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3. 주일예배<고후2:14-16. 그리스도의 향기, 성도>
聖徒, 성도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이름입니다. 거룩한 길을 가는 무리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도는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로 이뤄진 모입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삶은 결국 영생하시는 천국의 주관자요. 온 만유의 주재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로 그 길을 확정 받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절 한절을 살피면서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가를 도전받는 귀한 생명의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 14절을 함께 읽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심으로 향내를 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창1:26절에 보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에게만 있는 특성 중 가장 귀한 특성입니다. 어떤 제품이든지 그 제품을 만든 기업과 창안자의 마음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든 대표브랜드가 되는 제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품은 그 회사의 이미지를 온 몸에 담고 있습니다.
삼성, 엘지, 대우, 또 기아차, 대우차, 현대차, 쌍용차, 신기하게도 그 특성과 이미지에 있어 매우 다른 맛으로 다가옵니다. 인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같은 이가 없습니다. 누구 누구하면 언뜻 떠오르는 느낌과 감정이 다 다릅니다. 인상, 이미지란 마음속에 새겨진 대상의 모양을 말하는데 거기엔 겉모양보다 내면의 모양 즉 내용이 더 많은 무게를 차지합니다.
신기하게도 목회자와 무당을 세워 놓으면 목욕탕에서도 가려낼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예수쟁이의 독특한 냄새가 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늘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늘 이기게 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예수 안에서입니다.
이 말은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사용합니다. 종종 생략이 되기도 하는 “주 안에서”라는 말은 상당한 품격을 지닌 말로 다른 말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김, 승리는 어디까지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승리를 기초로 이뤄져야 합니다. 예컨대 어떤 분쟁에서 이기긴 이겼는데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반면 비록 싸움이나 분쟁에서 졌다하더라도 상대방이 감격하고 미안해하며 고마워한다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입니다. 이렇듯 진정한 의미의 승리는 그 결과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인 참 평강과 기쁨이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주 안의 승리를 허락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주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길 힘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겐 의로움이나 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주께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셔야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승리가 가능한 것입니다.
빌4:13절에서 바울사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능력주시는 자, 주 안에서”란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분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라는 것입니다. 즉 본문 14절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향내는 하나님의 전적인 공급에 의존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인생 안에 있는 능력이란 죄를 짓는 능력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도 요셉도 아브라함도 노아도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믿음과 능력을 주심으로 의인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많은 증인들이 하나님의 공급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출4:10절에서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하면서 하나님명령듣기를 피하던 모세,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듣고도 13절에선 보낼만한 자를 보내시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아론을 부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20절엔 특이한 대목이 나오는데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 지팡이는 4장2-4절에 보여주듯 17절에 명하신 이적, 즉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지팡이였습니다. 후에 모세는 이 지팡이를 들어서 홍해를 가르고 각종 재앙을 일으키고 또 잠잠하게도 합니다. 그래도 애굽의 바로가 완고하여 백성들이 고달픔에 못이겨 불평할 때 6:12절에서 다시 “나는 입이 둔한 자”라며 사명을 거부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무능을 앞세워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피하려고 했던 모세, 그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끝까지 백성들을 인도합니다. 모세가 손에 든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동행을 말합니다.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채색 옷을 입고 형들의 동태를 살펴 고자질하며 자란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총리가 되기까지는 창39장에서 거듭해 밝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때문이었습니다. 노아는 성경이 말하는 몇 안되는 의인 중 하나입니다. 창6:9절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런데 그 완전한 신앙인격과 의는 무엇으로 가능했는지를 바로 직전의 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성경은 노아가 먼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밝힌 뒤 그가 당세에 완전하고 의로웠다고 증거합니다. 즉 노아의 완전과 의는 여호와께 입은 은혜로 말미암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보존하려고 했던 겁쟁이였습니다. 아내를 바로에게 팔아먹은 염치없고 무능한 남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엄청난 믿음의 복과 자녀와 기업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들 이삭은 그래서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 나이 100세에(창21:5)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창26:6-11절에 보면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과 꼭 같이 그랄 사람들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보존합니다. 야곱은 아시다시피 끝까지 속고 속이는 인생이었습니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네 명의 아내들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듯 오가며 삼촌 라반에게 속고 도망치고 마지막엔 열 아들들에게 속아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말처럼 험악한 세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언약으로 인해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늙은 야곱에게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을 만나 애굽의 고센 땅에서 풍족하고 복된 여생을 보내게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타락한 인간의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찬송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겐 그러므로 결코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그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죽은 영 살리시고 고치셔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열두제자 선택만 봐도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열두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세, 아브라함, 야곱보다도 더 부족한 면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언행에 있어서 어찌나 급하고 경솔한지 심지어는 십자가죽음을 예고하시는 주님께 함부로 말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넌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야단맞습니다.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그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와서 세 번째 수난을 예고한 주님께 “주의 나라에서 좌편, 우편자리를 청탁하기까지 했던 우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살로메의 아들 요한이 주님의 명령으로 깊은데 그물을 던져 기적적으로 잡힌 고기를 쪼그리고 앉아 153마리라는 것을 확인한 지나치게 곰살스런 자였습니다. 그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믿기 어려운 일로 인해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임이 거듭 확인되는 놀라운 현장입니다. 그런데 거기 앉아서 고기 숫자를 세고 있다는 건 그의 스케일이 그만큼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밧모섬에서 환상 중 기록한 게 요한계시록 아닙니까? 제자들의 부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성경에서 지적하는 것 하나만 더 증거하고 마무리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란 별명을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전도 때에 주민들이 냉대하자 불같은 성격에 참지 못하고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에서부터 저들을 태워버리라고 할까요?”합니다. 전도에 냉대한다고 그냥 확 전부다 불살라버렸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제자들 중에 그래도 꼽히는 자들이 이랬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지 위로받기 원합니다.
2. 불신으로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를 전하는 성도입니다.
당시 로마 개선군이 입성해서 우상신전 앞에 이르면 포로의 우두머리를 처형했는데 이날 로마군들 목에 걸린 승전축하화환의 꽃향기가 포로에겐 죽음의 향기가 된 것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겐 그리스도의 향기로 복음과 그 삶이 전해지지만 불신자들에게 복음은 결코 복음이 되질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불신자들에게 매우 심기불편한 전설이나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신화나 만들어낸 우상의 이야기로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는 이들을 기분나빠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까운 사람들 중에 모든 것이 다정해도 예수복음만 나오면 “다 좋은데 그것만은 제발 말하지 말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의 향내. 그리스도의 냄새가 불신자들에겐 사망의 냄새라고 말합니다. 즉 불신세상에는 복음이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몸에 좋은 보약이 입에는 쓴 것과 같습니다. 전도자를 끝내 피하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지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우리는 불신자의 결국이 영원지옥에 던져지는 사망이라는 것을 반드시 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냄새를 생명의 향기로 바꾸신 주님을 땅끝까지, 생명 끝날까지 전해야 할 거룩한 의무가 우리의 삶에 가장 큰 가치요, 보람이요, 기쁨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17절을 함께 읽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3. 하나님의 말씀은 혼잡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지극히 단순한 영생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결코 어느 것과도 타협하질 않습니다.
진리는 어떤 것과도 섞일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선언하는 진리는 단순히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창조주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 설명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들은 후에 전도에 관한 한 극히 단순해지시기 당부합니다.
예수는 모든 자의 구세주 되심을 전한 뒤 그러므로 예수 믿어 복된 삶을 살아가시라고 축복하기 바랍니다. 그런 단순한 전도를 통해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전해집니다. 그 주님은 미약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리스도, 즉 영생의 향기가 소망가운데 끊이지 않게 하시는 주님을 마음껏 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귀한 믿음의 선지들을 이제는 보다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서 살펴야 할 줄 압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연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였습니다. 때때로 좌절하여 주님께 실망을 드리고 무너져 내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곁에 계셨고 채우심으로 귀한 곳에 세상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시선을 옮겨서 끝내 우릴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주님 보길 원합니다.. 그 주님께 소망을 두고 우리 몸과 영혼을 의탁하며 오직 주님을 신뢰함으로 새 영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그래서 영혼이 새로워지기만 한다면 그 영혼의 새로운 능력을 따라서 모든 삶과 내면이 전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팔아먹었던 자가 변하여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는 크고 놀라운 변화일 것입니다. 목숨이 두려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떼었던 자가 주님을 위해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처럼 점진적이면서도 극적인 변화일 것입니다. 다만 이 시간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제자 삼으시고 동지가 되게 하셔서 구원을 확신하며 성도란 이름 주신 것에 먼저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깊이 묵상하며 말할 수 없는 영혼의 즐거움을 누리기 바랍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의 남은 인생길은 이 믿음 붙잡을 때 더 이상 지뢰밭이 아닙니다. 더 이상 살얼음판이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운 나그네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직 기쁨과 소망과 감격이 넘치는 삶인 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영혼이 삶에 맛을 내게 되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삶에 맛이 넘치면 그것을 풍미로운 삶이라고 합니다. 물질이 풍미의 조건이 아니라 영혼의 풍성이 인생의 풍미이고 영생의 풍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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