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4.10. 주일예배<창17:9-14. 영원한 언약의 증표, 할례>
출4:24-26에서 모세는 하나님 명령으로 애굽으로 가던 중 하마터면 하나님 손에 죽을 뻔합니다. 그 때 지혜로운 아내 십보라는 아들 게르솜의 양피를 베어 죽어가는 모세의 발 앞에 던짐으로 모세의 생명을 건집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 본문의 명령인 할례의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명령, 할례는 단순히 피부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성화된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여러 가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할례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려는 첫째 목적이 있는데 이를 남자의 양피 끝 꺼풀을 베어냄으로 제사장된 가장이 하루 몇 번씩 눈과 손으로 언약의 증표를 확인하게 하신 겁니다. 13절 말씀처럼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신”할례는 오늘 우리에게 더 많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제시하고 또 요구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 그 첫 째는,...
* 정결례로 드리는 고백입니다.
고전7:18-19절을 찾아 함께 읽겠습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구약에서 지켜지던 할례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지켜도 안 지켜도 무방한 것이 됐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방 들은 말씀처럼 할례자체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집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할례로 약속된 것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즉 언약의 영원성, 곧 마28:20절의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과 그 언약에 따른 백성들의 성결, 즉 살전 5: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1. 언약의 영원성입니다.
그렇습니다.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된” 할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선민뿐 아니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는 남자는 난지 8일 만에 고추 끝에 덮인 꺼풀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영원한 언약이라 대대로 지켜야 합니다. 아이는 태어날 때 울고 8일 만에 또 자지러지게 울어댈 것입니다. 순간의 통증이 영원한 약속의 증표로 몸에 남겨지는 겁니다. 그것도 남자의 가장 중요한 곳에 새겨서 소변 때마다 보고 확인되는 증표, 그러므로 할례의 자국은 육체가 있는 한 지워지지 않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기억해야하는 언약의 표시, 거룩한 sign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며 만복의 씨가 되는 이 언약의 싸인이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불행의 씨가 됩니다.
2. 끊어내는 정결과 성화입니다.
먼저 잠4:23절을 기억해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절대적 율법인 할례의 신앙실천적 해석은 이미 예레미야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기도 합니다. 렘4:4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그렇습니다. 마음의 가죽을 벗기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내면 심령의 일부분을 덮고 있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양피보다 더욱 불결하고 수치스런 마음의 껍데기는 때가 굳어 피부처럼 변한 고질병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제사장인 남자들의 양피를 제거해 가장 중요한 부분에 교훈을 새기게 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멀리함으로 양피 베어내듯 잘라내는 결단과 실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속에서 뭔가를 끊어내는 충성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은혜의 시대 속에서 찾는 마음과 삶의 할례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즉, 버릴 것 버림으로 취할 것 주께 얻는 지혜와 결단이 오늘 말씀 듣는 중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정녕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받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끊어내는 정결과 성화의 과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그 할례의 헌신은 어디까지인지 말씀을 따라 함께 나누며 은혜와 결단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에 의존함으로서 세상과의 닻줄을 하나하나 찾아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세상적인 방법으로 기뻐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분노하던 것들을 성경적으로 바꿔가기 시작해보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즉 기뻐하던 이유가 내 중심적으로 이뤄졌던 걸 우리는 철저히 돌이켜야 합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상대방의 유익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나만 바르게 잘살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다 함께 바르게 잘 살아야 합니다. 집안의 좋은 소식이 이웃을 시기나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면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은 아파트당첨에서 떨어져 속상해하고 있는데 거기다 당첨된 아파트 층수가 로얄층이 아니라고 불평하는 사람은 지각이 없고 다분히 세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이번에는 분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생각해봅니다. 분노는 자신이 기대한 것과 실제의 편차가 심하면 나타나는 흥분입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도 유난히 크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 어쩌면 바보같이 태연한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라는 것이 상황과 배경보다는 분노하는 당사자의 내면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해도 늘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넉넉해도 늘 이를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이 참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붙잡혀 있기만 한다면 그는 자신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된 신분으로서의 기쁨과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노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 앞에 의분을 참지 못하며 목이라도 걸고 정의를 외치는 열심입니다. 반드시 분노하여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할 일을 자칫 잘못 참고 침묵한다면 그것은 비굴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성전 뜰이 장사꾼으로 가득한 걸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약속을 저버리고 이방신 앞에 절하고 섬기는 것에 진노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분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라오는 감정으로 힘들 때에도 우린 즉시 이 흥분상태가 주님의 영광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흥분하면 모든 판단기능이 멈추게 됩니다. 평소에 훈련이 된 것 같아도 막상 화가 치밀어 오르면 전후사방 상관없이 일을 망치게 됩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겁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나를 통제하지 못하여 나남 모두를 해치는 겁니다.
다음은 절제하는 할례입니다. 언제가 했던 “청년기는 대실수”란 말이 기억납니다. 뭐하나 절제하기 힘든 나이에 번번이 실패하는 결단들, 그럼에도 실망치 말고 우리는 지속적인 시도를 거듭해야 합니다. 한번에 다 이루겠다고 하는 결단까지는 좋으나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한 번에 안 돼도 꾸준히 시도하면 결국 좋아질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영원한 언약의 증표, 할례”입니다. 언약의 증표가 남자의 중요한 곳 표피를 베어내어 선민자국을 낸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예레미야의 선언처럼 우리들 마음의 가죽을 벗겨서 여호와께 속한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제언을 들으면서 말씀이 요약됩니다.
1) 습관의 할례입니다. 평생 우리를 포로삼아서 인생을 필경 피폐하게 만드는 습관이 인간에게 너무 많습니다. 술, 담배. 잘못된 이성욕, 말버릇, 식생활, 인사성, 소비행태, 도박, 훔치는 것, 탐심, 시기심, 궁시렁대는 것, 바로 쳐다보지 않는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악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결국 내안에 감쪽같이 숨어있어서 내 인생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지금까지 계속해온 습관의 결과라는 말에 동의하시면 아멘들 하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사람이 된 것 아닙니다. 아주 서서히 버리지 못한 습관으로 이렇게 된 겁니다.
물론 좋은 습관도 있어서 그나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우리모습은 이제부터 만들어가면 됩니다. 거듭 일러드리거니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먼저, 습관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잘라내야 할 부분을 과감히 도려내는 용기와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결심을 주께서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한다면 우린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나쁜 습관, 그게 얼마나 내 인생을 무너뜨렸는가를 생각하면 여러분은 결단을 훨씬 더 쉽게 할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몇 번 죽을 뻔 했던 어느 고교교사가 사후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는 인생을 묵상했고 인생을 누가 창조했나 생각하다가 전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게 한 게 비만이란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식사량을 조절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전혀 다른 내면과 외모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랜만에 본 사람들은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거듭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거듭남의 탄력으로 교장이 돼 회고합니다. “나를 거듭나게 한 건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비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만은 밤참을 맛있게 먹던 밤참습관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못된 습관이 나를 망칩니다. 그러나 돌이켜 깨닫고 몸을 움직여 행하면 그 나쁜 습관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은 다른 나를 찾아 새 시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2) 우선순위의 할례입니다. 초등학생에게 늘 하는 말씀이 여전히 우리들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주님 앞에선 다 철부지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을 왜 어리다고 합니까? 잘잘못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선악은 알아도 피해가거나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숙제부터 하고 놀아야하는데 놀고 난 뒤 숙제를 하려다가 번번이 낭패인 건 아직 어린 마음에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해도 될 일을 늘 혼동합니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도 혼동합니다. 신앙의 문제도 근본은 늘 우선순위의 문제였습니다. 진실로진실로 하나님나라와 예수님과 교회를 먼저 생각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운데 잘못된 우선순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잘라내는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되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순위 제 일에 두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일은 얼마나 소중하고 중차대하며 시급한 일인지 모릅니다. 생각의 근본에 늘 하나님을 먼저 모시는 일은 아름답고 견고한 신앙의 기초요, 삶의 능력입니다.
3) 가치관의 할례를 받기 바랍니다. 뭐가 중요한지, 뭐가 사소한 일인지 뒤섞여 있다면 매우 곤란합니다. 중요도의 위치가 바뀌어 있거나 잘못 되면 그는 실로 계속되는 낭비로 비틀거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의 잣대로 보아 사소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소중한 것부터 붙잡는 할례를 받기 바랍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요, 가장 중요한 일도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순서와 가치관이 변하면 여러분의 인생이 확실하게 바뀝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린도전서 말씀이 빌3:7절 이하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으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라고 증거 합니다. 진정 크고 소중한 것을 위하여 그동안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 바울사도의 고백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믿는다면서 여전히 개인의 삶과 가정의 형편과 직장의 문제가 번뇌로 남는 그 이유를 오늘 우린 삶의 형편과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할례의 문제인 것을 말씀을 통해 알았습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게 인생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끊임없는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관계 속에서 풀어가게 됩니다. 여기 가장 중요한 관계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하나를 오늘 우리는 가슴에 새깁니다. 하나님과의 형통한 관계는 바로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여 그분의 기쁨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형통가운데 할례라는 중요한 명령을 오늘 모두들 정리한 줄 믿습니다.
뭔가 더 나은 삶과 사역을 위해 반드시 끊어내야 하는 것들이 감쪽같이 자리 잡고 있는 걸 성령의 도우심으로 찾아내기 바랍니다. 그렇게 끌어내 결박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고 추방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애야 할 습관인지, 가치관인지, 우선순위인지, 또 다른 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본문에 보면 할례는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하지 못해 의원되신 주님이 성령의 칼로 잘라내셔야 합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거기까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오는 게 중요합니다. 할례받지 않은 자는 “민족 중에 내침을 받으리라.”고 까지 엄히 하신 이 할례의 명령 앞에 크고 귀한 결단하여서 현재 당하는 많은 고통과 기도제목이 술술 연달아 풀어져 기쁜 간증, 감사의 증거자들이 되기 예수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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