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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9.04.21.부활주일 설교<마28:6. 거기 안 계신 부활예수.>

by 설렘심목 2019. 4. 21.

2019.04.21.부활주일 설교<28:6. 거기 안 계신 부활예수.>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이렇게 시작되는 김두완 곡 본향을 향하네.” 인생이라는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무는 한 평생, 환난의 궂은 비바람. 세상을 환난과 괴롬으로 볼 때 이 노래에서 단 하나 기쁨은 찬송이란 한 개의 단어로 축약된다. 그리고 괴로움 심해도 그 괴로움으로 천국이 보인다는 고백과 전체의 내용은 우리교회 설교와 맥을 같이 한다. 괴로운 세파에서도 부를 수 있는 찬송의 노래는 억지가 아니다. 비록 현세에 고단해도 여전히 유효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에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 있다.

미국본토에 엄청난 재산과 풍성한 삶이 기다리는 부잣집 아들, 주한 미군 병사가 잠시 여기서 고단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우리 신앙인들의 현실이다.]

 

<명설교를 원합니까? 기도하고 왔고 또 기도를 잊었어도 간절하면 명설교가 태어납니다.>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기쁜 주일입니다. 부활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기독교, 예수를 믿는 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요, 존재에 대한 마지막 답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딜 가고 있는지 이 질문과 답이 없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한번이라도 철학적 고뇌를 해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어딜 향해 열심히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선명하고도 간단한 답을 갖게 됩니다. 우린 누군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입니다. 소속이 땅에 있질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발을 딛고 있는 여긴 또 어디란 말인가? 간단한 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땅에 육신의 옷을 입고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어디로 갑니까? , 이 땅, 흙을 딛고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께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찬송하며 살게 됩니다. 단순명확한 이 답은 성경(11:36)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진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진리를 못 만나 혼미한 가운데 헤매면서 길이 아닌 엉뚱한 곳에 아까운 세월과 힘을 다 허비하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 갔다가 길을 몰라 헤맨 경험이 있는 분들은 길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압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확한 정보는 귀한 재산과 건강과 모든 것과 직결됩니다.

정보 중에 최상의 정보는 복음,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불변 영원한 사실입니다.

부활절 이 아침에 듣는 복음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인간의 최대재앙이요, 공포요, 저주인 죽음을 깨끗하게 해결하고 무덤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천사가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오늘 설교제목이 -거기 안 계신 부활예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부활의 주님 어떤 분이신가?

 

1. 무덤 속에 안 계신 그리스도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중에 죽으신 주님은 사망이 확인되자 즉시 아리마대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됩니다. 그리고 병사 둘이 단단히 지켰습니다. 로마당국은 주를 따르는 자들이 시신을 훔쳐낸 뒤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큰 소동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빌라도는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아나신 후에도 40일간을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자신을 증거했습니다. 시신 없는 무덤은 부활의 영원한 증거로 믿는 자의 영원한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원죄를 청산하신 주님은

이제 더 이상 그 죄로 인한 사망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저주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죄짐을 진 육체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사단은 공회원들과 서기관들과 유대교원로들을 비롯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사망 안에 가두려고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 위에 계셨고 사망너머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망과 저주와 육체 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우리가 설교 중에 만나는 부활주님은 어디 사신다고 했습니까?

 

2. 믿는 사람가운데 살고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 부활절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입니다. 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지금 부활주님이 여러분가운데 함께 먹고 함께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저주와 죽게 될 육체에 계시지 않고 성도의 심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예수님이 살고 계십니다. 그렇게 우리 몸이 하나님의 전이 되어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설교 중 예수 안에 예수 안계시고 하나님 안에 하나님 안계시다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주님은 죄인사랑으로 물과 피를 다 쏟아 그 심장은 텅 비었습니다. 주님의 심장, 거긴 당신이 택하시고 부르신 당신의 자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녀들의 아픈 사연들로 꽉차서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생명이요, 보혈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고 사들일 만큼 소중했기에 죽으신 것입니다.

 

물이 불어난 냇물은 마치 강물처럼 무섭게 흙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건너던 중학생 하나가 그만 헛디디어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데 이를 지켜보던 아낙네 몇이 발을 동동 구를 뿐 감히 구하러 뛰어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나이든 노신사 한분이 구두와 모자와 저고리를 벗고 벨트를 손에 쥔 채 범람한 물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아이를 구했습니다. 아이가 고마워 눈물을 글썽이자 노신사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합니다. "천만에! 다만 한 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걸어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다오.” 소년은 이 한마디에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노력해 훗날 미 국방부장관을 역임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유대계 헨리키신저입니다.

 

주님이 왜 잔혹한 고통 중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까? 굳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리스도 우리주님의 심장 안에는 친히 택하신 우리들이 있었고 우리는 죄 값으로 반드시 죽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서 그의 피로 주님의 생명으로 몸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청산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골고다에서 충족되는 실체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품은 그리스도를 죽여 죄 문제를 해결하신 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주님을 따라 죄로는 죽은 자요, 영으로는 다시 사신 주님의 처소가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이신 사랑과 한편, 공의라는 속성을 동시에 충족시킬만한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감격과 부활의 기쁨이 있어야 할 우리가 왜 꺼진 불처럼 싸늘한 잿 속에서 악한 영의 노리개가 되어 어두움에 끌려 다녀야 할까?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우리의 죄를 끌어안고 죽으신 주님을 모시고 살 때에 날마다 죽는 경건의 연습량이 부족하단 것입니다. 성도란 끝날까지 죽고 다시사는 부활의 끊임없는 언덕을 넘는 나그네들입니다. 자고나면 어느새 자라난 손톱처럼 끊임없이 잘라내야 하는 죄와의 싸움은 결코 나 혼자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골고다에서 확실하게 이긴 증표, 부활의 영광된 증거가 우리 안에 믿음으로 깊이 자리 잡기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 기독교의 본질적 소망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과연 부활사상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았습니다.

주신 말씀을 다시 추슬러 봅니다.

먼저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자들인지를 십자가를 통해 알았습니다.

예수 안에 예수안계시고 그 심장가운데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가득 담겨있어서 우리의 죄와 함께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죄도 모두 다 죽어 사라졌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당신의 아들과 그 아들 안에 가득한 인생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신 에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죽이셔서까지 살리실 정도로 귀한 자들입니다.

왜 살리셨는가? 43:21절에 답을 나타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교회, 표어처럼 춤추며 노래하며 선교하는 교회로 하나님 친히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에 맞춰 충실하게 살 때 의미가 있고 빛이 나며 복되고 존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하셔서 우릴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비워서 주님을 모시고 매순간마다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도록 찬송으로 하루를 열고 말씀을 따라 힘있게 주의 뜻을 이루는 복된 모두가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