다.

 

2011.03.09.수요.

못마땅한 제자의 모습에서 자신을 봐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도 못마땅한 자신을 보라고 주시는 기회를

안타깝게도 우리는 종종 분노로 놓치고 만다.

 

좋은 말을 아무리 해줘도 깨닫는 것은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언한 뒤 기다려 줘야 한다.

 

2011.03.13. 주일

일본 동북부지방에 진도 9.0 리히터규모의 큰 지진이 쓰나미와 함께 발생,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게 막혀 피해규모도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빌딩과 거리와 고가도로가 통째로 넘어가고

집더미와 차량과 선박이 쓰레기처럼 해일에 밀려 지축이 말리듯 감겨 들어오는 장면이 끔찍하다.

자연의 재해 앞에 바람에 날아가는 낙엽 같은 인생살이를 눈으로 본다.

나이 들고 세월 갈수록 절절히 느끼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천국을 소망치 못한다면 한 치 앞을 모르는 여기서 어찌 살아가냐는 것이다.


2011.03.25.금요.

문제는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답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였다

문제가 답으로부터 출발했으니 인생의 원인과 과정과 결국이 하나님이시라.

잊지 말라.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의 언행은,

한결같이 갈등과 어두움으로 향하니

"그러므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13-

 

2011.04.18. 월요. 가벼운 봄비.

어떤 향과 어떤 색으로 태어나는가?” 꽃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본디 부족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늘 어쩔 수가 없었다.

열등감과 수치로 인하여 아팠고 그것이 고쳐지는 데는 항상 한계를 느꼈다.

그런데 그 부족으로 인하여 더욱 자신을 돌아보고 절대자를 사모하며

끝내 하나님의 방문을 받았다면 그는 최상의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내 허물진 됨됨이로 인하여 숱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부족해도 내 하나님으로 인해 누가 뭐래도 명품인생,

최상의 삶으로 그 말할 수 없는 영혼과 삶의 희열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다.

주변은 나를 모른다. 심지어 가족도 나를 다 알 수는 없다.

주님만이 내가 명품인생인 줄 아신다.

나는 명품이 아니어도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내 평생이 명품이다.

명품인생이 되는 데 연단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사람은 아는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 감동하면 다소 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고통 중 상처가 생기면 상처만큼의 변화는 가능하다.

내 젊은 날, 내가 날 만났더라면 이렇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고통을 피하지 말라. 고통을 차라리 기뻐하고 즐기거라.

네 곁을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쟁기가 네 마음 밭을 쉬지 않고 갈아엎도록 하라.

모든 길이 처음부터 잘 닦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네 심령 안에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을 것이다.

오직 지금 네 곁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통 없이 풍요 속에 방치된 인간은 가장 비천한 짐승이 될 것이다.”

 

2011.04.20.

내 어린 시절은 성경이 없어서 고생했고,

철든 후로는 성경을 지키지 못해 고생한 날들이었다.

이제 노후는 67번째의 작은 성경 하나를 써 내려가야 하는 소중한 날이어야 한다.

노후대책은 경제자립도와 아울러 그보다 더 중차대한 내면을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뼈를 깎는 외로움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서운함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모두 내려놓되, 포기할 줄 모르는 꿈이 있어야 한다.

과거의 잔상을 아쉬워해선 안 된다.

미련을 갖는 모든 것은 노령에 무서운 적이 되어 찾아온다.

다 떨어낼 줄 아는 말끔한 노신사를 소망한다면

아직도 뇌세포가 성성할 때 굳게 다지고 또 다지자.

그래도 치매와 중풍과 당뇨와 암과 알 수 없는 덫은 수없이 많아

여전히 인생은 매설도 없는 지뢰밭인 것을 어쩌랴.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끝까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외에 무슨 대책이 있단 말인가?

 

2011.05.09.월요.오전 열풍.

어떤 일에서 사람을 두고 괘씸하게 여겨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불쌍히 여겨 용서하고 도와줄 것인가에 따라

인격의 발현은 크게 달라진다.

하나님은 우릴 끝내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자까지도 용서하시고 품으신다.

그 내막을 모두 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마저 괘씸히 여기는 부분은 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거듭 밝히는 우상숭배다.

교회는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문제만 아니면 모두 불쌍히 여겨야 마땅하다.

진정 거룩한 대인이 되길 원한다면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품어주고

그 눈물을 닦아 주는 일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나는 나의 평온함에서가 아니라,

나의 불행과 고통 속에서 나를 새롭게 빚어 가시는 주님의 손을 보기 시작했다.

 

2011.05.20.금요. 한두 차례 비 오고 흐림.

선하고 좋은 모든 결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모든 악과 불행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세상 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그 나라 갈 때,

내려놓는 모든 짐은 다 자신의 작품인 것을 알리라. 그래서, 그때는,

하나님이 주셨고 소원하셨던 믿음 하나 붙잡고 영원히 죽지 않는 거룩한 나라로,

구차한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떠나간 육체의 좋았던 감각조차 아쉬움 없이

참으로 개운하게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2011.06.12.주일.

어제 토요일 밤 1050분경,

라인집사가 굳모닝병원 중환자실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슬프지 않을 것이다.

좋은 세상으로 불러주신 주님을 지금쯤 찬송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리라.

목요일 그의 작은 방을 깨끗하게 치워주고 또 부엌에 설거지를 말끔히 한 뒤

금요일은 서울에 있는 보라매병원에 가서 입원 중인 모친을 뵙고 왔다.

그리고 주일 준비에 여유 없어 늦게 연락하니 전화기가 꺼져 있다.

온몸에 통증이 와서 견디기 어려워지자 스스로 119에 전화하여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간 뒤

두어 시간 만에 떠난 것이다.

그렇게 빨리 갈 줄 알았다면 물 한 모금이라도 입에 넣어주고 올 걸,

서럽게 울음이 나왔다.

주님, 내 평생 다시 이러한 아름다운 히브리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를 알코올 중독자라 비난해도 그의 아픔 누가 알리요?

 

당뇨병 환자인 아내가 아이를 낳자마자

한 달 안에 모두 선천성 소아 당뇨로 인큐베이터 속에서 연거푸 셋이나 죽어간 후에

아내는 절망하여 퉁퉁 부은 몸으로 가출했고 그는 술을 먹기 시작했다.

만취한 상태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고 공손히 말하는 사람,

남에게 줄 건 다 줘도 받지 못하는 사람,

그는 진정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고운 사람이었다.

너무나 희고 또 희어서 더러운 세상을 담을 수 없는 사람,

그가 그리도 떠나고 싶었던 이 땅을 드디어 떠났다.

주님이 그 소원을 들으셔서 불러주셨다.

그의 지갑 안에 1만원권 지폐 한 장과 동전 4,960원이 남아 있었다.

옥집사의 이름으로 마지막 감사헌금을 드렸다.

봉투에 내가 그의 마음으로 적었다.

주님, 고통에서 놓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설음과 외로움이 없고 아픔 없는 곳으로 불러주시니 주여, 감사합니다.

특별히 마지막으로 감사 헌금하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라인옥드림-”

 

2011.07.28.목요.

서울엔 엄청난 폭우로 사망 등 피해가 속출했는데

평택엔 빗소리와 통복천에 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하다.

비를 좋아해도 수재민들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

80년대 초 방화동 지하실에서 비만 오면 이불이 젖고 자던 방의 물을 퍼내던 일,

비전동 예배당에 함지박을 놓고 밤새 퍼내던 일이 떠오른다.

이 시간도 수많은 저지대 서민들이 물난리로 생명과 둥지를 잃는다.

왜 매년 물난리가 나는 거기 사냐고 말하면 안 된다.

거기 살고 싶어 사는 사람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이웃의 고통을 너무 쉽게 말해 버린다.

 

악한 전교조와 민노총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해 김정일체제를 옹호하여

어떤 지도자가 이끌어도 외세가 한반도에서 물러나가고 민족이 하나 되어 통일을 이루는 게 마땅하다고 여긴다.

잘못된 생각이 굳어져 고착되면 그것은 종교 같은 힘을 갖는다.

급진좌파는 파괴적 단결력으로 밤새워 일한다.

세상의 마지막 정의를 지켜야 하는 소망과 기대가 오직 예수뿐이라면 목사들이 일어나야 한다.

악한 시대에 등대 같은 김성욱기자가 다른 곳도 아닌 목회자 대상 강의에서 세 번이나 끌어 내려졌다는 말에 맥이 빠졌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흰돌산 수양관 행사 중 식사하러 가다가 두 번이나 그와 마주쳐 악수하고 격려해 주었다.

 

2011. 08. 15. 내 보물, 주의 귀한 여종 다나 33번째 생일

TV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잠시 보는데 만세삼창(萬歲三唱)의 감동으로 콧날이 시큰댄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동안 내가 치를 영적 전투의 대상, 주적(主敵)은 공산주의다.

 

정직한 청년이 매월 240만 원씩 안 먹고 안 쓰고 30년을 저축해도 손에 못 쥘 거액을

축구를 잘해 1년 연봉으로 받고 미녀를 아내로 맞는 현실에서,

300만 원이 없어 어린 자녀를 양팔에 안고 11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엄마의 눈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였을까?

그렇다. 지옥이다. 부조리다. 불평등이다. 모순이다.

온통 불신과 외면과 무관심과 이기심과 그리고 마귀의 굶주린 아가리들뿐이었을 것이다.

자생 좌파는 그렇게 울분 속에서 평등을 사모하다가

어느 날 더러운 부자를 노려보며 태어난다.

그러므로 보수우익은 반드시 한쪽에서 힘없이 늘어져 있는 퀭한 눈망울을 살펴야 한다.

, 이제 누가 저 가난한 자의 눈물을 대신 소리치랴?

누가 저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 되어 소리쳐 울부짖을 것인가?

 

오래전 부패한 이스라엘에서 소명 받은 선지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충동으로 외쳤다. “슬프고 아프다.”

머리를 하늘로 치켜든 자라면 마땅히 이제 슬퍼야 하고 아파야 한다.

애곡(哀哭)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도자도, 선포자도, 선지자도 아니다.

그는 다만 삯꾼일 뿐이다.

품삯만 받고 앵무새처럼 뇌까리는 양심의 몰염치가 아픔 돼 그를 괴롭힐지니

그의 이름은 수치. 광복절 설교에서 간곡히 전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고 무관심은 이기심이요,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로서 뻔뻔스러운 무임승차요, 범죄.”라고.

이 땅의 소망은 오직 眞善美의 결정체신 예수그리스도뿐이다.

唯物, 無神論 공산주의 종북 일당들이 아무리 소리쳐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우리나라를 保佑하사 제사장 나라로 이끌어 가신다.

 

2011.11.25.

영은 육을 소원하고 육은 영을 소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시기 기뻐하시는데

우리에게 거룩한 영이 안 계시면 짐승만도 못하여 성령의 교통을 원하나 악한 육체가 방해한다.

하늘 공중에는 양전기(+)가 흐른다. 땅에는 음전기(-)가 흐른다.

하늘에선 영의 만나가 내려오고 땅에서는 육신의 양식이 쉬지 않고 올라온다.

육신은 흙에서 와 살아남기 위해 강렬한 욕구를 지녀 그게 분깃을 지나쳐 죄악으로 간다.

영은 육체가 아니니 먹고 누울 이유가 없어서 얼마든지 죄와 무관할 수 있으나

육체를 입고 활동해야 할 때 여전히 죄의 문제와 다투게 된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죄는 그것을 입으로 말할 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된다.

날개를 단 죄는 활개를 치고 인생을 망치려 든다.

흙에서 시작한 죄는 그래서 인간을 속히 땅으로 데려와 흙에 묻어 버린다.

죄가 바라는 것은 사망이다. 죄의 어미는 흙이다.

인간은 몸을 지녀서 죄를 피할 수 없다.

육신을 흙으로 돌린 후에나 비로소 죄와 무관하게 된다.

이러한 죄의 육신을 영의 소관 아래 두어 영의 통치를 받게 하려면

인간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붙잡히지 않으면 안 된다.

강력한 사랑의 능력인 성령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인간은 상당부분 죄의 몸에서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에 뵈는 많은 육체의 즐거움이 끊임없이 끌어내려 유혹한다.

경건과 세속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간격이 있을 뿐이다.

맛있게 먹는 식욕은 축복의 산물이지만 절제 없이 먹어대면 만병의 원인이다.

부부간의 雲雨之情은 생명의 출발이지만 잘못된 길에서 즐거우면 패착(敗着)이다.

죄가 아직 힘을 얻지 못하고 내면에서 툴툴댈 때

거룩한 영의 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어야 하고 결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감히 죄악의 생각이 심연 깊은 곳에 뿌리박지 못하고

선포기관이며 인격의 선언장인 입술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면세계의 사법기관인 양심을 십분 활용해서 자기 양심이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부추겨야 한다.

그러나 양심, 그것은 종종

악한 환경과 악한 세속관습에 기가 죽어 미세한 음성조차 내지 못하고 움츠려 있는 경우가 있다.

양심에 힘을 실어주는 일은 양서를 읽거나 좋은 충고를 듣는 것 외에

성령을 모시는 일로서 충분하다.

성령이 살아계신 말씀으로 활동할 때 속히 붙잡아야 한다.

성령을 초청하고 영접하는 일만큼 자신에 대한 성실은 없다.

자신에 대한 성실은 가정과 나라와 세계에 대한 성실이요, 하나님을 향한 성실이다.

주여, 종에게 오소서. 날마다 순간마다 오소서, 후손에게 오소서. 아멘.

 

주여! 내 기쁨, 내 생명, 나의 영원한 노래시여.

거칠고 어둡고 칙칙한 불행은 모두 제 어리석은 작품이었나이다.

이제 다시는 거기, 돌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다시는 다시는.

주님 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게 하소서.

 

사랑 외에. 길이 없어

사랑하겠나이다.

사랑 가운데 임하시는 주여.

이 몸 하나 죽어 삭아지면 온 교회가 살아나는 줄 아나이다.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이 오늘

십자가를 메는 고통 가운데

주신 감동 그 기쁨 잃지 않게 하소서.

 

주여. 주는 사랑이십니다.

주여, 주는 사랑이십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님, 주신 오늘 하루, 제가 무슨 일을 어찌해서

우리 비전교회와 그 주변부터 밝고 바르게 하리까?

주의 선하신 일에 쓰임 받기 원합니다.

저는 비록 힘들어도 교회와 주변이 저를 통해 행복해한다면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제 감동입니다.

정녕 이제는 주님 주시는 감동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 주여.


2012.04.13.금요.

인간들은 욕심에 가려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은 꾸준히 식어간다.

그리고 내 손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에 대한 소중함에 소홀했던 자신을 보게 된다.

17년째 타고 있어도 그 차가 내게는 궁전임을 고백하던 얼마 전의 내 낮은 마음을

어떤 부요(富饒)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금요기도회를 열었다.

주님이 기뻐하신다.

손톱 하나가 성한 것으로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주시는 복을 잘 받는 일은 복을 비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풍성하신 주님은 인생 모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족히 부어주신다.

그러함에도 가난하고 불행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는 구조적, 생태적 결함이 있어서다.

그것은 제어하지 못하는 욕심이다.

그렇게 분깃을 넘어선 욕심들이 만나 부딪히며 불행해진다.

이런 부조리를 깨부수고 완벽하게 조절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라면

어떤 불행도 원망과 한숨 대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의뢰해야 한다.

눈물겨운 감동의 찬양으로 높이 올려드려야 한다.

 

2012.04.19.

4억 대 1의 대단한 경쟁에서 승리한 정자 하나가 난자를 만나 하나가 되어 시작된

세포분열과 확산은 피할 수 없는 내리 물림, DNA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을 따라

모태에서 생명이 된다.

엄마 젖을 물면서 시작된, 거저 받은 공급과 배려와 보호 속에

한 인격을 갖춘 인간이 되기까지 많은 요인이 성품과 기질과 성향을 형성한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인간 안에 얼마나 많은 도움의 손길이 생명의 잔을 채워 왔는지 가늠키 어렵다.

한 인격이 다듬어지기까지 많은 좌절과 아픔과 눈물의 강을 지나

하나님의 채우심과 고치심이 교차한다.

인생의 행불행은 결국 한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속히 알고

그 뜻을 이루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맞추어 갈 때 가장 복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정자가 인간이 되기까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밖으로 밀려 나오는 일뿐이었다.

그 손은 생명을 여는 손이고 사랑의 손이시다. 아멘.

 

하나님 외 모든 것은 다 가변유동적(可變流動的)이다.

언제 어디서 어찌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떠나든 남겨지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뿐이다.

 

2012.05.01.

농심(農心)은 씨를 심는 마음인데 어떤 농심도 씨를 심는 데서 멈추지는 않는다.

올라오는 새싹을 보며 기뻐하고 잘 가꾸며

아직 달리지 않은 열매와 과실을 희망의 눈으로 보며 땀 흘리기를 즐거워한다.

사과 씨를 손에 쥐면 사과농장이 선하게 보여야 그게 믿음이다.

우리교회와 아들이 이룰 가정과 시,레온, 솔온을 생각하면

그냥 기쁘고 위대한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들의 활동과 열매들이 보이는 듯하다.

내 노년을 아름답게 하실 주님을 끝없이 찬양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라. 아멘.

 

2012.05.10.목요.

늙을수록 잊지말라. 세 번 이상 청하기 전에는 가지 마라. 인사로 하는 말이니까.

밥을 샀으면 서둘러 자리를 떠라. 손님과 노인은 언제나 뒤통수가 예쁘다.

이야기도 간청할 때만 하고 힘들었던 과거사는 되도록 하지 마라.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2012.05.22.화요.

외로움에 이리저리 밀려

도심의 부평초로 떠돌던

많은 아스팔트 집시 가운데 나도 있었다.

갈증으로 목이 타 수척한 육신도 버거워지면 진한 알코올에 팽개쳐진,

그렇게 그렇게 피 같은 젊음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땅은 온통 문제제기(問題提起), 답은 하늘임을 알기까지, ...

얼마나 많은 값을 지불해야만 했던가?

삶의 맨 끝에선 그렇게 사랑과 죽음이 답을 들고 있었다.

어깨 위 쌓인 눈을 털며 들던 주막(酒幕) 안에서

답을 몰라 헤매던 날들이여.

, 이젠 말할 수 있다.

라보니여, 당신은,

내 시작이며 길이요, 결국이 되시고 내 모두요, 설렘이시며,

내가 부를 마지막 내 노래가 아니십니까? 아멘.

 

외로움에 치를 떨던 청년의 야윈 어깨 위로 나의 영원한 생명이요, 랍비요,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양털 고운 저고리를 덮어주신다.

누구라 감히 그를 말할 손가?

40년이 지난 오늘 비로소 고백하는 길잃은 사슴의 노래여. only jesus!!!

 

2012.06.02.토요일. 맑음.

내 안에 무엇이 담겼는가?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면 표현이고 고백이고 선포라 했던가?

한 줌의 재로 변할 내 육체 안에 담긴 너무나 황홀한 세계도 내 것은 아니라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 무엇을 찾아 헤매던 날들.

진정한 의미의 진, 그리고 선과 미는.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내 곁에 우뚝 서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그는

!

..사랑..

사랑이 아닌가

사랑이신 예수..

오직 사랑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아직도 다 전하지 못한 사랑의 편지를

우리는 남은 생애를 통해

꼭 쓰고야 말리란 결단에

봄 가고 가을 오면

어느새

낙엽 뒹구는 신작로.

말릴 틈도 없이 그날이 와

, 거기서 말하리.

은혜에 밀려서

예까지 왔노라.

아멘.

 

2012.06.25.

주께서 베푸신 은혜는 완전이다. 더 무엇을 구하리오?

하늘의 신령한 것은 믿음 가운데 영으로 넘치고 땅의 기름진 것, 눈과 마음에 가득하다.

거북하고 부끄러운 것은 남김없이 나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 부족을 통해 주님은 항상 내게 말씀과 다정한 손끝으로 다가오셨으니

주의 존전(尊前)에 불만족은 무지와 불신앙이라.

 

2012.07.10.화요. 때 이른 무더위.

진정한 의미의 실수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부족의 유일한 대안은 정직이다.

보통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흔치 않으니 끝없는 욕심으로 인생들은 항상 목말라 허덕인다.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것으로 만족할 뿐 아니라 늘 감사하며 누군가 돕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이 세상에서 最上1임을 깨닫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항상 빚진 마음으로 작은 차를 타고

누룽지에 열무김치 맛있게 먹으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현하게 된다.

 

훌륭한 목사가 되고 싶다.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런 후에 작은 차를 타면서 겸허하고 담백하게 살고 싶다.

진정한 noblesse obliges를 후손들에게 보여 본이 되고 싶다.

 

2012.07.16.월요. 흐림. 장맛비 소강상태.

토요일 1층 화장실 두 군데를 말끔히 청소하고 물파이프도 갈았는데 새 화장실이 되었다.

비좁아 허리 숙여 구석구석 문질러 녹 자국도 지우면서 기도했다.

아버지. 이렇게 정성껏 닦사오니 속히 교회의 길을 열어주소서.”

성도들의 마음 깊은 곳 묵은 상처와 고름 자국과 녹슨 지혜와 열등감의 군더더기를

이렇게 말끔하게 닦아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일을 마치고 올라오는 계단에서 불현듯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서운하고 답답하고 후회스럽고 안타까우며 외롭고 서러운 모든 것들,

다 안고 천국까지 가리라.

거기까지 참고 가면 천국에서 모두 잘 참은 인내로 상급이 될 줄 믿는 믿음이 올라왔다.

그래. 모두 짊어지고 말없이 가는 거다. 누가 뭐래도 주님은 보셨고 들으셨고 아신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고 용서해 주셨다.

인생은 나만큼 사는 것이다.

내 함량만큼 사는 것이다.

모든 아픔과 슬픔의 보따리도 알뜰히 품고 천국까지 가리라.

잘 참고 짊어진 그 보따리의 크기만큼이나 상급의 보따리도 크리라.

 

2012.11.13.

죄범의 유혹이나 그로 인한 불행의 대부분은 사실 자신이 빗장을 열어준 것들이다.

설령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불행일지라도

그 불행은 마주하는 자신의 정신자세에 따라서는 도리어 행복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2012.11.27.

결국 내 인생이란 게 내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나는 많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감사하고 기뻐하고

여전히 주의 인도하심을 알고 놀라며 감동하는 신앙체질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티시 히노사(Tish Hinojosa)가 부른 돈데보이(Donde Voy)

멕시칸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며

사막에서 이슬처럼 스러져 갔는가를 알게 한다.

미국과 멕시코는 그 사이가 한반도의 5배 정도의 사막이다.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의 꿈을 버리지 않는 멕시칸의 애환을 담은 노래, 돈데 보이.

세상은 육체가 있어서 덫이고 육체가 있어서 기쁘다, 그렇다. 육체가 있어서 끊임없이 아프다.

인생은 모두 사막을 가는 나그네들. 나남없이 어디론가 열심히 가고 있다.

오로라도, 오아시스도 잠시 스치는 신기루일 뿐.

주변 모든 것이 나를 떠난다는 엄위한 사실은 깨달아야 보이는 실상들,

그간 얼마나 속으면서 허우적이었던가? 그리고,

육체가 있는 한 꾸준하게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사막들,

아메리칸 드림으로 지나야 하는 거대한 사막은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갈까?

잠시 지나는 육체의 아메리칸드림도 희생이 필요한데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랴?

희생이란 막힌 것을 형통하게 하는 마땅한 값이요, 화목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통치와 교통을 끌어내는

값진 최고의 헌신이며 paradise Dream의 속전(贖錢)이다.

 

모과처럼 삭아가며 향내 나는 인생이어야 한다.

유추프라카치아는 아주 적은 빛과 물로 살아가는 연약한 아프리카의 전설적인 음지식물인데

한번 건들면 죽어버리지만 반복해서 건들면

그걸 정겨운 스킨쉽으로 받아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우리 모두 알고 보면 다 유추프라카치아와 다를 게 없다.

부모형제도 대신 죽어 줄 수 없는 세상,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을 꾸준하게 어루만져서,

자신은 죽고 우리는 살게 하시는 주님의 생명 안으로 깊이 빠져야 한다.

나는 삭아가도 주변을 어루만져서 되살려내는 그런 퇴비와도 같은 생명의 도우미가 되고 싶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내 안에서 계획되고 진행 중인 주의 소원을 다 이루기까지 나는 바보여도 좋고

때로는 무고한 비난이어도 무관하다.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목회 제2기를 주님이 친히 여실 줄 확신하나이다. 아멘.


2013.01.17.목요. 목회 10년에 새기는 교훈

목회자 재산관계를 밝히지 말라.

교회 개척에 목회자 개인재산 모두 넣어 투자하면 실패한다.

훈련은 여기까지. 곧 목회 제2기 시작.

개척동지와 끝까지 갈 것이다.

동지들의 신앙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각오로,

2선으로 물러섬은 겸손 아니라 비겁함이니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일선 소대장이 되리라.

생명이 있는 한, 목회는 내게 주신 유일한 길이다.

피할 수 없는 주의 음성과 약속을 잊지 말라.

금물 바다의 유영과 금 십자가와 형언하기 힘든 금빛 기쁨.

확정 선고된 죽음에서 살리신 주의 목적을 이루기까지,

지치거나 좌절하면 불신앙의 범죄로다.

기도로 주님께 먼저 고하기 전에 사람에게 묻거나 의지하지 말라.

인간을 주님 믿듯 하지 말고 주님을 인간 믿듯 하지 말라.

강대상에서는 성경만 말하고 개인감정을 가입하지 말라.

한낱 내시도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칠진대 하물며 하나님 앞에 종이 아니냐.

목숨은 주의 것이니 이미 죽은 자로서 산 자처럼 용감하라. 강건하라. 아멘.

 

특정인을 칭찬하거나 나무라지 말라.

물질에 매이면 말씀이 멀어진다. 오직 말씀을 사모하라.

보이는 형통은 말씀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솥을 덮는 솥뚜껑처럼 주의 마음에 이르면 용서치 못할 자가 없다.

스스로 충분히 감동치 못하는 말씀을 아무에게도 선포하지 말라.

겸손보다 더 위대한 권능은 없다. 함께 흘리는 눈물보다 아름다운 말은 없다.

 

아버지. 종의 허물과 부족을 종보다 더 잘 아시나이다.

약한 심장 퉁탕대어 끝내 차분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심장으로 평생을 경박한 외양이었나이다.

스승과 아비 없이 함부로 자란 성정은 방목(放牧)된 망아지의 흉한 몰골의 뿌리가 아닙니까?

숱한 밤을 괴로워 애를 써도 배냇병처럼 굳어버린 못난 인품, 누가 알리요?

몸부림쳐도 이르지 못할 것 앞에 멈춤 없는 그 아픔과 눈물을 당신은 아시나이다.

사람은 조롱하고 업신여겨도 주님은 오늘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품어주신 내 생명의 노래시여,

변변치 못한 자에게 과한 영광과 길을 보이시고 친히 이끌어주셨으니 그 넘치는 은총 앞에 이제 무슨 말을 한답니까? 육신이 있는 그 날까지 종은 멈추지 않는 주의 사랑 감당할 길 없어 등불 되신 주님만 바라며 묵묵히 가겠습니다. 아버지, 종을 숨겨주소서.

숨어서 글로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2013.01.26.토요.

 

세상의 모든 선이 다 모여도 구령의 앞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사랑, 그 최고의 표현은 십자가.

순종, 그 최고의 표현은 십자가.

희생, 그 최고의 표현은 십자가.

공의, 그 최고의 표현은 십자가.

 

신앙 안에는 신비가 담겨있고 신학 안에는 과학이 담겨있다.

경건을 훈련하는 신앙과 학문으로 다져가는 신학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아야 한다.

참된 신앙은 참된 신학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성숙해가야 한다.

그리고 참된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영광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회개하는 심령을 품는 기도와 눈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거기는 늘 감사하는 찬송과 기쁨이 넘쳐야 한다.

신학이 자칫 신앙을 따르지 못할 수 있음에 유의하라.

 

가정은 아기의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화음을 이루는 곳,

따뜻한 심장과 행복한 눈동자가 만나는 곳,

상함과 아픔이 싸매지고 기쁨이 모이고 슬픔이 나뉘는 곳,

어버이가 존경받고 어린이들이 사랑받는 기쁜 공동체,

조촐한 식탁일지라도 왕궁이 부럽지 않은 곳,

사랑이 무엇이며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맨 처음 학교.

서로에게 관심을 두고 그 관심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곳 이렇게 좋은 곳, 가정이다.

 

불신가정은 가정이 피눈물 나는 선교현장이요, 믿음의 가정은 불신세상이 선교현장이다.

가정이 선교지인 헌신자는 가정에서 받을 위로와 힘을 주님과 교회에서 받아야 하므로

차원 높은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을 기대해야 한다.

 

쇠똥을 흐르는 물에 씻어 소화되지 않은 옥수수알갱이를 골라 목숨을 부지하며

만주에 80여 개의 교회를 오직 눈물과 기도로 세웠던 어느 무명의 여전도사는

그에게 사생활이라곤 있을 수 없었다.

바울사도처럼 그녀에겐 주님이 보여주신 3층천과 주님이 그 삶의 모두였다.

머리가 숙여진다.

 

내가 부족하면 아내는 평생 원수요, 내가 참고 죽고 너그러우면 아내는 평생 동지다.

어린 시절 아기자기한 모임과 대화 속에

눈치 없이 늙은이가 끼어있으면 은근히 미웠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 미운 늙은이의 자리에 내가 섰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바보 늙은이가 되어 미움받는다.

밥값은 먼저 내고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한다.

손님과 늙은이는 뒷퉁수가 예쁘다는 걸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2013.02.06 수요.

하나님이란 단어를 빼고는 할 말이 없는 자 되기를 구했던 초심의 고백은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친구 없고 가까운 친지가 없어도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뭐가 필요한가?

깊은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면 황량한 들판과 낙엽 지는 거리를 거닐면서도

누구든 언제나 풍요로울 수 있다.

 

2013.02.07.

소년시절부터 나는 자기성숙을 꾀하는 자, 끊임없이 고뇌(苦惱)한다.”는 말과

행복은 고통이 지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이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리도 갈망했던 인격완성과 자기성숙이란 알고 보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모른다.

자기 정체의 근본을 버려둔 채 완성한 모든 것들은 인격을 비롯해

모두 허황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진보와 성장은 교만에 이르는 두려운 질병이 될 수 있다.

자기실존의 근본인 창조주를 배제한 어떤 덕과 의도 사실은 헛된 바벨탑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도 다정했던 외숙의 갑작스런 죽음,

자기부족의 눌림으로 간암에 죽어가던 하담의 단말마(斷末魔) 고성(高聲)도 지나간 이슬이던가?

육체가 흙일 수밖에 없으나 육체가 보석이 될 수 있음은

육체 안에 담긴 복음, 영생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하여 호흡이 있는 한 그를 찬미하며 그를 증명한다면

그 육체라는 의복도 찬미의 노래가 퍼지는 동안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걸작으로 영광중 빛나리라. 아멘.

 

2013.02.20.

아무도 어찌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복음 예수그리스도,

그분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권세가 있으셨다.

십자가에 굳이 오르신 그리스도의 주권은

주권을 포기한 가장 위대한 주권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주권이요,

명령에 순종하는 희생의 주권이었다.

 

교회가 돌아가고 빌어먹지 않는다면 그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떠난다면 목사의 부족과 허물의 증표이다.

목사 부부만큼 목회는 된다.

담임 사역도 은사요, 협동 사역도 은사인데 내 은사는 지원 사역이지 담임 사역은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전할 때는 서둘러 교단총회 유지재단에 교회재산을 등록하고 교단에서 담임을 보내면 나는 조기퇴임하여 자유롭게 목회 제2기를 맞아 본교회를 도우며 가정사역과 북한사역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나도 기쁘고 아내도 환영한다.

 

2013.02.21. 목요. 유투브의 해 뜨는 집을 배경음으로 한 베트남전쟁의 영상을 보며.

그룹 애니멀즈가 부른 "해뜨는 집"은 내가 동무들과 중학 시절에 너무 좋아했던 곡이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세상이 얼마나 꽉 막힌 것인지를 알아가며

차라리 월남전에 참가해 어서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자원하려 했던 날들,

전쟁이 얼마나 아프고 슬픈 것인지조차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철부지 시절이 엊그제인데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그 시절이 주마등 되어 만감이 부딪는다.

주검과 내 육신 사이에는 한뼘도 안되는 간격이 있고 그 가운데 절대자의 손이 있으시다.

반세기 50년간을 난 무엇을 했나?

저들이 전장에서 스러져 갈 때 내겐 무엇이 완성되었던가?

수도 없이 쓰러져간 젊은 아들들, 울부짖는 아기들.

젖먹이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엄마들,

허망한 인생이여, 부조리여.

순간의 인생이 결코 넘어서지 못할 영원,

그 영원을 향한 그리움과 염원으로 답이 안 보이는 세상을 우리가 간다.

 

얼마 전에 트윗 소개 글에 이렇게 적었다.

내 안에선 천사와 마귀가 싸우고 세상은 지옥과 천국이 공존, 한반도 온땅에 평화와 공평과 풍성과 노래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던진 돌 내게로 돌아오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값을 치른 것만이 내것. 동요.클래식.베적삼.새벽달.풍뎅이.참외서리.^^”

알고 보면 평생이 이렇듯 두 법의 싸움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일찍이 이 두 법에서 나를 구할 자 누구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주를 만나 뵐수록 한없이 비참한 내가 보이고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은

감히 우러러 쳐다보기조차 힘든 분이심을 알게 된다.

 

우리 형제 어린 날, 동네에서는 추석이나 명절 대보름에 콩클대회라는 것을 했다.

4H청년 구락부 형들이 주최했다.

일등은 주로 노래 잘하는 고자가 차지했고 상품은 쌀 양은 솥 등등 참 지난 흑백의 추억이다. 언젠가는 콩클에서 신나는 음악이 나오자 아이들이 나와 춤을 추는데

동윤이가 나와서 재미나게 춤을 추었다. 나는 놀랐다. 흥겹게 썩 잘 추었다.

몸치인 나는 그게 너무 자랑스럽고 신이 났다. 녀석은 형제 중 늘 제일 밝았다.

둘째는 한없이 착하고 사람 좋아 친구도 많았지만

셋째는 영특하고 많은 친구들과 함께 매우 지혜로웠다.

난 그날 콩클대회에서 흥겹게 춤을 추던 셋째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행복하고 자신감이 넘쳤던지 잊을 수가 없다.

힘들고 지치면 늘 그 생각이 떠올라 힘이 나곤 했다.

부모로 우울한 열등감의 어두운 터널에서 나를 빛으로 끌어내던 내 마음속의 자랑이었다.

내가 세상 떠나기 전 4형제 모두 예수님 만나 세상은 알 수가 없는 깊은 영의 세계에서

큰 소망과 기쁨을 함께 공유하며 어린 시절의 정답던 시절로 회복하는 일이

이제 나의 마지막 숙제가 되었다.

그것은 우릴 향한 주님의 소망이기도하다.

군대에서 그리도 보고 싶었던 동생들,

이제 배고프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동생들이 배만 고프지 않는다면 더 소원이 없겠단 생각에 눈시울이 젖던 군 시절,

이 어찌 맏형의 망상일까?

결혼해서는 다나가 아프지만 않아도 소원이 없겠단 생각,

이젠 동생들 사이좋게 예수만 믿으면 당장 떠나도 미련이 없겠다는 이 육신을

아버지여, 아비지여, 아버지는 아시오니 한없이 부족한 종 무슨 말을 하오리까?

 

2012.02.25. 월요. 박근혜대통령취임.

내 생애에 허락하신 모든 외로움은 세상에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라는 교훈이었고

어린 날의 배고픔은 배고픈 이들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무슨 일이나 누구를 만나도 내가 경험한 쓴 뿌리를 기억해내어

홍익(弘益)의 불을 지펴야 한다.

오늘은 박근혜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밥을 비벼먹다가 갑자기 떠올라 티비를 켰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위대한 조국 대한민국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감사를 올린다.

이제는 얼크러진 많은 것들이 회복될 것이다.

좌파 두 정권 10년에 실로 많은 손실과 퇴보였다.

그들의 노력은 헛된 주소로 보낸 비싼 소포였다.

북한세습 망나니 정권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줬다.

명박정부는 경제에 성공하고 이념에 실패했다.

박근혜정부는 지금까지의 정권과는 분명히 차별화된 줄 기도하고 기대한다.

 

2013.03.22.금요.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

나는 좀 미안했을 뿐이었는데

상대방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피눈물을 흘렸다는 걸 아는데 이리도 긴 세월이 걸렸나?

깨닫는 게 최고의 복인 줄 내가 선포하고

이제 그 깨닫는 복이 비록 고통이어도

끝내 감사와 성숙으로 나를 이끄시는 주님의 선하심인 줄 내가 알아

오늘도 깊이 돌이켜 아파하며 돌이킨다.

손톱만한 작은 일에도 절절히 아파하는 만큼 순결할 수 있다.

다 그런 거지 뭐하며 뻔뻔하게 둔감해서는 안 된다.

젊어서 내가 소원했던 늙음은 퇴빗내가 몸에서 나는 그런 인격이 아니었던가?

여기까지 오는 길에 나는 얼마나 많은 불찰과 부족으로 주변을 아프게 했을까?

그저 좀 미안하게 생각했을 뿐 무지한 가운데 스쳐온 많은 영혼과 정황은

정녕 내 허물과 죄악이었다.

죄뿐인 날 용서하시고 선으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 생명 드릴 헌신의 이유가 이렇게 넘치다니,

 

어찌 나뿐일까? 사람들은 자기부족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또 수치를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두꺼운 방어벽 안으로 숨는다.

그래도 외로워 다시 밖을 기웃거리고 살며시 나와서 움직여 보다가

또 실패해서 숨어버린다.

거듭되는 실수와 함께 많은 이들과 얽혀서 동지를 얻고 적을 살피면

어느새 성숙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있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고 명랑한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알수록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보며 더욱 드러내 활동하는 게 조심스럽다.

들어앉아 자료를 살피고 정리하면서 online으로 사람들과 교통하는 게 점점 편하게 느껴진다.

개구리가 주둥이를 처박아도 몸은 다 드러나 있듯이 칩거를 해도

이미 다 드러난 몸통의 수치들,

시간표 셋 중 둘은 지났고

남은 하나는 모세처럼 참으로 귀하고 거룩한 일에 쓰이기를 주께 소원하나이다.

이미 내겐 용기도, 욕심도, 능력도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알몸으로 온 인생,

빈손으로 갈 준비는 되어 있다.

다만 주변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도 귀한 도구가 되어 나눠주고 싶은 것이다.

 

2013.04.12.

뻔히 알면서도 너무 잘 알면서도, 그렇게도 이길 수가 없었을까?

우리 서로 이길 힘이 없었던가?”

내 임종에 방문한 ○○덕과 ○○순에게 내가 힘겹게 하는 마지막 말이다.

그들의 손을 잡고 한없는 주의 사랑을 눈으로 전하는데 눈물이 흐른다.

그리도 사랑했던 이들, 나를 버리고 떠났던 이들의 손을 잡고 난 떠날 것이다.

주님이 양손을 벌려 이 가여운 아들을 기쁨으로 반기시는 것을 내가 영의 눈으로 보리라.

 

사역 정년퇴임까지는 78개월이 남았다.

허락하시면 속히 조기 퇴임해 젊은 목사를 초빙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예배에서 찬양 인도를 하고 특강을 맡으며 화장실 청소와 쓰레기를 분류하고 싶다. 손재주나 있으니 고장 난 건 내 손으로 고칠 것이다.

문제 성도를 찾아가 도움을 주고 싶다. 북한 사역에도 한몫을 감당해야 한다.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에서 기다린다. 말씀이 없어 무너지는 가정들을 찾아가 살려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소담한 시골집도 갖고 거기서 지친 목회자들을 동요와 떡으로 격려하고 싶다.

뭣보다 아내가 텃밭을 가꾸며 꽃을 만져 평생의 노고를 보상받게 해야 한다.

그리고 손주들이 오면 마음껏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아줘야 한다.

 

2013.04.30.

흙 안에 내가 있고 또 네가 있다.

물 안에 내가 있고 또 네가 있다.

갖은 썩음과 삭힘과 새싹을 냄이 흙의 본질이고

물은 오염물질을 품어 말갛게 함이 본질 아닌가?

죄의 인생들은 흙과 물과 공기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위에서 비를 내려 씻고 흙에 묻혀 거듭난다.

흙은 온갖 것을 가슴에 묻고 바다는 온갖 것을 다 받아 삭힌다.

비로 생명을 움트게 하고 더러운 것을 맑게 한다.

순간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부한다.

엉뚱한 데에 절한다. 세상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함부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되는 순간 그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터져 죽고 말 것이다.

전철로 영등포 김안과에 다녀오며 삶의 무게에 눌린 많은 群像을 본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오면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애써 외면하고 음악에 몰입한다.

비겁한 줄 알지만 오늘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눈에서 음악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쟤는 저래서 안돼, 얘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그렇다. 정확한 분석으로 사람들은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러나 살아계신 사랑의 주님은 바로 그 안 되는 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끝내 죽었다.

주님이 죽어서 우리가 죽을 거 면하고 살아있되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

남들처럼 우리 부부도 부족한 면이 많다. 그 부족으로 내가 종종 좌절하곤 한다.

그러나 그 부족 때문에 주님이 죽어주셨고 그 부족조차 사랑하셔서

이제도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함께 하신다.

내가 주를 닮지 않고 누구를 닮으랴?

어제 아내에게 오는 길에 문자를 했다.

당신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 나고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그랬더니 감동의 문자가 와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한참 울었다.

도리우찌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채 고개를 숙여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

내겐 당신이 최고라는 말과 나보다 당신이 건강해야 나는 좋다고 한 아내의 문자,

내가 젊은 날 어머님께 드린 말이 생각났다.

집사람은 마치 나만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살아요.

그런 사람의 부족을 품는 일은 주님의 소원이시다.

 

2013.06.07.

인생은 에덴에서 쫓겨나면서부터

그 자체가 이미 태생적으로 질병(疾病)이며 사망일 수밖에 없다.

젊어서는 내면에서 앓게 되는 각양 아픔이 그것이요,

늙으면 몸으로 다가오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젊기에 겪게 되는 끊임없는 갈등과 어수선한 쟁투의 혼재는

늘 그랬듯이 성숙이라는 푯대를 향하며 몸부림한다.

그 질풍과 같은 고통은 늙으면서 서서히 고요해져

노화라는 질병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그러니 젊어서는 마음이 아프고 늙으면 몸이 아파 신음하면서 가는 게 인생이다.

여기가 아직도 신음과 통증이 있어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기에 합당한 최적의 조건을 이뤄가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어디서 바라봐도 주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2013.06.25.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을 생각해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내 고백은 하나다.

내 평생은 내 허물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돌보심과 고치심과 채우심의 연속이었다는 것, 결코 부인(否認)할 수 없다.

모든 학문의 뼈와 머리는 철학이다.

그러나 결코 철학이 열지 못하는 곳을 신학을 통해 볼 수 있다.

철학의 마지막 교수(敎授)는 고로, 신학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인생을 끝까지 완전하게 알기가 어렵다.

즉 인생만사 모든 마지막 답은 성경에 있다고 단언(斷言)한다.

 

2013.07.07.주일.

자연의 재난 앞에 인간은 한 마리 벌레다. 육체는 그런 것이다.

한평생이 긴 것 같아도 지나고 보니 한편 허망도 하여,

순간의 존재가 영원을 사모함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 가운데 정확한 답은 언제나 하나였고

그 답 가운데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자는 교회뿐이다. 할렐루야. 아멘.

 

2013.07.17. 수요.

모든 결론을 허망한 인생 가운데 찾게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하나님께로부터 찾게 하신 것,

무한 감사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아 성도 된 것도 감동인데

목사의 거룩한 직분 주시니 그 감격으로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주의 뜻인 줄 압니다.

귀한 딸, 아들 사위까지 주셨는데 자손들이 종보다 뛰어나고

손주들 잘 자라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성실하고 착한 아내 주신 것 무한 감사합니다. 아멘.

 

2013.08.16.금요기도회 중...

땅 위에 생명 받은 만물 중에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구인가?

구원하기로 작정된 영혼일진대, 과연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서리요?

오직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뿐이로다.

 

2013.08.20. 화요.

절절 끓던 열대의 밤이 놀랍게도 오늘은 이불을 끌어다 덮을 정도로 서늘해졌다.

세월가고 흐르는 것을 누가 막으랴?

붙잡을 수 없는 더위, 붙잡을 수 없는 아픔의 날들,

기어코 평화의 나라, 주님 앞에 서리라.

 

바보 부모아래 바보로 태어나 다른 바보를 탓하면서 늘 스스로 함정 속에 헤매다가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바보인 것을 더욱 깨달아

이젠 다른 바보들을 우러러 보기 시작한다.

바보들 안에 나름 쓸 만한 구석이 많다는 걸 알고는

스스로 위로하고 바보 이웃을 품는 것이다.

바보가 살 수 있는 길은 그래서 끝없이 낮아지고 잠잠해지는 것이다.

세상을 높은 데서 보면 허탄하지만 낮은 데서 보면 진지해진다.

높으나 낮으나 세상의 근원되시는 창조주 우리 하나님을 빼고는 허무 그 자체일 뿐이다.

 

E-mail로 오는 홍수 같은 정보들을 살피다 보면

블로그관리에 도움이 되는 귀한 정보들이 간혹 하나씩 보인다.

고물상에서 귀한 골동품을 건지는 기분이다.

웹서핑이 시작되면 신기한 것들을 많이 만난다.

그렇게 구한 viotti의 바이올린협주곡은 종동 내 심장을 오그라뜨린다.

오늘은 vivaldibasoon협주곡을 구해서 저녁내 들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바순의 그윽한 선율로

또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지성을 엿보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60중반이 다된 이 나이에 소년과도 같은 이런 감동을 변함없이 주시다니

크신 자비하심에 콧날이 시큰했다. 눈물이 흐른다.

오 주님. 악한 종에게 무엇을 원하셔서 허물뿐인 이 죄인을 이토록 후대하시나이까.

 

2013.08.26.월요. 며칠사이에 서늘한 바람에 아침저녁으로 가을정취, 창가엔 벌레소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에 머리를 맞아 옆으로 기울었다.

놀란 심수봉이 각하 괜찮습니까?” 하니 나는 괜찮아라고 했다.

난 괜찮아. 난 정말 괜찮다.

우리 교회와 성도가 그리고 내 가족들이 주의 손에 붙잡혀 있기만 하다면 난 괜찮다.

요한복음 8장 뒷부분에서 예수님은 분노한 유대교인들을 피해 숨어 위기를 모면하셨다.

왜 기적을 사용하셔서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셨을까?

어제 오후 예배에서 그 부분의 질문이 있어서 우리 모두 성령께서 베푸신 답을 들었다.

불치병환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릴 때는 기적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하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던 주님,

십자가에서 사망의 쓴 잔을 죄인들과 꼭 같은 육체로 받으신 주님의 목적은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그 육체를 통한 부활의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는 하나님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실현, 하나님의 실존인 사랑의 전개였다.

자신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 없었던 한경직목사님.

개인을 위해선 돈을 쓰지 않았던 박정희대통령.

너희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몸이 짓이겨져도 너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괜찮아.

십자가의 一聲(일성)이 가슴을 파고들어 깊이 박힌다.

난 괜찮아, 당신의 죽음으로 만민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말씀,

희생이 마무리되는 가장 원숙한 사랑의 언어 아닌가?

 

2013.08.28.수요예배 직전 내 임종을 묵상.

그대 정녕 바람처럼 떠나려는가?

유약한 심장으로 여기까지 왔도다. 얼마나 버거웠던 길이었나?

걸어온 발길마다 눈물 아니 고인 곳 없구나.

그리스도의 감동으로, 설렘으로, 설음으로, 외로움으로...

 

그대 입술에 늘 외우듯,

이슬처럼 가려는가?

정녕코 그대의 불은 꺼지는가?

잠시 후 숨이 멎어 그대 몸뚱이 식으면

설음도 눈물도 아픔도 없으리.

이제야 그 모든 짐 내려놓고 훌훌 가는구나.

얼마나 기다렸던 오늘인가?

처음 그대 핏덩이로 이 땅에 올 때처럼 빈손으로 가니

어찌 아니 홀가분할꼬?

, 이제 뵈는가?

그대 앞에 다가온 그 나라,

아름다운 주의 나라,

그리도 애타게 사모하던 그 나라가

이제 가까이 보이겠지.

서슴치 말고 나아가시게.

다시는 아프지 않고 서럽지 않은 곳,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따라갈 거야.

받을 상급과 사랑의 책망을 기대하면서 설레며 나아가시게.

그는 여호와, 인자하신 우리 주.

영원하신 우리의 노래 아니신가?

귀한 친구여.

눈물 많고 어수룩했던 착한 친구여.

다 내려놓고, 다 내려놓고 안녕.

 

2013.08.30.

금요기도회를 인도하는데 팔십 모세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붙되 타지 않는 가시 떨기나무를 만나기 직전, 모세의 모습은 어땠을까?

처가살이 40년 과연 그에겐 무엇이 남아있었나?

매일 일을 마치고는 어떤 마음으로 터덜터덜 처가를 향했을까?

그 모세를 이젠 좀 알 듯싶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을 지나 동삭동에 들어와 5년째 접어들며

팔십 모세란 말이 떠오른 것은 웬일인가?

끝없는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

그리고 참으로 처절하게 파헤쳐진 무지하고 미련한 내 민낯.

간절한 회개와 주님의 만져주심을 통해 인생 어떤 몰골에도

주님으로 인해 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자신있게 선포하도록 인도하신 신묘한 섭리를

무엇으로 증명하리오?

세월 갈수록 오직 내 할 말 내주 예수의 은혜로 예까지 왔노라는 고백뿐

만입이 있어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2013.09.02.월요.

서로 부족하여 아옹다옹하는 여기 이 땅에서는 답이 없다.

이 땅에서 답을 구하려는 그 생각이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다.

그런데 불행과 고통은 다르다.

이 땅, 여기서 답을 구하려는 게 불행이라면

여전히 버겁고 피하고 싶어 몸부림으로 자유하지 못하면 그것은 고통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이 땅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 명료한 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풀려나

고통과 설음이 없는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려면

소망의 원천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어야 한다.

그리고 본래 부조리한 여기서 다 내려놓은 뒤

위를 바라보되 現時的 확신에 차야 한다.

분명한 목표가 선명하면 가슴 뛰는 설렘으로 소망하는 그 나라가

결코 환상 속에서만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 하늘나라의 기쁨이 가득하다가 눈을 뜨면

삭막한 세상이어서 깨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척박한 이 땅이 곧 하늘나라의 입구 바로 앞에 펼쳐진 진흙밭임을

영의 눈으로 보고 육체조차 희망에 기뻐 뛸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몸은 날로 삭아가도 영은 더욱 새로워져 그 깊은 희열과 감동을 어찌 다 말하랴.

 

2013.09.27.

사람은 배운 대로 가지 않고 감동따라 간다.

우리는 무엇에 감동하는가에 따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아름다운 꽃과 향내, 경이로운 풍경, 극도의 훈련으로 연출되는 기교 등

보이는 것에 대한 감동과, 반면 극진한 희생이나 신의, 사랑처럼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감동이 있다.

뵈는 것에 대한 감동은 뵈는 동안에만 감동할 수 있고

그 기억에 한하여 감동할 것이다.

그러나 뵈지 않는 것에 대한 감동은

그 지속력이 뵈는 것에 대한 감동보다는 크고 오래일진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감동은

결코 정황적인 사고판단이나 추리에 따른 인지와 감동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영이 활동함에 따른 신비요,

특별한 생명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감동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다만 죄인이 등을 돌려

그 빛을 외면하여 못 보고 빛이 없다고 하는 것 말고는,

 

2013.10.05. 토요.

지식과 지성은 다르다.

지식이 내린 바른 판단과 소신에 의해 활동하면 그것은 지성이다.

지식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세상 앞에 소심하지만,

진정 지성인이라면

세상 앞에 담대하고 하나님 앞에선 아주 작아져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바른 지성에 의해 내가 낮아진 만큼 하나님은 높아지시며

내가 작아지길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내게 그리 큰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비극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심과 절개, 지조는

결국 자신을 가장 미워하는 일이다.

 

2013.10.18. 금요.

둘러보면 거저얻은 귀한 선물 아닌 게 없다.

생명과 몸과 가정과 신앙과 바른 가치관과 글을 좋아하는 것 외에

허물까지도 교회의 유익으로 그리고 영광은 주께로 돌리게 하시는 각성이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들로 주변은 풍성하다.

다만 그 풍요를 어디에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숙제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사용하는 자신으로부터 행불행이 갈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기(3:33)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난지도(: 여의도 옆 마포 나루터에 마련된 쓰레기 하치장, 계속 쌓아 이젠 작은 산이 됨)에서 들려오는 밀양아리랑(날좀보소, 날좀보서,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으로 북적댄다.

부패한 가스가 숨을 조여오는 이 땅에서 모두들 날 좀 봐달라는 것이다.

관심 좀 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이룬 일, 내 소망, 내 그리움과 아픔을 좀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걸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꾸미고 나가지만 그걸 가장 많이 봐주고 관심하는 사람은

허망하게도 자신 외에는 거의 없다.

그냥 내가 내게 취해 있는 것뿐이다.

래서 외롭지 않으려면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게 결국 나를 아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살피고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면서 기억해주면

그는 반드시 나를 기억해낸다. 그 역시 자신을 위해 그리하는 것이다.

 

아침 예배당 가는 길의 잡초를 몇 개 뽑으면서 생각했다.

잡초는 비가 온 후에 뽑아야 부드럽게 따라 나온다.

그러면 지저분한 밭이 말끔하게 정리된다.

궂은 날이 지날 때 누구든 아우성치며 신음하지만

그날이 지난 후에 회개할 여러 가지가 상당 부분 뽑혀나가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 밭이 개운해지는 것은 신음할 때 주님이 찾아주셨고

그 순간 마음의 잡초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잡초를 없애는 귀한 삶의 자산이다.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 보혈로 채워진 생수의 강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불평등한 곳에서 평등의 장으로 나오는 것이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곳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불평과 투정이 변하여 감사와 노래가 되고

아픔과 수치가 변하여 즐거움과 자랑이 되는 유일한 지름길이기도 하다.

공짜는 없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십자가를 묵상한 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불결과 부단히 싸워

어떤 아픔도 마땅한 것으로 여겨

다소 그리스도의 대속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주의 영광을 다시 한번 보는 일이다.

예레미아 애가3:27절에서도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일렀다.

어떤 답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환히 보이는 정답으로의 출발이 십자가 통과, 그것이다.

 

조선시대 17세기 이전만 해도 시집가는 게 아니라 장가가는 것이었다.

어린 딸이 낯선 곳에 가서 적응하기보단 그래도 사내가 장인댁에 와서 적응하는 게 낫다는

선조들의 배려가 나라의 풍조일 때, 17세기 이후에 접어들면서

성씨를 잇는 가문에 가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굳혀 어린 딸들의 애환은 시작됐다.

가뜩이나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때에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여자들의 근본 죄였고

말을 해도 죄, 안 해도 죄, 모든 것이 여자이기에 죄였던 시대에

여인들은 출생이 죄였다.

이젠 페미니즘이 넘쳐나서 오히려 여성 상위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건국의 아버지. 가난과 공산위협에서 나라를 건진 구국의 영웅, 박정희대통령에 이어

이젠 그 여식, 박근혜대통령이 집권 8개월째이다.

박정희대통령이 흉탄에 돌아가자 그를 보필하던 전두환장군이 자릴 차지했고

이어 그 친구 노태우장군이 이어받았으나 모두 때를 따라 하나님이 쓰시긴 했어도

돈에 흔들렸다. 이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나

좌파성향의 김대중과 노무현은 놀랍게도 편향된 민족주의자였다.

어떤 일보다 민족이 통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국 나라를 종북좌파의 온상으로 만들어 놨다. 어떡해서든 북한의 깡패세습 왕조가 쓰러지지 않도록 도왔다.

국내에선 간첩이 국회에 합법 입성하도록 그 배경을 광범위하게 넓혀 주었다.

각계각층에 투입된 종북주의자들은 이제 거의 다된 적화라고 쾌재를 부르면서

가일층 내분을 조장하며 지금도 선동전략에 매진하고 있다.

요즘 통일부가 북한에 강력한 대응메시지를 보내고 국방부에서 심리전 풍선 대포를 쏜다.

종북의 극성으로 그간 엄두도 못 낸 일들이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막말을 하는 북정권에게는 더 강해야 한다.

그들은 김일성을 태양신으로 모시는 거대 사이비종교 집단으로서

강적에겐 약하며 약자에겐 강한 점령자가 된다.

박근혜대통령은 이승만박사와 부친 박정희장군에 이어

역대 대통령 중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정희같은 막무가내 는 끝까지 가시엉겅퀴로서

우리가 받은 복을 복으로 깨닫게 하는 옆구리의 가시다.

이석기는 한술 더 떠 이제 내란음모죄로 몇 년 후 나오면 남쪽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판이다. 과거 같으면 사형감이지만 법조계에도 주사파 법관이 진을 치고 있어서 아마 좀 있다가 나올 것이다. 젊은 그는 이제 죽지만 않으면 북한에서 남쪽의 인민 영웅이란 칭호를 받아 놓은 셈이다. 종북 세계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진일보한 정치행보다. 주님은 그래도 그들까지 함께 데려가라고 하신다. 그들 주사파 종북자들의 비상식과 억측이 적절하게 통제되기만 하면 대한민국은 그 절실한 tention을 결코 놓치지 않을 이유가 될 것이다.

 

2013.10.30.수요일.

가장 고귀한 사랑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상대방을 일으켜 세우는 사랑이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그를 위해 수고하는 희생,

그것이야말로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가 아니던가?

산 제사에서 올려드리는 향내는 하늘을 감동하여 결국 생명의 단비로 내려와 흙을 적실 것이다.

사랑받을만한 아무것도 없는 내가 거저받은 구원으로

죄와 사망에서 의와 영생으로 인도받았으니

나 또한 그 사랑으로 아내를 섬기고 주변의 영혼들을 돌봐야 하리라. 아멘.

 

2013.11.02.

나 하나만 사라지면 잠시 서툴고 서운해도 모두 얼마나 좋아질까?

더 나은 예배환경과 폭넓은 관계의 풍성함,

여러 행사로 북적대며 사람 사는 맛,

더는 초라한 성탄전야와 각종 행사의 가난함을 면할 것 아닌가?

아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생각이 여기 미치자 나는 다시 마음이 아파 왔다.

작은 규모의 아기자기함과 가족 같은 분위기로 행복한 여기,

교회 유지를 위한 안간힘에 묶인 억지출석이라면 죄인 중에 내가 죄인 아닌가?

다만 알 수 없는 주님의 동행은 내시 서원을 받으셔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끝없는 은총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산처럼 파도처럼 다가서는 열등감과 죄의식 속에 오늘도 하루가 간다.

이렇게 열등감은 사망의 독이지만

때론 독을 독으로 해독하듯 교만이라는 사망을 방지하는 치유의 독일 수 있다.

주여! 시작되는 노년의 문턱에서 구하오니

깊은 그리스도의 도와 분별력과 총명을 내리셔서

많은 영혼을 주의 이름과 진리로 구하게 하소서. 아멘.

 

2013.11.02.토요.

변화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변화시킬 능력의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변화에 성실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인생에서 참된 최상의 자유란 육체로부터의 자유일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로 정리된 이 자유는 모든 자유의 뿌리다.

어떤 자유도 죽음보다 큰 자유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를 소유한 채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갖게 된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일 수는 없다.

육체를 지닌 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란 늘 뭔가에 예속되는 자유이다.

 

2013.11.10.주일.

내 부족이 그대로 내 안에 머무르면 열등감과 수치지만

좋으신 하나님께 의지하면 그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더 가까이 찾아뵈어야 할 하나님의 만족하심으로 바뀌게 된다.

 

사람들은 하나를 써서 열 개의 효과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 그대로만 돌아와도 다행인 세상이다.

최상의 효율과 절약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는 주님의 동행을 통해 지혜를 주신

주님의 다스림을 드러내게 하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2013.11.28.새벽. 시온이 레온이를 생각하며 쓴 글, 블로그에 올림.

우리 가운데 무한경쟁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도망칠 자가 누구인가?

산다는 것이 그래서 곤고함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쟁을 정면으로 마주해 어차피 한번 가는 자신의 삶을 특화하여

자신뿐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 할 순 없을까?

내 자손이

훗날 많은 이들의 기쁨과 좋은 소식이 되며

가문과 나라를 빛내며 살게 할 수는 없는가?

많은 이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다.

그러나 인생 누구나 자기만큼만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잘 건축하며 홍익의 길을 갈 것인가?

먼저 우리는 고난 없는 승리는 허상이라는 쓴 결론부터 앞세워야 한다. (No pains no crown!)

상처 없는 영광은 결국 수치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3년간 죽을 듯 뛰어서 30년이 달라진다면 3년간 죽을 힘을 다하겠다.”

100세 시대에 10년 죽을힘 다해 노력한다면 후회 없는 그 평생이 멋지지 않겠나?

1990년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은 베를린 아카데미학생들을 대상으로

재능논쟁의 사례A"라는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세계적 솔리스트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엘리트그룹과 비교적 잘한다는 우등생그룹과 프로급연주에 관심 없고 공립학교 음악교사 정도를 꿈꾸는 일반음악학생그룹으로 구분해서 진행했다.

연구진은 그들에게 바이올린을 만난 후 지금까지 총연습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세 그룹 모두 5세 전후에 시작한 것은 비슷했으나

20세가 되면서 프로급 그룹은 1만 시간,

우등생그룹은 8천 시간, 일반학생그룹은 4천 시간으로 각각 나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가지다.

연습했는데 최상위그룹이 되지 않은 학생도 없었고

연습하지 않고 두각이 나타난 학생도 없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차지한 운동선수나 연주가들은

일찍이 자신의 목표를 확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만을 위해 옆을 보지 않아 요일조차 모르고 뛰었으며

20세쯤 되어 주변을 보니 친구가 없어서 허탈감과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사생활을 바치고 마치 그것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적어도 10년 이상을 한 분야에서 집중해 뛰면

누구나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반드시 행복하게 한다고 보장하지는 못한다.

행복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달인이 태어나기까지는

주변의 세심한 배려와 균형 있는 전인격적 교육이 요구된다.

천재들의 성공이 어떤 때는 자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로 마감되는 것도

성공이 모든 것의 결론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진정한 금메달은 마음의 평화가 동반하는 승리이다.

내가 승리하면 누군가 여러 패배자가 있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성공이 주변과 사회와 국가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를 세밀히 살피고

이웃을 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말년에 그리스도를 영접해 구원받은 톨스토이는

내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뺀다면 그건 빈 수수깡과도 같다고 했고

어거스틴은 나는 알기 위해 먼저 믿었다. 이해는 믿음의 대가(代價)였다.”

기독교신앙의 요체를 말했다.

인생뿐 아니라 뵈지 않는 영생까지도 꿰어보는 영안(靈眼),

자신을 창조주 앞에서 낱낱이 조명받기 원하는 처절한 몸부림은

다른 모든 승리에 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2013.12.02.월요.

길을 떠나는 자식에게 교통비와 먹을 것을 챙겨주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실 때

그 생명이 잘 번성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풍부하게 베풀어 주셨다.

때론 넘쳐 도리어 고통이 되기도 한다.

주신 것을 잘못 사용하면 고통의 원인인 것이다.

내겐 풍부한 감성을 주셨는데

평생 그것으로 인해 행복하고

그것 때문에 아픔도 더하다.

 

2013.12.04.수요. 허상과 실상의 실체.

17세 소녀와 18세 소년은 순전하게 좋아했다.

맺어질 수 없는 사이라 소녀는 서둘러 혼인이 이뤄졌고

소년은 군에 입대해 심한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도 간혹 그리움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아프기에 아픔으로 행복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받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가 아픈 만큼 행복하다며

아직도 뇌리에 소녀인 그녀가 지금 어떤 할머니가 되었고

어찌 지내는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도 가끔 그녀의 꿈을 꾼다. 해맑은 모습,

노년의 심장을 뛰게 하고 힘겹게 하는 그리움에 포로가 되어

그 여운으로 가슴이 아려와도 노인은 행복하게 들뜨고 만다.

그리고 심하게 아파한다. 그냥 한없이 그립고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도 봐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한 가문의 할머니가 되어 전혀 다른 사람일 것이고

지금 그리운 건 이미 오래전 사라진 칼손의 소녀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그녀도 노인처럼 가끔은 첫사랑의 남자로 아파할

어느 교포 할머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 앞에 철없이 무책임한 첫사랑의 짐을 지워준 죄인이다.

뜨거운 그리움으로 그녀를 못 잊어도 그를 만나기가 두려운 이유는

그녀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보고 싶어 한다.

혹시 어린 날의 죄를 용서받고 그녀를 위로하고

서로 좋은 친구로 늙어갈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소녀가 그리운 애련, 생전에 실현될 수 없는 꿈이련만

그리도 깊이 새겨져 있었던가?

그렇다면 그것은 실상이면서 허상이다.

외형으로는 실상이지만 실제로는 분명 허상이다.

DNA에 있는 생물학적 그리움도 이렇듯 몸부림치는 허상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일이 있다.

창조주를 향한 신앙은 허상처럼 보여도 그것이 가장 확실한 실상이다.

생명이 갖는 근본적 귀소본능이고 생존에 대한 마지막 몸짓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육체가 방해한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늙을수록 새로워지는 영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절의 그 음성 그 표정이 그리운 것이지 전혀 달라진 그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면서도

여전히 그가 그립고 못내 힘겨운 것은 무엇인가?

실상은 자신 안에 있는 추억이다.

그렇다면 실상과 허상 사이에서 인간이 혼미해지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30년 만에 찾은 고향 집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은행나무 뒤편 산은 어린 날 추억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앞쪽 마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전혀 낯선 아파트 숲이 되어있었다.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반은 살아있고 반은 사라진 추억의 현장에서

나는 보이는 것들의 허탄함을 순식간에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아이를 너무 예뻐했고

말할 수 없이 귀염을 떠는 그 애로 진정 행복했고 기뻤다.

어느 날 갑자기 헤어져 우린 한동안 절규했다.

2년여 만에 만났는데 아이는 부쩍 자라서,

귀여운 애기가 아니라 그냥 명랑한 소년이었다. 허망했다.

그토록 그립던 환상이 깨어졌다. 추억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 그 아이를 나는 오늘도 그리워한다.

실상의 그 아이를 두고도 다른 추억 속의 그 애기를 그리워하듯

그 노인은 할머니가 된 그녀가 아니라 칼손의 소녀를 그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래전 내가 어린 내 아들딸들에게 받은 그 앙증맞은 귀여움의 위로와 기쁨을

지금도 못 잊어 성인이 된 자녀를 보면서 추억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인간은 추억과 실제 속에서 늘 헤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진실한 사랑은 믿음 안에 갇혀있어야 한다.

신뢰하면 그 신뢰로 힘을 더하고 힘은 운동한다.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모두 허상이 아닌가?

첫사랑의 흔적으로 힘들어하는 인생들에게 선각자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언젠가 사라질 그림자 같은 허상들이고

실상은 믿음으로 확정된 하나님의 나라다.

그런데도 실상인 천국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이를 우린 영적 무지라고 말해야 한다.

그 영적 무지는 불신, 믿음 없음이다.

믿음이 능력인 것은 눈에 뵈지 않아도

분명한 실상으로 다가오는 주의 나라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주의 나라는 주의 통치함이 머문 상태로 그분의 권능 아래 놓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께 붙잡혀서

그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구하고 기뻐하며

절대 신뢰로 자녀가 된다는 것만큼 힘차고 기쁜 능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13.12.06.금요. 보혈과 목초액.

얼마 전부터 잠들기 전, 또 무시로 코안에 목초액을 살짝 묻힌다.

매캐한 옛 아궁이 내음이 나는 좋은데 사람들은 기겁한다.

목초액은 숯가마에서 숯을 구우면서 나오는 증류액으로서

나무가 타면서 생긴 수증기로서 이를테면 타죽은 나무의 눈물이다.

태워지며 증발하던 나무의 눈물,

목초액은 살균능력이 있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아토피피부와 각종 염증에도 탁월한 제어능력이 있다.

나는 무좀에 목초액을 사용하고 코에 잦은 염증도 사라졌다.

모기퇴치도 되고 가려운 데는 특효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어서다.

과거 조폭 두목이었던 사람에게 물었다.

누가 가장 힘들었소? 무술유단자였소?

아니요.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자였습니다.

죽겠다는 자에게 누가 힘을 쓰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육체를 버리실 때 흘린

보혈과 땀과 눈물의 진액들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의 증류액이다.

그래서 주의 보혈은 인간의 모든 질병 치유에 탁월하다.

목초액과 보혈이 왜 그리도 효험이 되는가?

그것은 자신이 불에 타 죽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것은 이제 아무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상 잃을 게 없는 상태로는 두려울 게 없다.

누구든 그를 공격할 이유를 갖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죽음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란 마지막 방책으로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 죽음으로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셨다.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한 뒤 죽어있던 모든 자에게 유일한 소망-복음이요,

영생이신 그리스도의 진리는 목초액처럼 모든 피조물 가운데 녹아있다.

자신의 뇌를 열어 본 자가 없듯이 자신 안에 찾아온 진리를 스스로 알 수 없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와 주셔서 사망으로 사망을 잘라내시고

생명으로 생명을 영원에 잇대게 하셨다. 밤을 새워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다.

 

2013.12.07. 토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승리이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라고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이 말했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혹시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그 대상에 대하여 모르거나 두렵지 않아도 될 분명한 자신감이나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다.

세상을 알수록 조심성이 많아지는 노년은

그래서 고개를 숙일 줄 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낮아지는 게 얼마나 편한지를 배우면서

점차 고요해져 가는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2013.12.12.

왕성한 식욕이 무죄이듯 성욕 또한 그 자체는 무죄이다.

다만 도마 위의 칼이 조리에 쓰이지 않고 악한 데에 쓰였다면

벌을 면할 수 없는 죄가 된다.

풍성해진 문명이 선정적 문화로 성욕을 자극한 사회적 책임도 있겠으나

결국 자기통제를 훈련받지 못한 본인에게 책임은 돌아간다.

전자발찌를 차고 다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자발찌를 안 했다고 거룩한 인생일까?

누가 먹고 눕는 일에 자유하랴?

비용상 문제로 화학 거세가 어려우면 신경 거세를 고려해야 한다.

한 가정과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보며 누구든

나는 전자발찌를 안했다고 의젓한 척해서는 안 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할 자가 없듯 환경과 여건의 함정이 닥치면 누구든지

성범죄는 멀리 있지 않다.

상습재범자에겐 신경 거세를 고려하고

사회적으로는 매춘업 양성화를 고려해 볼만도 하다.

주님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다. 그 앞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실수했고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폐를 끼칠까?

알고야 바르지 못한 일을 하랴만

무지와 미련함과 욕심과 작은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허물들을 돌아본다.

다시한번 살아볼 수 없는 한번만의 나들이는 언제나 회한으로 가득한 길이다.

육체가 있기에 일어난 아픔들을 통해

완전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나니

거기 주님의 나라에는 이런 후회도 없고

서러움도 분노도 수치도 없으리라.

! 주여. 늙음도 기쁨이요. 죽음은 영광이 아닙니까?

주께 종의 생각과 뜻과 길을 후손과 교회와 함께 의탁합니다.

 

2013.12.12.

일기를 쓰면서 종종 생각한다. 내가 떠난 뒤 누가 이 글을 읽는다고 이렇게 홀로 웅얼대는가? 읽을 리 없다. 이것은 내가 나를 보며 말하고 위로받는 내면의 세계일 뿐이다. 일기와 고전음악으로 힘겨운 젊은 날을 이겨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 내가 조금은 늙은 것 같아도 머지않아 오늘이 상당히 젊은 날이었다고 돌아보는 시절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다. 그날에 나는 또 무엇을 후회할까? 주여, 분별력을 주소서.

 

2013.12.26.

바르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 것이듯 잘 사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르게 잘 죽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전쟁 시 피난을 가지 않고 주님 외에 세상에 피난처는 없다고 한 고 손양원목사님 이야기에 감동하고 내 믿음을 추스른다. 가장 귀한 지혜는 성경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분 앞에서 생각하고 그분 앞에서 행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