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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8년06월03일 주일낮설교<행4:13-21.택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구원>

by 설렘심목 2018. 6. 3.

20180603일 주일설교<4:13-21.택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구원>

[자기 안에 참으로 선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선은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참으로 지혜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지혜는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참으로 믿음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삶은 사랑하는 것만큼 살아가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만큼 풍성해지는 것.]

 

제사장들과 성전관리자들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의 놀라운 증거를 들을 때 이미 자신들의 기득권유지와 새로운 세력의 도전에 대한 거부감으로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분명한 증거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 앞에서도 그들은 끝내 이기적 욕심으로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오늘 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곳곳에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과 죄로 인해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드리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것이라는 그럴싸한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존심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을 영안이 닫혀있는 그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13-14절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하나님의 실존과 역사는

 

1. 현실입니다.

 

공회의 사람들은 사도들이 하위층 신분으로 예수를 따르던 사실과 그러나 지금은 변하여 기탄없이 말하는 것에 놀라며 표적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현실입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손에 쥐도록 하시는 현실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 학문이 없는 보통 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복음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담대하게 말하다. 또는 기탄없다는 말의 뜻은 모두 자세히 밝히다, 또는 깊은 지식으로 막힘없이 증거하다는 뜻인데 이는 학력이 없는 베드로에 대한 설명입니다. 베드로는 대대로 뱃일을 하는 무학력자입니다. 당시 농어민의 자손들이 정통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서 그저 먹고 살며 아이들에겐 유능한 어부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식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데 마치 학자처럼 막힘이 없이, 줄줄 풀어내니 제사장들과 공회원, 서기관들이 크게 놀란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율법을 공부해서 힘있는 자리에 올랐지만 제자들이 전하는 달변에 혀를 찼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와 그리고 병이 나은 사람들과도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눈앞에 드러난 현실을 저들은 어찌 다른 말로 트집하거나 비난하거나 방해할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주님과 그 사역은 예나 지금이나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실질적 삶에 직접 영향을 끼쳐서 우리들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린 현실적 능력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보단 상당히 내면화하고 인격화한 지금 시간차를 두고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조금은 다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주셔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 그 분은 지금이나 그때나 조금도 변함없이 사랑으로 일하시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환영하지 않고 있듯이 지금도 많은 자들이 주님과 복음을 조롱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했고 10-12절에서는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드러난 증거 앞에도 그들은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도 허다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로 복음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도 현실중의 현실이요, 사단의 방해도 현실입니다.

16절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거슬러 올라가 10절 한절 더 읽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첫째, 하나님의 실존과 역사는 현실입니다. 둘째 그리고 그 현실은

 

2.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에서 하신 일은 죄에 빠져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이 처한 현실은 부조리와 모순이며 질식할 것 같은 고난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현실 속 역사가운데 임하시는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실질적인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삶을 바꾸십니다. 타고난 천형 같은 죄인들.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길을 바꾸거나 어찌할 수 없는 불쌍한 인생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금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포로, 또는 상징으로나 표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복음이 없어서 죽어있는 영혼들의 곤고한 현실 한 가운데 찾아오신 가장 복되고 가장 현실적인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찾아주신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않고 선한 마음으로 받아 환영하면 그가 받은 구원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여러 증거를 영혼의 구원, 평강과 영생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금방 언급했듯이 구원의 역사에는 늘 방해하는 악한 영의 세력이 쉬지 않고 따라붙어 함께 일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12절을 함께 읽기 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는

 

3.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죄인의 구원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흠과 티가 전혀 없는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모두 거듭되는 외식이었고 타락한 제사였습니다. 결함이 있는 짐승과 중심은 제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영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죄 없는 단 한 분의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인이 남의 죄를 갚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신 구원의 역사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께서 하셔야 했습니다.(4:15) 인생은 알고 보면 함정입니다. 죄의 늪에 모두 빠져서 허우적이는 모습입니다. 성실히 살아간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소유함으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명예가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보장 못합니다. 설령 행복하다고 해도 그것은 순간에 지나버리는 짧은 기억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평강과 행복은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에는 하나님이 베풀어 놓으신 일반은총이 가득하게 널려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특별은총인 믿음까지 허락받은 특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더욱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저 공회원들 같은 욕심을 제하여 버리는 일을 할 때 맛보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안목의 눈을 제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맑은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실존을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의 삶은 한결 거룩함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끝으로 18-19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아멘.

그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4.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사용하셔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당시의 상황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주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신 후 교인들은 이단으로 규정한 공회와 당국에 의해서 심한 핍박가운데 놓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평탄한 가정이 파탄 나고 마치 탈옥죄수들처럼 늘 쫓겨 다니며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슬람권나라에선 동일한 현상이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활동하시는 영이십니다. 일하시되 택한 자를 통해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뚝심, 뱃심, 욕심으로 살던 뱃사람 베드로가 살아계신 주님께 부름을 받아 주의 종으로 거듭났습니다. 마가다락방의 성령강림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과 명령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요엘2:29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정에게 부어 줄 것이며요엘서의 예언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뤄졌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낮은 자를 택하신 주께서 그들을 높여 복음의 나팔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고전1:26-29에선 히브리인의 왕이신 하나님이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과 미련한 것들, 그리고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육체가 자랑되는 것은 유치하고 무의미하며 곧 잊혀 질 일이지만 그 육체를 탁월하게 하신 히브리인의 왕,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높이며 찬양하는 일은 영원히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육체는 결코 슬프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들은 더 이상 무능으로 절망하며 열등감으로 숨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높은 체하며 가진 체하는 교만한 것들을 부수어 주의 손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귀한 도구로 부름받아 구원의 명령권을 받은 하나님의 상속자, 자녀입니다. 한바탕 장마가 멈추고 흙탕물에서 잡은 월척, 쓰레기위에 핀 장미, 잿더미가운데 일어나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저와 여러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 손에 붙잡힌 월척과 향기로운 꽃은 주님 뜻대로 생각하고 행하고 따를 때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택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죄인구원과 하나님 나라완성과 확장, 이는 인류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있는 유산이며 역사입니다. 거긴 하나님만이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며 보존하시는 구원운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입니다. 믿음은 구원을 이뤄가는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이제 두려워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심호흡을 하고 어디든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세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뤄가는 놀라운 현장에서 저와 여러분이 주의 승리를 마음껏 취하고 선포하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구원받고 귀한 직분까지 주셨는데 전도한 성도가 지금 여기 한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담임목사인 종의 무능입니다. 종의 실패입니다. 성도의 헌신도가 바닥인 것은 종의 믿음과 덕과 천박함의 증거이니 주여. 종을 용서하옵시고 이 기도를 받으신 주여, 모두의 마음에 깊은 헌신을 새롭게 하옵시며 현수막 걸고 여기저기 달려가지 않더라도 홀로 앉아 깊이 회개하고 기도함으로 전도의 문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스스로 찾아오는 갈급한 영혼들로 빈자리가 없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