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7.주일설교<창1:26-28 우리안의 하나님 형상>
성경 중 창세기는 모든 만유의 근원과 시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작, 창조의 시작은 곧 한영혼의 시작과 아울러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그 이유와 목적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좀 더 우리 삶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성실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매우 익숙한 말씀 “우리안의 하나님 형상”입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알려면 먼저 우리가 복음을 접하기 전의 모습부터 살펴야 합니다. 창1:1-2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복음 이전의 우리들의 모습,
1.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어둠속에 있었습니다.
주변에 존경받는 이들을 보면 겸손합니다. 인생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우리 모두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인생의 허무감은 육체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절망감으로 뭘 해도 그때뿐 영혼은 늘 공허했습니다. 흑암이 깊고 깊어서 세상문화, 어둠권세아래 삶이 놓여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듯 하나님은 늘 내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나를 지켜보시는 주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며 “예수는 나의 구원”이라는 고백을 듣기까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본서는 계속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으로 하루를 닫고 엽니다. 우리의 시작과 하나님의 시작은 다릅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호소할 때 하나님은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어둡다고 소리칠 때 하나님은 빛으로 찾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끝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는 시작될 것입니다. 계시록의 끝,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하나님의 시작을 뜻합니다. 인생을 단련하고 시험한 사단의 악한 역사가 멈추고 다시는 눈물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의 끝에서 시작되는 화려한 출발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우리들의 저녁은 새벽을 향한 터널일 뿐, 막힌 동굴은 아닙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을 알리는 닭이 울 것이고 먼동이 터올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시계는 앞으로만 갑니다. 구원의 열차는 후진이 없습니다. 푸른 산야, 넓은 초원의 시작인 터널의 끝을 말씀가운데 믿음의 눈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요12:50절 앞부분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복음 이후 우리들 모습, 구원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입니다.
2. 복음으로 인한 구원은 말씀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 좋았던 다섯째 날에 이어, 많이 좋았던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에게 생명 있는 모든 것을 관리토록 위임하셨는데 장엄한 무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다고 창세기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주인공은 무대보다 중요하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멋진 작품을 보면서 창작품속에 담겨진 창작자의 마음과 특성을 쉽게 봅니다. 그래서 흔히 혼이 담긴 작품이라고 말을 합니다. 창1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하면 사람만큼 탁월하고 아름다운 존재도 없고 가장 나쁘기로도 사람만큼 추악하고 천박한 존재가 없습니다.
눅4장6절입니다. “가로되 이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리라 하였느니라. - ”우리 주님이 공생애 직전 광야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사단의 권세 앞에 참으로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듯 땅의 권세는 다분히 사단이 어둠의 근거지로 삼고 있어서 흙으로 된 우리들의 육체는 언제나 사단의 사정권내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도 먹고 눕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 즉 몸이 흙으로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떠난 하나님의 영을 다시 모셔서 회복하는 것이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그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완전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롬 7:21-25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계속되는 두 법의 쟁투는 사람마다 피할 수 없고 인간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결코 어쩔 수 없어서 다만 성실과 최선을 다하여 창조당시의 본래 있던 하나님의 형상회복의 노력과 함께 위로부터 주시는 구원만이 유일한 길인 줄 우리가 믿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의 모습대로 우리 안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는 성도들을 통한 하나님 섬김에 몸바쳐야하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통해 전달되는 생명과 지침을 잘 받아들여 말씀에 순종하고 몸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40:8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내 심중에 있나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더욱 밀착된 교제로 하나님 닮은 삶을 사는 것이 형상을 이뤄가는 일입니다. 이는 지정의적으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이 믿음은 물론 도덕 윤리적으로나 문화 정서적으로나 하나같이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렵게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내안에 이미 익숙하게 형성된 번잡한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 내안에서 세우기 작업은 시작됩니다.
나다니엘호손의 작품 큰 바위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어린 소년 어니스트는 마을입구 산 바위에 새겨진 큰바위얼굴을 보면서 그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 언젠간 이 마을에서 태어난다는 전설을 굳게 믿고 그 분을 기다리는 마음을 품고 자랍니다. 어니스트는 어찌하면 나도 그런 분을 닮아 거룩하고 온화하고 모두를 품는 사람이 될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힌 가운데 행위와 생각과 습관을 늘 살피며 성장해 전도사가 됩니다. 늘 큰바위얼굴을 보면서 그런 분이 속히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 마을에 드디어 큰바위얼굴의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네 사람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큰돈을 벌어 거상이 돼 자선의 천사로 기대했던 개더골드, 전쟁영웅 올드블루드&선더의 귀향. 대 웅변가 올드스토니휘즈, 그리고 마지막 겸손한 시인 한사람을 마을사람들은 어니스트와 함께 부푼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네 사람은 그들이 기다리는 큰바위 얼굴이 아니어서 모두 고개를 떨구고 실망에 빠집니다. 젊은 어니스트는 큰바위얼굴을 기대하면서 사모했기에 늘 큰바위얼굴의 고매한 인격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늙은 어니스트와 만난 네 사람 중 마지막 인물 시인은 어니스트와 많은 대화중 자신의 됨됨이가 결코 사람들이 기대하는 큰바위얼굴이 아니라고 말하며 둘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어니스트는 늘 하던 대로 설교를 합니다. 그의 설교는 시인의 고백처럼 사상과 삶과 현실과 자신이 읊조리는 시가 불일치하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어니스트의 설교는 그의 삶이었고 자애로움과 부드러움이 녹아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었고 착한 행위의 증거였고 어진 마음으로 평생 살아온 백발의 어니스트 그 자체였습니다. 시인은 그의 설교가 자신의 어떤 시보다 아름답고 고상하고 사랑으로 권세가 빚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감격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황금빛 노을에 물든 백발의 노인 어니스트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이분이 바로 큰바위얼굴입니다. 저 바위를 보세요. 그리고 어니스트를 보세요. 이제 우린 찾았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바라보고 비로소 큰바위얼굴을 만난 감격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예언은 실현된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조용히 자리를 뜨면서 웅얼거립니다.“아니..훌륭한 분은 반드시 나타날 거야.”
저는 젊은 날 천박한 자신을 슬퍼하며 가까운 두 분을 닮기 원했으나 결국 실망한 제게 그리스도는 찾아주셨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큰바위 얼굴보다 더 놀라운 복음이신 예수님을 찬미하고 증거합니다.
큰바위얼굴은 인격에 관련해 땅에서 끝나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생명과 관련된 영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은 안개비에 속옷 젖듯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말씀을 듣고 사모하면서 성실하게 믿음생활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손으로 이뤄지는 일입니다. 골1:15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이번엔 갈4:19절입니다. “내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그렇게 그리스도로 나타난 구체적인 하나님의 형상(고후4:4b)은 다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기까지 해산하는 수고가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세속의 부끄러운 일들을 삼가, 무슨 일에도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말에나 행실에나 늘 교회를 기억하면서 주신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간곡히 탄원하고 의뢰함으로 그 귀한 일을 쉬지 말고 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밤은 언제였고 아침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그 때 가장 잊혀 지지 않는 회복의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들 한쪽 발은 아직 흙을 밟고 한쪽 발은 하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밟고 있는 흙은 어디이며 거기서 종종 일어나는 사건은 주로 무엇이며 다른 한쪽 발이 향하는 하늘향한 영적인 창구는 어디로 열려 있습니까?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 법의 싸움은 주로 어떠한 것이며 그 영적전투는 어떻게 마무리되고 있습니까? 이시간 말씀을 받은 후에는 앉으나 서나 무슨 일을 하든 늘 주님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큰 바위얼굴을 사모하여 큰 바위얼굴이 된 어니스트처럼, 우리주님이 우리들의 모든 것이 되기 원합니다. 다함이 없는 그리움. 닮고 싶은 사모함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뤄지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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