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8.주일예배(히11:32~40. 믿음으로 세상 이긴 이런 사람들)
[젊어 방문판매영업을 하던 카네기는 어느 노인 집에 걸린 허름한 그림하나에 꽂혔는데 낡은 배가 희망 없이 해변에 걸쳐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카네기는 노인이 돌아가신 후 그 그림을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고 카네기는 평생 그 그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면서 고비마다 거기 적힌 글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렇다. 장맛비가 아무리 지겹고 힘들어도 그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풍요로운 현대, 문명사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총명과 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문명은 인간에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화석연료 오남용으로 지구온난화와 각종공해, 그리고 알 수 없는 괴질 외에 수많은 문명의 부작용은 인간에게 하나뿐인 지구조차 병들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편안히 앉아 좋은 환경에서 예배할 때 북한이나 중국, 터어키 같은 데서는 생명을 걸고 숨어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은혜가 깊습니까? 그렇습니다. 편한 곳의 은혜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담보로 드리는 예배는 실로 천국가까이에서 드리는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임재와 나라를 절박하게 느끼면서 생명을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한다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변치 않는 공평이십니다. 오늘 은혜의 신약시대는 약속하나 굳게 잡고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르러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십자가에서 부활의 십자가로 넘어와 은혜 속에 말할 수 없이 풍요롭고 편안한 시대를 갑니다. 그러나 편하긴 해도 깊어지기는 쉽지 않은 좋은 환경이 구약의 두렵고 떨리는 율법의 시대에 비해 결코 뛰어난 믿음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본문 히11장은 구약시대 믿음의 놀라운 선조들을 열거하면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실례를 들어 유약한 신약시대 믿음을 살피게 합니다. 한절씩 보며 믿음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저와 여러분이기 바랍니다.
32절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실증적 믿음의 승리자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 그 하나로, 자신의 소심함과 유약함과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33절을 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나라들을 이겼다는 것은 이웃 불신국가들을 제압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다윗은 나라들을 이기고 사울의 생명을 해하지 않아 의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고 25년간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다니엘의 믿음을 보시고 굶주린 사자들의 입을 막으신 분이 우리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34절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일곱 배 강한 풀무 불에서 눈썹하나 그을르지 않았고 탄내도 없이 믿음으로 인하여 살아나왔습니다. 신앙을 위해 가문을 탈출한 두 자매가 숨어있는데 무장한 추격자들이 방문을 열고도 “여기도 없네.”라며 지나갑니다.
35절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엘리야가 살려낸 사렙다 과부의 아들, 또 엘리사가 살려낸 수넴 여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죽었던 외아들을 돌려받은 나인성의 과부와 죽은 오라비를 돌려받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님을 부활메시야로 다시 만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니다. 본 절 뒤쪽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더 좋은 부활이란 예수님 오셔서 시작되는 영생을 말합니다. 그 영생을 위해서 심한 고문을 받되 피하질 않았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 그런 일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고문의 원어는 “북”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북치듯 죽을 때까지 때린다는 겁니다. 실제 죄수를 형틀에 묶어놓고 사지를 줄로 묶어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당기며 사지의 연결부위를 창으로 찔러 피를 내면서 배와 가슴을 북치듯이 쳐서 죽이는 참혹한 형벌이 있었습니다. 외경 마카비2서에 엘르아살이 그렇게 죽었고 그 다음 장인과 어머니와 7형제가 모두 그 형벌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일일이 기록은 없어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믿음의 강직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늘나라에 확신을 갖고 참혹한 죽음조차 피하질 않고 주를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이 그 혹독한 죽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을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면 만나 뵐 주를 생각하면서 무서운 통증에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찬송가 547장 2절의 고백이 기억납니다. “영광의 주님 오실 때 부끄럼 많으나 흰 예복입고 주님을 뵈옵게 하소서.”
36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나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신약시대에 제자들은 대부분 바울이나 베드로, 바나바처럼 툭하면 잡혀 들어가 결박당한 채 매 맞고 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찬양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잠긴 옥문이 열렸다고 증거합니다.
37절입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했고 스가랴와 예레미아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이사야가 톱에 썰려 순교를 했습니다. 사울왕에 의해 놉땅의 제사장 85명과 아히멜렉과 그 땅의 남녀들 그리고 아이들과 젖먹이까지 모두 죽였는데 그 이유는 다윗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이유에서였습니다. 뒷부분에는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구약의 엘리야선지자와 신약의 세례 요한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난했고 궁핍한 삶에 많은 환난과 학대가 뒤따랐습니다. 38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예배하는 여러분. 고귀한 믿음의 선조들이 결코 편안하거나 기름진 삶을 산 게 아니라 모두들 세상에서는 힘겨운 인생을 살면서도 끝내 하늘에 소망을 둔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과 불행을 이겨냈던 일들을 살펴봤습니다. 험악한 인생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싸워 결국 영생의 승리를 이룬 선진들에게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중요한 가르침은 38~40절에 있습니다. 38절에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헬라어원문은 “이런 사람들이 살기에 세상이란 곳은 가치가 없는 곳”이란 뜻인데 주어를 ‘이런 사람들’에서 “이런 세상”으로 바꾸면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란 뜻이 됩니다. 공동번역은 “이런 사람들에겐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질 못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이 공동번역과 맥을 같이 해 믿음의 조상들이 이 세상을 영원한 처소로 보지 않고 본향집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함으로 세상과 자신을 이겼다고 증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생각과 달라 상당히 고달프고 힘에 부칩니다. 걱정근심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마치 맑은 날과 궂은 날이 쉬지 않고 다가오듯 끊임없이 즐거운 날과 힘든 날이 번갈아 오는데 성경은 이 모든 날에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힘든 환난에서는 자신을 돌아보며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할 것이고, 즐거운 날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험악한 환경에서도 세상에 굽히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실존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요일5:4절에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는데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또 사도바울은 롬8:17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면서도 누구나 고난의 현장에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아픈 날들이 속히 지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본문 증거에 믿음의 선조들은 결코 자신의 육신을 위해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세월은 아무리 즐거워보여도 순간이요, 믿음으로 가는 그 나라는 가는 길 험하고 외로워도 영원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몸이 따듯하고 배부르다고 행복한 건 아닙니다. 춥고 배고파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고 거기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무서운 수용소기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먼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린 언제 몸을 떠나 거기 갈지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갈 곳이 있다는 겁니다. 거긴 상상하기 어려운 좋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 땅은 잠시 지나는 수용소와 같은 곳입니다. 하숙집 같은 곳입니다. 잠시라고 해도 고통스런 날들은 길게 느껴집니다. 나그네 험한 길을 이길 힘이 오직 믿음인 줄 압니다. 믿으면서도 힘이 듭니다. 분노가 멈추질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의 실재에 대한 실감의 문제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지정의(知情意) 총체적인 인격과 삶을 통해 얼마나 실감하느냐에 따라 저와 여러분의 얼굴표정과 믿음과 말과 행실과 신앙품격이 변할 줄 믿습니다.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4.04. 주일설교<살전5:16~18. 범사에 감사.> (0) | 2021.04.04 |
---|---|
2021년03월28일 주일설교<신1:21(민13:21~14장.) 올라가서 차지하라.> (0) | 2021.03.28 |
2021.03.14. 주일예배<삼상22:2. 浮浪人의 두목, 다윗> (0) | 2021.03.15 |
2021.02.14. 주일영샹예배<민1:47-54. 총수에서 제외된 레위> (0) | 2021.02.22 |
2021.02.21. 주일설교<출4:20-23. 모세가 붙잡은 하나님의 지팡이> (0) | 2021.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