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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기독교사에 빛나는 왈도파의 거룩한 이야기(펌)

by 설렘심목 2019. 3. 26.




기독교박해가 교회사에서 끊이지 않는 동안, 왈도파 또한 로마카톨릭의 참혹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왈도파 사람들은 처음에는 로마카톨릭과 교류하는 데에서 이탈할 생각이 없고, 다만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제3차

‘라테란 공회’(1179년)에 갑자기 나타나서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번역한 성경을 교황에게 주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에서 축출당했다. 그들은 곧 두 명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다녔고, 이에 위협을 느낀 리옹의 대주교는 그들에게 파문 선고를 내렸다. 그 소식을 들은 교황은 ‘누구도 나에게 특권을 받지 않고는 설교할 수 없다.’며 설교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왈도는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왈도파에게는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들은 알프스산맥 동부에 위치한 험한 산골짜기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거기서 수백 년 동안 살았다. 그들은 교황의 권세가 굳게 서 있는 땅에 살면서, 성경의 약속을 딛고 서서 순결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거짓 종교에 당당히 저항했다. 그들의 믿음과 삶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궁벽한 곳에서 양떼를 치고 포도원을 가꾸며 고된 삶을 살면서도 그들이 지켰던 귀한 믿음은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왈도가 죽은 지 160년 후 왈도파가 거주하던 골짜기의 평화는 이단을 근절하기 위해 한 수도사가 종교재판관으로 파송되면서 깨지고 말았다. 13년 동안 230여 명이 화형을 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종교재판관들과 나라의 권세자들이 나눠가졌다. 1400년 겨울에 박해가 가속되자 왈도파의 많은 사람들은 더 높은 산지로 피신하였고, 산 속에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왈도파를 ‘삼손의 여우’라고 불렀고, 여러 곳에서 붙잡아온 왈도파 사람들을 함께 묶어 태워 죽였다.



1486년에는 교황 이노센트 8세의 지시로 크레모나의 부(副)감독이 이단 근절의 책임을 부여받아 1,800명을 이끌고

왈도파 사람들이 살던 골짜기로 침입했다. 왈도파는 산지를 이용하여 그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했고, 싸움은 100년 동안 계속되었다. 1655년에는 악명 높은 대학살이 일어나 수많은 왈도파 사람들이 기둥에 묶인 채 화형을 당해 죽어갔다.

 

 


박해는 매우 심하여 왈도파를 쫓던 사람들은 왈도파가 살던 지역을 불질러 황폐화시키고,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는 등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왈도파가 묻힌 묘를 파내 뼈를 태우기도 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드몽(Piedmont) 지역에서의 박해가 특히 심했다. 박해를 피해 동굴에 살고 있던 왈도파 남자들이 행상과 전도로 피에드몽 골짜기를

비웠을 때, 카톨릭 군사들이 공격해 들어가 불을 질러서 부녀자 3,000여 명을 모두 죽였다. 왈도파의 본거지인 피에드몽 골짜기에는 피가 흘러 넘쳤다고 한다. 이처럼 잔혹한 일을 벌인 카톨릭 박해자들이 왈도파에게 품었던 불타는 증오심은, 왈도파 사람들이 날카로운 진리의 칼로 부패한 그들 종교의 환부를 건드리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왈도파를 향한 참혹한 박해|작성자 iii느낌표ii


왈도파와 성경  

교황 인노센트 3세와 다른 많은 교황들 아래에서 잔인하게 고통을 당한 왈도파는 항상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로 평을 받았다. “왈도파는 성경과 신앙 서적으로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들은 행상인으로 시골집이나 귀족의 성을 방문해서는 직물이나 보석을 팔려고 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예, 아주 진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보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불붙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들 행상인들은 보배로운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어 놓았다.”(아미티즈(Armitage), “침례교도 역사” I. p. 301)  

 

올리베탄 성경(Olivetan French Bible) 서문에서 번역자들은 말하기를 “왈도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부요하게 된 초대교회 이후로 항상 성경 안에 담겨진 하늘에 속한 진리를 충만히 누렸다.” (사무엘 몰란드, History of the Evangelical Churches, 1655, p.14) 17세기에 자행된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한 박해 동안 살았던 왈도파의 목양자 Leger은 그의 저서 ‘삐에몽 골짜기의 복음적인 교회들의 역사’(1669)에서 ‘로마 카톨릭의 고대 성경 사본은 위조로 가득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개혁시대에 수용 원문(Received Text)을 출간한 베자(Beza)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오늘날 프랑스가 모국어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골짜기의 왈도파 덕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왈도파를 가장 특징짓는 것은 신성한 책(성경)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다. 성경에 대한 왈도파의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플라밍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다른 사람들과 그 보물을 함께 나누도록 했다. 헤어조그(Herzog)는 왈도파 만큼 성경 배포를 위하여 열심이었던 분파를 찾지 못한다고 말했다........왈도파는 성경을 기초로 그 위에 실제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세웠다. 한 로마 카톨릭의 종교재판관은 왈도파에 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왈도파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암기할 수 있다. 그들은 성인(聖人)들의 교령(敎令)과 어록과 해설을 경멸하고 오직 성경 본문만을 고수한다.......그들은 어떠한 교회의 법령이나 규례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리면 구원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은 바리새인의 전통에 불과하며, 인간의 전통을 준수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아미티지, 침례교도의 역사, I, p. 308).

왈도파가 신약성경의 단순한 믿음을 왜곡시킨 교권(敎權)에 의해 미움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경이 비추는 빛은 로마 카톨릭의 이단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로마 카톨릭이 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쏟아 부은 박해는 그들이 가진 성경뿐 아니라 그들을 멸절시킬 목적으로 가해졌다. “몽포를 시몽의 십자군이 너무나 가혹하게 그들을 멸절시켰기 때문에 스위스 역사가 Sismond는 ‘시몽은 사람 뿐 아니라 문학도 멸절시켰다’라고 말한다.” (아미티지, 침례교도의 역사, I, p. 310).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적에게 가한 시도가 너무나 철저했기 때문에 하늘의 장서들을 숙독하기 전에는 먼 옛 적에 하나님을 경외한 이들 왈도파의 역사를 상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 토마스 아미티지(Thomas Armitage)는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성경을 사랑한 왈도파에 대하여 일으킨 끔찍한 박해를 볼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역사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얼어 죽었고, 다른 이들은 높은 벼랑에서 내던져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동굴 안으로 쫓겨 들어간 어떤 이들은 로마 카톨릭 병사들이 동굴 입구를 막아버림으로 질식해 죽었다. 어떤 이들은 냉혹하게 목 매달리고, 살이 찢겨져 창자가 드러났으며, 뾰족한 것으로 몸이 꿰뚫리고, 익사당하고, 죽음이 그들을 해방시킬 때까지 사지를 갈기갈기 찢기는 고문을 당하였다. 어떤 이들은 창에 찔리고, 개들에게 물어 뜯겼으며, 불태워지거나 머리를 거꾸로 하여 십자가에 달렸다. 폭스(Fox)는 계곡 위로 약 2000 피트 높이에 우뚝 솟은 험한 바위 안으로 들어간 Castelluzzo 동굴에 도피해 있던 400 여명의 어머니들이 아기들을 품은 채 질식해 죽은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온순한 피가 흘려지는 동안 내내 인노센트 3세로 알려진 정결한 미인은 낙원의 과즙처럼 그 피를 음미했다. 인노센트 3세는 왈도파와 다른 살해된 그리스도의 양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삼손의 여우와 같다. 그들은 별개의 다른 무리로 보이지만, 그들의 꼬리는 함께 묶여 있다.”라고 했다. 피에 굶주린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그들에게 ‘Domoni Canes’, 곧 ‘주님의 개들’이라는 오명을 씌웠다. (아미티지, 침례교도의 역사, I, p. 311,312).

“성경은 좀처럼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부분이든지 대중의 언어로 번역되기만 하면 빛 가운데서 기뻐하는 백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두드러진 예를 프랑스 모젤의 메츠(Metz)에서 볼 수 있다. 몇몇 ‘리용의 가난한 이들’ 또는 왈도파가 프랑스어로 된 성경기록들을 그곳으로 가져오자, 사람들은 열심히 그 성경기록들을 읽었다. 그들은 성경읽기 모임을 조직했다......사제들이 그 모임을 중단시키려고 애썼으나 회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층의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들을 읽도록 의도하셨다. 이 책들은 그동안 당신들이 가르쳐 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 우리는 이 책들을 포기할 수 없다.’라고 했다.  

 

주교는 인노센트 3세에게 그들에 관해 보고했다.... 인노센트 3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밀하게 모임을 갖거나 설교자처럼 행동하거나 사제들을 조롱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성경의 깊은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제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교육을 받는다. 사제들의 말을 들으라. 사제들 가운데 가장 무지(無知)한 자라 할지라도 존경하라. 오직 너희만이 옳다는 생각이나, 너희와 함께하지 않는 자를 멸시하는 것을 주의하라.’ 그는 자기의 충고에 주의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엄하게 위협했다. 그리하여 인노센트 3세는 다음과 같이 로마카톨릭이 가르쳐 온 교리를 선언하였다. ‘성경을 아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사제가 원하는 방법과 수단으로 너희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그 결과 이 성경 읽기 모음을 폐지시키고자 시토 수도회 대수도원장이 메츠에 파견되었다.

 

진리를 찾는 평신도들은 ‘경건한 단순함’ 가운데서 사제들의 즐거움을 위한 그들의 수많은 오류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경 읽기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악한 무리들을 명명하듯이 왈도파로 불렸다. 그들에게 무력이 가해졌다. 그들의 모임은 해산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번역본들은 불태워졌으며, 그들의 의견은 근절되었다. 메츠의 사제들은 다시 마음을 놓게 되었으며, 계속해서 무지와 나태와 부도덕한 자기본위의 옛 생활로 돌아갔다. 1229년에 툴루즈 공회가 개최될 때까지 오세르(Auxerre)와 프랑스의 여러 도시에서 유사한 경우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신도는 어떤 언어로 기록되었든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 되었으며, 심지어 대중에 널리 보급된 시편(Psalter)과 기도서(Breviary)와 ‘복된 마리아의 시간’을 소지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었다. 피터 왈도가 발행한 로망스어로 기록된 성경에 대해서는 ‘반드시 불태우라’는 특별 선고가 내려졌다. (Blackburn, 교회사, p. 314, 315)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1660년까지 신약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기원을 밝혀주는 훌륭한 17세기의 역사서인 Martyrs Mirror 또한 동일하게 기록하기를 메츠에서 박해당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로마 카톨릭에 의해 멸시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Martyrs Mirror p. 300).

인노센트 3세의 치하에서 행해진 박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야만적이었다. 종교재판관은 고발당한 사람이 무죄인가 이단의 죄인가를 시험하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뜨거운 철봉으로 행해지는 심문에서는 시뻘겋게 달군 쇠를 고발당한 사람의 손 안으로 넣었다. 고발당한 사람은 이 쇠가 손 안에서 타는 동안 강제로 아홉 걸음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사제는 그 손을 천으로 감쌌다. 그리고 3일이 지난 마지막 날에 조사를 해서, 만약 상처가 있으면 고소된 자는 유죄 판결을 받고 처벌을 받거나 순교 당했다. 뜨거운 물로 행해지는 심문도 이와 유사했다. 고발당한 사람은 물이 끓는 솥 안으로 자기 손을 팔꿈치까지 강제로 밀어 넣어야 했다. 차가운 물로 하는 심문에서 고발당한 사람은 벌거벗겨져서 수로나 강으로 던져졌다. 만약 그가 떠오르면 즉시 정죄를 받았고, 만약 그가 가라앉으면 무죄한 자로 간주되었다. 1215년에 교황이 임명한 최고 종교재판관 Marpug 출신의 콘래드는 독일의 스트라스버그에서 80명 이상을 붙잡아서 시뻘겋게 달군 쇠로 심문하고, 정죄한 후, 모두 그 날 불태워 죽였다(Martyrs Mirror, p. 311, 313) 그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고문을 당했다.

13세기에 성경은 또한 이탈리아어로도 번역되었다. “Minocchi 교수에 따르면 13세기 이탈리아어 역본은 ”저자를 알 수 없는 다른 많은 옛 역본과 같이 마음과 양심에서 일어난 변화로 자신들 가운데 생긴 종교적인 생각을 확언하는 방법을 요구하던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단적인 프로방스, 사보이의 프랑스 역본들과 친밀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첫 번째 이탈리아어 역본이 그 근원의 중심을 “이탈리아의 가난한 이들”이라 불린 분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우리가 이 역본의 문체를 고려한다면 이 역본이 Tuscan Patarenec에 의해 발행되었다고 명백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대중의 일반 언어로 발행되는 곳마다, 그리고 성경이 로마 카톨릭의 전통과 관련이 없다고 선언되는 곳마다 로마 카톨릭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비추는 빛을 끄려고 애썼다. 로마 카톨릭 당국은 성경이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언어인 라틴어로 사용될 때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성경이 일반어로 번역되는 경우였다.

피타 왈도와 그밖의 왈도파 모임과 연관된 순회하는 복음전도자들의 강력한 영향에 맞서서 교황 인노센트 3세는 두 계열의 수도승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복음전도자를 모방하여 순회하였지만 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의(敎義)를 전했다. 이들 중 한 계열은 아사시의 성(聖) 프란치스코 수사회였다. (Faber, 고대 왈도파의 역사, p. 477)

교황 인노센트 3세의 통치 아래에서 “이단들”을 멸절시키고자 악명 높은 십자군을 일으켰다. (십자군은 항상 회교도로부터 ‘기독교’ 영지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또한 이단으로 명명된 분리주의자(separatist)인 성경 신자(Bible Believers)를 대적하여 소집되었다.) 1209년에 십자가를 앞세운 막강한 군대가 이단들을 멸절시키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 십자군은 필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잔인하였다. 수개월 동안 약 20만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고, 이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잔혹한 행위가 자행되었다. 이 모든 행위는 인노센트 3세의 승인을 얻은 것이었다. 두 큰 도시 베지어(Bezier)와 까르까손느(Carcassone)가 잿더미가 되었고, 다른 수천 명이 불타는 집에서 쫓겨나 숲과 산을 떠돌아다니며, 날마다 궁핍 가운데 멸절되어 갔다.” (Orchard, 침례교도의 간략한 역사, p. 211)

세기를 거치며 계속된 왈도파에 대한 박해

왈도파에게 가해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세기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 광대한 영역에 걸쳐 존재했다. 이 기간 동안의 박해는 다음 시대의 박해보다 덜 가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해가 있었다. 1211년 알사스의 스트라스버그에서 80명 이상의 왈도파 남녀가 화형을 당했다. 1214년에 스페인의 모릴락에서 7명이 화형을 당했다. 독일에서는 1231년부터 1233년까지 왈도파에 대한 첫 번째의 일반적인 박해가 있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왈도파는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1260년에 오스트리아 북부와 남부에서 왈도파의 정규 경배 장소로 불리는 학교가 약 50 여 곳에서 발견되었다. 1315년에 남부 오스트리아의 작은 행정구역 안에는 36개의 마을과 도시에 왈도파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전 공작령에서 왈도파의 추종자들의 수는 8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그들 역시 보헤미아, 모라비아, 카린디아, 스티리아(오스트리아 지방)와 시레시아, 브란덴버르그(현대의 프러시아), 포메라니아, 폴란드 등에서 성공적으로 복음 전도 사역을 수행하였다. 1315년에 비엔나 근처 힘버그에서 화형당한 왈도파 감독 뉴마이스터(Neumeister)에 의하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는 많은 수의 왈도파가 있었다. 1315년 시레시아의 한 촌락 슈바이드니쯔에서 50 명 이상이 화형을 당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많은 수의 여자와 젊은이들이 있었다. 1309년경에 폴라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다. 14세기 말 무렵에 헝가리에는 수많은 왈도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트란실바니아까지 퍼져 있었다. 삭소니와 메크렘버그에서는 50년 후에도 왈도파가 발견되었다.

약 1390년경에 위에서 언급된 지방과 국가에서 왈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의 자취에 대한 빈약한 기록으로도 이들 국가에서 왈도파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남부 보헤미아에서는 전체 부락이 왈도파의 신앙을 추종하였다. 모라비아에서는 그들의 수가 너무 커서 로마카톨릭 성직체계가 상황을 통제하는 것을 거의 포기할 정도였다. 1393년에 브란덴베르그, 포메라니아, 메트렌버그에서 443명 이상의 사람들이 왈도파 ‘이단’으로 체포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부모가 이미 왈도파였던 이들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왈도파로 고소되었으며, 그들의 주장을 기록한 심문록(審問錄)이 세 권이나 되었다. 1391년에 바바리아의 여러 곳에서 38명의 왈도파가 사형을 당했다. 1416년에 삭소니의 여러 지역에서 300 명이 화형을 당했다. 1446년에 12명이 노르드하우센에서 화형을 당했고 1454년에는 22명이 삭소니의 산게르하우센에서 화형을 당했다. (John Horsch, 유럽의 메노나이트, p. 7.8)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