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4. 주일예배<딤후2:1-6. 자기로부터의 해방>
[자기로부터의 참자유를 알려면 자기가 누구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중차대한 물음 앞에 세상사람과 성도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스도의 실존에서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살지만 성도는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삶, 이것이 십자가의 교훈이 아닌가? 샤르에르는 자기인생을 망친 검사를 죽이기 위해 필사의 노력으로 마침내 악마의 섬을 탈출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1930년도의 실화는 계속되어 탈출한 샤르에르는 열심히 돈을 번 후 먼저 익숙한 그리운 거리들을 가보고 어린 시절 부모님 따라 다니던 교회를 찾아가 텅 빈 예배당에 앉았다. 복수의 일념은 그의 감옥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고요하게 앉아있는 샤르에르에게 분명한 음성이 들린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로마서 8장32절 말씀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악마의 섬도 빠삐용을 가둘 수 없었던 것처럼 참자유는 가둘 수 없고 또 가두어지지도 않는다. 나를 속박하는 증오와 분노와 탐욕의 감옥은 몸이 죽어야만 끝나는가? 아니다. 말씀이 몸을 지배하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치 빠삐용이 수십길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것처럼 우리도 나를 옭죄는 갖가지 감옥의 절벽에서 소망과 생명과 은혜의 바다로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유대교에 충성하던 청년사울이 주님의 강제로 예수의 사도가 되고 주안에서 디모데를 만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 서신을 유언처럼 써내려가는 바울사도의 아비 된 마음이 읽는 이로 하여금 영의 아들 디모데를 향한 그 깊은 사랑이 절절히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외할머니 루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실한 믿음을 본받아서 디모데청년은 주변으로부터 칭찬받는 아름다운 성도였습니다. 그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굳이 살핀다면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신경성 위장병으로 늘 힘들어 했다는 것입니다. 몸이 늙어 임종이 가까움을 느끼는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 사역을 맡긴 디모데에게 절실한 목양서신을 적어내려 갑니다. 소심하고 유약한 심성의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거칠고 뻔뻔한 자들과 거짓교사는 참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십자가였습니다. 한절씩 살피면서 바울을 통한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우리가운데 넘치고 있음을 함께 경험하기 원합니다.
1절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가운데서 강하고” 본래 유약하게 태어난 디모데에게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가운데 담대하기 원하는 바울의 격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음성인줄 믿기 바랍니다. 디모데를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바울사도에게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이렇듯 다정히 불러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은혜 안에서 강하다는 것은 세상의 강함처럼 완력으로 인한 혈과 육의 강함이 아닌 영의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인한 용기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확신가운데 자신감이 넘치는 성령의 활동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의 강함이란 보통 순발력과 지구력을 동시에 갖기가 어렵습니다. 발끈하면 신중함과 인내가 부족하고, 신중한 사람은 조심성이 많아서 시작이 힘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이러한 인간의 기질적인 부족이 모두 채워지기 때문에 폭발하되 신중하고 지치지 않는 저력을 보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라.”(수1:9) 모세와 여호수아. 바울과 디모데는 영의 권세로 물려받은 스승과 제자, 아비와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영적인연을 많이 맺는 관계의 복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2절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말씀과 전도라는 것은 많은 증인 앞에서 하나님이나 목회자로부터 들은 것 또 성경을 통해 깨닫고 배운 구원의 진리를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 교회운동입니다. 여기 많은 증인이라 함은 우리가 선포하고 증거한 일들을 주변의 사람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듣던 군중을 모두 복음전도의 증인으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주변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지켜보는 증인들입니다. 증인의 입은 언젠가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 그 때 우리가 행하고 말한 것이 그리스도의 진실과 영광과 구원의 증표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증표를 나누며 함께 할 충성된 자들에게 잘 가르치라는 바울사도의 당부는 끊임없이 번져가 온 땅을 덮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확장은 그렇게 가슴에 복음의 씨가 떨어져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들을 통해 또 다른 옥토를 찾아 심기우고 번져 나아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3-4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먼저 고난을 받되 자신과 함께 받으라고 합니다. 고난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고통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서 고난이 사실상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아멘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짊어진 주의 종 바울, 바울과 함께 하는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귀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매우 값진 일로 디모데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 아비로서 줄 수 있는 최상의 유산이기도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사도는 오직 신의에 죽고 살아 좋은 군사가 되길 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생활, 곧 사생활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생활에 얽매임이 없는 군사는 건강한 사생활을 유지하는 한편, 자기생활로 인해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큰 차이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바로 아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바라고 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격은 자신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알고 자신으로는 불가하나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가능하기에 늘 주께 묻고 아뢰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에게 묶이기를 거부합니다.
허약한 자신의 실존을 묵상하지 않으며 드디어 자신을 떠나 그리스도에게 묶이길 간구하게 되는 사람 즉,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병사의 삶”은 자기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데 그러려면 오직 그리스도께만 묶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인의 유익을 따르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복음과 그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아픔조차 기쁨으로 받는 것을 의미하는 이 말은, 거룩하신 주의 영, 권세와 능력의 영, 하나님의 신, 끝까지 사랑과 지혜와 완전이신 성령이 함께 하시기 전에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부족한 자신에게 집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고 지금도 부르시고 구원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 바치고 주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남은 생애가 되도록 자신을 부단히 쳐서 훈련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바울사도는 밝힙니다. 결국, 믿음생활, 신앙생활은 기쁨이란 열매가 눈으로 마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초대 로마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스투스감독은 어찌나 경건하고 인자한지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구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는데 당시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그를 처형키로 했습니다. 그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에 그를 아비처럼 따르는 수제자 라우렌티우스집사는 식스투스감독을 따라가면서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제단에 나가실 때는 항상 제게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오늘은 왜 저를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왜 저만 남겨두십니까?” 사형장으로 가는 식스투스감독이 예언하듯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며칠 뒤엔 너도 내 뒤를 따르리라.” 라우렌티우스집사는 식스투스감독이 시무하는 로마교회의 재정담당이었는데 식스투스감독이 순교하자 로마시장은 막대한 교회재산을 즉시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뒤 라우렌티우스는 교회보물과 재산을 모두 팔아 인근 가난한 이웃들에게 신속하게 나눠줍니다. 그리고 며칠 후 교회에 모두 모이라고 한 뒤 교회재산을 요구하는 로마시장을 초청했습니다. 집행관들과 함께 로마시장이 도착했습니다. “교회재산목록과 문서와 보물을 모두 접수한다. 탁자위에 올려놓으라.” 로마시장의 명령 앞에 라우렌티우스집사는 교회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가난한 여기 이분들이 교회의 가장 빛나는 보석과 재산이오.” 라우렌티우스는 다음날 분노한 로마시장에 의해 자기영혼의 아버지 존경하는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갑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사이에도 신의가 있어야 멋진 인생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모두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멋진 사람으로 주님과 후세 앞에 기억될 줄 믿습니다. 그런 사람, 그는 진정 친구요, 동지요, 예수피로 하나 된 혈맹들이 아니겠습니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그런 동지, 이러한 특단의 결단만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에게 어찌 무심하시겠습니까? 순결과 절개, 충성스런 군사는 영적인 기쁨과 감동이 그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름받은 주의 군사들입니다. 따라서 군사된 자의 기쁨은 대장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뿐,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는 것 그것은 곧 삶과 시간의 낭비요, 허망함의 시작이며 끝내 지치고 후회와 낙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끝으로 5절을 함께 읽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승리자의 관을 받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진정 행복한 성도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먼저 기쁘시게 하려고 자기생활에 묶이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인데 본문은 법칙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 많은 법칙 중에 성경의 법칙이 생명의 법칙인줄 믿으시기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생각, 자기만의 감정, 습관과 문화의 틀에 묶이지 않되 사생활조차 경건하여 기쁜 삶을 유지하는 힘은 성경의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잠시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주의 기쁨 되어 자유자가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이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생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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