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3.월요.
비발디의 연주에 감동한 관중들은 대개 선율이 주는 음악의 세계에 몰입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음악회에 얼굴 드러내기를 즐겼다. 동서고금 무론하고 스트르디바라우스와 과르네리 등 명품악기는 청중의 기를 죽이기기 충분하다. 비발디의 연주 끝에 항상 “역시 바이롤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야, 대단해.”라는 말로 그 천박함을 드러내는 청중들 앞에 바이올린을 높이 들어 떨어뜨린 안토니오 비발디, 사회자의 설명은 청중들을 압도한다. “지금 부순 바이올린은 연습용입니다. 음악은 악기가 아니라 연주자라는 것을 비발디선생이 전한 것입니다.”
음악은 작곡자, 연주자, 청중이 한데 어우러져 일궈내는 감동과 의미가 어떤 진리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을 흔드는 행복이다.
여자라는 바이올린을 남자라는 활로 켜는 사랑의 연주는 켜는 이의 정신이 숭고해야 한다.
겨울철 눈 내린 담장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라디오의 선율, 발길을 떼지 못하고 연주가 마치기까지 듣던 젊은 날이 기억난다. 클래식마니아인 내가 값진 오디오에 관심이 없고 오직 선율에 넋을 빼앗기던 시절 내게는 명품오디오보다 영혼가운데 일렁이는 음악혼의 찬란하고 화려한 춤이 더 소중했다. 음악을 들으면 내 속에서는 “어찌 더 행복하기를 원하는가?”라는 희열의 절규가 올라왔다. 그리고 오디오에 열광하는 이가 선율에 무지함을 볼 때는 “이런 천박한 속물을 봤나?”라며 한껏 자존감을 높여 코웃음을 쳤다. 바울사도처럼 다 분뇨처럼 버리고 이제 오직 진리만을 사모하며 가는 길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한편 참으로 소중한 것,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는 허망의 덧없음이다. 안토니오 비발디도 사라사테도 그 누구도 스스로 찾지 못한 것을 우리는 보았고 만졌다.
더 이상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우리교회 말씀은 많은 것을 함축하는 진리이다.
부족한 아내, 못난 남편이 아니라 내가 그를 어찌 섬기느냐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부부의 관계는 분명히 거듭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보며 절망하는 존재라서 상대방이 먼저 그렇게 나를 품어주기를 기대한다.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는가? 큰 자요, 성숙한 자이다. 먼저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엎드려 주를 바라봄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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