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4. 주일설교<고후6:11-13. 마음과 생각의 터를 넓히라.>
(한 사람을 우린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의 생각을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하는 습관이 한 인격체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소식을 듣고 방문한 후에 본 서신을 보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부흥을 가로막는 여러 병폐가 있어서 늘 교회는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고 특히 거짓교사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습니다. 본문은 그런 영적인 일 외에도 교인 간 일어나는 분리, 반목과 일치, 화목에 대하여 매우 요긴한 충언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좁은 생각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사도의 서신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개인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 주님 앞에 귀한 충신들이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을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본문 13절처럼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우린 마음을 넓힘으로서 넓어진 마음을 따라 우리의 모든 삶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줄 압니다. 무엇을 어떻게 넓히고 어떻게 달라집니까? 11절입니다. “고린도인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 마음을 넓힙니다.
마음이 넓다 좁다는 말은 어떠한 정황이나 관계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자세가 매우 유연하여 옹색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 인정해 주는 배려가 넓은 것이고 또 적절히 기다려줄 줄 알아서 조급하지 않고 비록 흡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부족을 받아들여 상대방에게 가능한 한 아프지 않게 해 주려는 마음입니다. 즉 한발 물러나 지켜봐주는 여유는 넓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숨김없이 다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입술이 열렸다는 것은 마음이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려 숨김없이 정직하게 말했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숨김없이 기탄없이 말한 후에 마음이 편해지고 너그러워짐을 뜻합니다. 인간은 속내를 다 후련하게 드러내면 그만큼 편안해 집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꺼릴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가르친 뒤 그 앞에 바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거침없이 충고하고 나무랐습니다. 근친상간, 우상숭배, 성도들 간 법정다툼,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과 의혹 등 많은 오류와 악행에 대해 그는 공개적으로 바른 견해를 성령의 감동으로 직고하기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어떻게 이토록 고린도교회 앞에서 기탄없이 마음 안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있었을까? 7장 앞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그렇습니다. 바울은 진실로 고린도교회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6: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바울은 상투적인 인사로 사랑이란 말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의 선지자하면 예레미야를 들게 되고 눈물목회하면 떠오르는 바울사도입니다. 바울은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서신에 그는 늘 눈물로 글을 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자들아 했다면 정녕 불타는 마음으로 고린도교인들을 사랑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가 기탄없이 말할 수 있었던 담대함은 이러한 바울의 진실한 교회사랑과 성도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음을 열어주고 담대함도 열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도 크게 넓히는 능력이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와 닿는 순간, 어떤 힘든 충고도 마음을 편하게 열고 듣게 됩니다.
주님께 잡혀 귀히 사용되는 바울은 갖은 핍박과 오해와 방해와 질시하는 그들을 여전히 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펼치는 끊임없는 구원의 활동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도구가 돼 크고 넓은 마음으로 담대히 숨김없이 뜻을 밝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열리는 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관계의 문입니다. 관계의 문이 열리면 관계지경이 넓어집니다. 아파트 평수가 늘어나 방이 한 개만 더 생기고 거실이 넓어져도 소리쳐 기뻐합니다. 마음의 평수가 늘어나는 일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최상의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진정 사랑이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넓은 포용력과 이해력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큰 사람, 대인은 큰 몸이 아니라 넓은 마음, 마음이 크고 속이 깊은 사람입니다. 늘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아량과 배려하는 사람은 실로 많은 이들을 친구로 얻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찾아와 위로를 받고 상처를 회복하면 그렇게 고침을 받아 풍성한 관계배경을 이루게 됩니다.
2. 마음을 넓히면 관계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관계의 지경이 확장되는 것을 수리적으로만 보아 숫자에 의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열리는 관계의 승리는 머리수를 헤아리는 세상의 선거나 투표가 아닙니다. 관계가 거듭나고 풍성해지는 것은 결코 숫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않길 바랍니다. 관계의 복은 그 폭의 넓고 좁음이 숫자가 아니라 깊이와 진실여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넓혀서 심령이 옥토 되면 관계에서도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는 순결과 거룩함의 관계를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 이러한 신실한 관계풍성이 오늘 이 말씀을 받은 이후 우리 안에 풍성해지기를 축복합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본문이 바울을 통해 제시하는 넓은 마음의 터는 너그러움은 물론이요, 넓은 시야를 통한 깊은 도량과 이해도까지를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13절에서 “내가 지금 자녀에게 말하듯 하니 너희는 부모말씀을 듣듯이 편한 마음으로 넓게 받으라.”고 권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부패한 토양위에 결코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울사도는 준엄하고 냉정하게 여러 가지를 지적하고 나무랍니다. 설탕은 당뇨를 줄 수 있지만 쓴나물은 입맛을 돋게 합니다. 바른 충고는 비록 듣기 싫어도 결국 유익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사도는 부모의 마음으로 말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진 마음입니다. 어떤 것도 수용하려는 긍정적이고 정겨운 마음입니다. 다 품어 용서할 수 있고 너그러이 이해합니다. 넓은 마음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말하니 너희도 좁은 마음으로 내 말을 듣지 않기 바란다는 바울의 다정함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성품이요, 마음입니다. 바울의 관계가 이렇게 부모같은 넓은 마음으로 그 폭이 크듯이 우리들의 관계도 주님을 축으로 수직의 기둥을 확고하게 세워둔다면 얼마나 풍성할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사도는 그 관계의 뿌리가 위로부터 시작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믿고 구원받은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믿음입니다. 엄위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가 회복되는 놀라운 일은 오직 십자가로 죄를 갚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믿음은 일단 넓은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좁은 마음 안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믿음이 형성된 후로도 지속적인 구원의 완성은 긍정적으로 열려있는 넓은 마음 안에 성화를 계속해가기 시작합니다. 부정적이고 회의하고 불평하는 좁은 마음에는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도리어 의심의 밥이 되기 일쑤입니다.
얼마 전 좁은 길옆 크고 작은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는 걸 봤습니다. 측량표지선 안에 있던 건물들을 남김없이 밀어버렸습니다. 도로확장 공사였습니다. 마음의 지경을 넓게 하는 데에도 과감히 처내야 할 긍정적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믿어 섬기는데 걸림돌이 되고 또 수작을 거는 사단의 방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좁은 마음은 내 것만 고집합니다. 우리는 그간에 갖고 있던 우리들의 알량한 지식과 상식과 관습이 우리인생가운데 가장 소중한 믿음과 영생을 적극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관계의 복은 그 기초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치 못하게 하는지 오늘 주의 말씀으로 알기를 원합니다. 방해거리만 제거하면 이후로는 거침없이 나아가 주님이 원하시는 복된 복음의 증인된 삶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의 탁월한 믿음처럼 저와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들의 좁은 식견과 마음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고 넓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화평하게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형통으로 옆으로 수평간의 모든 관계가 아름답게 열릴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긍정적으로 갖고 있음에도 주님과의 관계회복이 형통치 못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1) 주님이 싫어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좋아할 때입니다. 관계의 기쁨은 언제나 함께 생각하고 같은 결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같은 뜻 아래 있지 않고 다른 결론을 향해 나갈 때 주님과 관계는 멀어집니다.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불의는 주님과 멀어지는 지름길입니다. 롬1:29-31절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친절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으려 애를 써도 이런 근본적인 죄성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주님이 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는 이러한 악한 요소들과 싸울 때 우리는 먼저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악과 싸워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며 싸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무너져도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2) 결단할 때에 결단해야 합니다. 너그러운 것과 우유부단과는 전혀 다릅니다. 넓은 포용력으로 사람을 품을 때 그 죄악까지도 어물쩍 눈감아선 안 됩니다. 그건 죄악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불쌍히 여기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복음의 진리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서 성실히 살되 세상과는 분명 구별돼야 합니다. 죄악을 다스릴 힘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수시로 결단하고 그 결단 무너질 때마다 다시 또 결단하고 기도하면서 꾸준히 연약한 자신을 살펴 다지고 또 다져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언제나 하나님과 멀어지려는 자신안의 죄성을 예리하게 관찰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호시탐탐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움직임을 사전에 막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관계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꾀와 방해는 매우 사소한 것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은 습관하나가 하나님을 만나는 데 결정적인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전도라는 목적아래 실수하게 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일상의 작은 습관이나 전도대상자와 갈데 못갈데 아무데나 다 가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TV와 인터넷만 살펴봅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는 밀려오는 각종 정보로 인터넷 이 몸살을 합니다. 점점 편리해지는 것 이면에 심각한 폐해가 영혼들을 멍들게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성도들에겐 유익보다 손실과 해악이 심합니다. 저녁을 먹은 후 자신도 모르게 TV 리모컨에 손이 가는 분은 먼저 지금 그 시간에 TV를 켜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는가 반문해야 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약 90%가 아무 생각없이 리모컨을 잡는다는 겁니다. 자녀들 집에 들어오면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켭니다. 이미 노예가 돼 있는 것입니다. 뭘 꼭 하기위해서 켜는 것이 아니라 끄면 허전한 상태가 이미 된 것입니다. 쇼파에서 코를 골던 할머니가 TV를 끄면 잠이 깨 보는 TV를 왜 끄냐고 합니다. 문제는 젊은 성도 중에 이런 사람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영혼이 잘돼 강건해지면 온 삶이 튼튼해집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영적성장과 직결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매우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받을 때에 조심스런 마음으로 살펴 자신들을 말씀 앞에 비추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에서 스데반을 죽인 그들은 말씀을 듣고 이를 갈면서 화내며 옷을 찢고 한 마음으로 달려들어 스데반은 순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긍정적인 마음과 폭넓은 시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바랍니다. 받은 후에는 오직 예수의 넓은 마음으로 이웃과 지체들을 품어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절개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기뻐하신다면 우리들의 삶은 보다 기쁜 삶으로 기쁨의 나라, 주님의 나라를 풍요롭게 전하며 증거될 것입니다. 모두 작은 마음을 벗어던지고 넓은 마음을 품어 남은 생애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복된 도구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말씀이 권능이시오니 말씀을 받은 심령마다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체질개선을 통해 크고 넓은 마음 옥토를 기경하게 하옵소서. 웃는 얼굴을 연습하여 경건의 훈련되게 하옵시고 부족한 지체와 주변을 정겹게 품어 부족한 우릴 품어 구원하신 주님 앞에 칭찬받는 모두 되게 하실 주님이름으로 축복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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