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14. 주일예배<민35:1~15.(1-8)레위인의 거처와 도피성>
레위는 과거에 형 시므온과 함께 누이동생 디나가 세겜추장 아들에게 강제추행을 당하자 청혼하는 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고 할례를 한 세겜일족들이 한창 불편할 3일간 비겁한 칼을 휘둘러 야곱의 분노를 샀던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후에 야곱이 늙어 12형제들을 마지막으로 축복할 때 저주의 이유가 됩니다. 창49:6~7절에선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야곱의 예언축복기도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저주가 축복으로 변하여 선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 때에 레위인의 헌신으로 인해 큰 칭찬(출32:26~29)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칼로 저주받은 레위지파가 다시 그 칼로 충성헌신하여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분에서는 거기 레위인에게 48개의 성읍을 주고 그 중에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마련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듣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내용 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1. 과거를 묻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주란 말이 두 번씩이나 나오는 그 때에 레위는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보인 레위인들의 충성은 조상 야곱을 통한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선언을 무효화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의 하나님이시고 미래의 하나님이시지 과거에 집착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만 밝은 장래를 위해서 과거의 복된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이는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기억하시는 언약일 뿐 과거의 죄과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성도란 넓게 보아 모두 레위인들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돕는 봉사자들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보혈로 과거가 덮여졌기 때문입니다. 시편103:12의 고백처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묻지도 않는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 여기 없길 바랍니다. 청년은 꿈을 꾸고 장년은 현실에 살고 노년은 추억 속에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가 직무인 성도, 레위인들은 성경에서 그 나이를 50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자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청장년들입니다.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바울사도의 고백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앞에 늘 새로워지는 영적인 사람들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레위의 과거를 묻지 않고 우상숭배한 골육지친을 처단한 것을 충성으로 여겨 크게 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그렇게 예수믿는다는 사실 하나로 모두 용서받고 새로운 출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 성취된 예언입니다.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받은 기업에서 레위인에게 거주할 성읍들을 주게 하고 너희는 또 그 성읍들을 두르고 있는 초장을 레위인에게 주어서” 창49:7절의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고 한 저주가 도리어 풍성한 복의 예언이 되어 12지파의 각 거처가운데로 흩어져 배속돼 제사를 담당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 예언은 이뤄지고 만다는 것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3. 레위의 거처 중에 도피성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들이 피하게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42성읍이라.” 하나님께선 고의성이 없는 과실범을 보호하고자 도피성의 건축을 명령하셨고 그 장소가 바로 레위인의 구역 내 성읍 가운데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실수로 한 과실범에겐 현대의 형법도 일정부분 정상을 참작합니다. 그러한 보호구역이 레위인의 성읍가운데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의 성읍에 도피성을 두지 않고 레위인의 성읍에 도피성이 있다는 것은 레위인의 또 다른 영광과 부담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감히 하나님의 왕같은 제사장, 레위족속의 영적후예라고 믿고 사는 저와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들의 구역 안에는 어떤 도피성이 세워진 것입니까?
1) 새 계명의 도피성이 세워졌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도피성인 줄 믿습니다. 요13:34-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안에 들어왔다면 그는 이미 도피성가운데 주의 평강을 누리는 자입니다. 아직은 믿음의 그릇이 옹색하고 미숙해 잘 안되더라도 새 계명을 붙잡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음의 씨름을 한다면 그는 머지않아 반드시 도피성에서조차 자유와 평강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도피성에 피한 범죄자는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후 값주고 사들인 우리의 삶에서 다시 살고 계십니다. 대제사장이 영원히 살아계시니 우리는 다시 옛 고향 세상으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세계명의 도피성에 우리의 죄과를 의뢰하고 영원히 예수의 품 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세워진 의의 도피성입니다. 입술로 주를 시인하여 구원받아 믿음으로 받는 의는 우리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 칭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할 때 이미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롬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이는 어린양의 제사를 통한 온전한 용서와 의롭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양 예수의 보혈에 의지하여 주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의의 도피성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피성은 어느 성읍에서도 하루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하루거리에 6개 성읍이 건축됐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실수한 범죄자는 속히 달려 하루면 도피성이 나타납니다. 실수로 저지른 범죄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신속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덴 이후 모든 인류는 죄인의 신분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도피성이 되어 주셨습니다. 레위인이 모이는 성회에 자신이 도피성 되시고 새 계명 안에 믿음으로 들어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를 시인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하시고 보호하시며 장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선 에덴의 추방과 인간이 알고 저지른 죄와 모르고 저지른 모든 죄를 자신의 극심한 고통과 피로 덮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들에겐 과거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도피성에 몸을 피하여 의탁했던 범죄자를 고향에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의 본향은 하나님이 계신 거기 천국입니다. 요14:3입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당신이 먼저 가서 처소를 마련하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일 줄 믿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양 옆에 두 개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한쪽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지옥을 갔지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시인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구원받은 강도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오늘 기도할 때에 저와 여러분.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주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기억되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주님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내 자손들을 기억하소서. 그리고 오늘 내안에 가득하소서. 넘치소서. 아멘.
기도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시여! 주님이 영원한 생명을 쥐고 계시고 또 영생이시니 우리가 과거로 못 돌아가게 됨을 인하여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돌아갈 거기 주님의 영원한 나라는 등도 없이 환하고 시간도 없이 영원하며 사자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어 함께 노닌다고 하셨으니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신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 주시는 평강을 모두 땅에 흘리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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