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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6.11.27. 주일설교<느4:15-18. 칼을 찬 성벽(중심)건축자

by 설렘심목 2016. 11. 29.

2016.11.27. 주일설교<4:15-18. 칼을 찬 성벽(중심)건축자

 prologue 신음. 음악. 웃음. 조율.


스룹바벨은 성전재건을 위해 일했고 학사 에스라가 포로귀환과 성전건축과 신앙개혁에 힘을 썼다면 본문의 느헤미야는 성벽건축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고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시켰습니다. 예배와 성경강해를 통해 백성들의 믿음을 촉구했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페르샤제국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장으로 매우 높은 지위를 누리다가 고국의 불행한 소식을 듣고 왕의 도움아래 본토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다 바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로 어린 시절 페르시아에 잡혀가 성실한 품성과 인격으로 인정받아 술관원장이란 높은 벼슬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헌작관(獻酌官)이라 하여 이를테면 왕의 중요한 결정을 상담해주는 자문위원같은 역할로서 술상을 마주하고 멘토가 되어 때론 친구처럼 마음의 회포(懷抱)를 풀어주는 매우 중요하고 높은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술관원장의 위치를 왕의 바로 다음가는 자리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아닥사스다왕와 거의 절친한 벗이 되어 하나님주시는 놀라운 지혜로 한 나라의 중대한 일들을 조언해주고 있던 느헤미야는 모든 자신의 지위와 신분보장역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서 1장의 느헤미야의 금식기도는(1:4~7) 그의 민족사랑과 투철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더를 왕비로 삼았던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 아닥사스다왕에게 있어서 매우 큰 벗이요, 의지가 되는 느헤미야얼굴에 어느 날 수심이 가득하자 아닥사스다왕이 그 연유를 묻고 그를 위해 흔쾌히 도움을 베풀게 되면서 본문의 성벽건축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성벽건축은 하나님의 인도로 완성되지만 주변을 이용한 악한 영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의 헌신과 주변의 방해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가는 길에 그 중심을 어떻게 바로 세워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아의 성벽건축, 우리 안의 하나님나라 건축입니다.

 

고국의 패망과 성전의 파괴 등 이루 말할 수없는 동족들의 고통을 전해 듣고 울며 금식하는 느헤미야가 있는가 하면 성벽건축소식에 분노하고 방해하는 호론사람 산발랏과 암몬사람 도비야 등 악한 인물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끄는 성벽건축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습니까? 4:7-8절을 함께 읽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리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꿔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1. 성벽건축을 심하게 방해하는 악한 영의 활동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 사단도 일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는 부족한 인간들이 사용되기 마련입니다. 그 부족한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주변의 만만치 않은 방해도 인정하셔서 믿음의 사람들을 키우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실전을 통하여 단단해져 가게 됩니다.

방금 읽은 본문에선 산발랏과 도비야무리가 예루살렘성의 재건축소식을 듣고는 심히 분노했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나 성벽이 말끔히 고쳐지고 거룩한 제사가 회복되는 일에 매우 불쾌해 어떤 방법으로든 방해하려 합니다. 악한 사단의 영이 저들 안에서 하는 활동입니다. 2절과 3절에는 성벽건축을 한껏 조롱하는 말이 나옵니다.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세우려고 하느냐?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11절에선 기습적으로 공격해 성벽건축을 포기하게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계획할 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들의 거룩 사역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분노하고 조롱하고 위협합니다. 편지도 보낸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오노평지에서 만나 거기서 죽이려 했습니다. 모두 실패하자 점령국 바사에 허위보고로 모함을 하는데 느헤미아가 백성들을 모아 왕이 돼 바사, 페르샤의 아닥사스다왕을 배신하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함 역시 실패합니다. 여러 방해에도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성벽건축을 마치게 됩니다. 52일간 산발랏 무리의 방해공작은 치열했습니다. 저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 절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단의 목적은 우리들의 목적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목적으로서 예수님을 언제나 앞세우고 살아갑니다. 그 앞에 경배하고 노래합니다. 기뻐합니다.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전합니다.. 그분의 복음을 한 영혼이라도 더 듣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기뻐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반대편에서 또 그렇게 열심히 충성을 다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어찌하든 절망하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의심하게 하며 멀리 떠나도록 유혹하며 괴롭힙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적, 원수가 바로 내 생각 내 정서, 판단과 습관과 성품성향일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그토록 집요하게 성벽건축을 방해할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4-5절을 함께 읽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2. 간절히 대적기도를 하는 느헤미야입니다.

 

평생 성도의 삶이란 영적전투의 연속입니다. 바울사도는 딤후2:3-4절에서 성도를 군사로 표현합니다. 또 경기하는 자로 표현합니다. 다윗은 시편94편 외 여러 곳에서 대적기도 할 때 하나님을 원수갚아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35편 서두에서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시109편에서는 그 자녀가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헤매며 구걸하고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더 심한 저주가 뒤를 이어 나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롬12:21절 말씀과 매우 거리가 있게 들립니다. 6:28절에도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저주기도가 가능하냐는 겁니다. 이러한 문제는 반드시 말씀으로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의 윤리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러므로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주는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저주기도나 느헤미야의 대적기도는 로마서나 누가복음의 주님말씀과 어떤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12:31절을 함께 찾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즉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에게는 함께 대적기도로 맞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몰라서 실수하는 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 우상을 섬기며 교회를 핍박하는 무리나 단체는 적그리스도 쪽에 있으므로 우리는 단호하게 대적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크게는 공산사상과 자유주의 신학과 있고 후리메이슨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게는 점쟁이, 무당 따위요 이단교주들이 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은 악하고 흉측한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교회와 맞서서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들을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일곱 번에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도덕의 문제를 말합니다. 윤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실수를 말합니다. 도둑질, 간음, 반란을 주모하다가 붙잡힌 자 등 피차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용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정면공격하고 훼방하는 일은 비록 사람에게 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다메섹길 위에서 바울을 부르실 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일입니다. 곧 택자들의 모임인 성도의 무리들을 공격하는 일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사람들과 암몬사람들과 아스돗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성벽을 건축할 때 심히 분노하면서 조롱하고 협박했습니다. 페르샤에 알려 모함하고 그것도 안 되자 칼로 공격을 준비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력한 증거입니다. 잠시 전 말씀엔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했노라고 느헤미야가 고발합니다. 느헤미야는 분한 마음에 무섭게 대적기도를 올립니다.

 

은혜의 시대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주님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옆으로는 서로 사랑하여 주의 계명을 이뤄가야 합니다. 그 계명은 교회의 목적이요, 사명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도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고 뜻이 이뤄지면서 주님 나라는 세워집니다. 오늘도 악한 사단은 환경가운데 사람가운데 건강을 통해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리려고 갖은 수법을 다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그토록 공격할 때 느헤미야의 조치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본문 12-14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있게 하고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3. 대적과 맞서 가족과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명하는 느헤미야입니다.

 

고후10:4절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느헤미야의 말을 들은 유다사람들은 칼과 창을 가지고 섰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의의 병기인 믿음을 갖고 대적들 앞에 서있어야 합니다.

6:14-17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는 각종 의의 병기를 말함으로 성도는 마땅히 악한 대적과 하나님의 신령한 각양 무기를 잡고 서 있어야 함을 촉구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 증거한 우리가 잡고 서 있어야 할 영적 병기를 살펴보며 말씀을 마칩니다.

 

1)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허리는 중심을 말합니다. 인생과 인격의 중심이 세상지식과 영리함이나 경쟁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진리여야 합니다. 여기서 진리는 복음이 요구하는 정직과 성실과 충성과 결단을 포함합니다.

 

2) 의의 호심경입니다. 목에서 복부까지 가리는 구리로 가슴과 배를 보호하는 호심경은 우리 연약한 감정과 생각이 주님 의로 가려져야 한다는 것인데 무엇보다 복음이 갖는 의의 능력, 곧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해야하며 이 때 일어나는 선한 도덕과 바른 양심과 분별력까지를 말합니다.

 

3)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어야 합니다. 노래처럼 주님은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선 몸을 드림으로서 평화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죄인과 죄인끼리 평화를 이룬 것이 주님의 복음이 갖는 능력입니다. 즉 복음을 받은 사람은 어딜 가도 화해와 평화의 도구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물론 희생의 십자가는 필수적 선결조건이라 내가 죽지 않고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4)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습니다. 모든 것에 믿음을 더하면 능력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온전한 신뢰로 모든 악한 자의 불화살인 의심과 절망과 실의, 공격과 열등감과 못된 혈기와 시기심, 수군대는 것 등을 이길 수 있습니다.

 

5) 구원의 투구입니다. 투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합니다. 구원으로 받은 영원한 삶의 보장과 믿음으로 인한 성경적 판단은 어떠한 악한 대적 앞에도 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어떤 것에도 흔들릴 수 없는 마지막 최고의 자산, 영원한 생명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6)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는 강력한 능력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말씀 믿음으로 받을 때마다 우리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영혼을 사랑한다면 어디까지가 사람이고 어디에부터 사단의 활동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건축을 방해하는 산발랏과 도비야무리에 대대 대적기도만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허리에 차도록 건축자들에게 명령합니다. 저와 여러분 심령과 가정과 교회 안에도 늘 현대판 산발랏과 도비야는 교묘히 전략을 연구하고 공격을 계획합니다.

단호한 결단, 겸손한 자세로 우리는 악한 대적들과 지속적으로 싸워야 할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진리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무장하고 기도하되 분별력을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좌절하지 않기 바랍니다. 절망은 늘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니 이미 우리들 가슴 안에 시작한 지성소건축은 지속적으로 아름답게 지어질 것입니다. 거기 그리스도를 향한 끝없는 노래가 있어 우리 모두의 기쁨과 목표되신 주님이 왕 되시는 영광이 높이 드러날 줄 믿습니다. 그 귀한 일에 저와 여러분 복된 도구되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