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8. 주일예배<계3:20.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
세상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의 오직 한분이신 절대적 존재이신 것, 우리가 믿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모든 신들과 인간과 눈에 보이는 모든 만유를 지으셨고 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한 사랑이시고 공평하시며 선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유일하신 메시야 즉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계시로 찾아오셔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전하는 말씀 중 한 구절입니다.
주님은 아시아 일곱교회에 각기 다른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 가장 칭찬받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였고 책망을 많이 받은 교회는 본문의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요충지로 각종 산업이 발달해 비교적 풍부한 생활을 즐기는 부자도시였습니다. 언제나 풍성은 한구석 부패할 수 있는 소지를 갖게 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채 풍요로운 생활로 부패하여 한마디도 칭찬을 듣지 못합니다. 교회가 부패한 세상에서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면 책망을 듣습니다. 본문 위 19절을 보면 사랑하기에 책망하고 징계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회개와 열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오늘 우릴 찾아주신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본문 한 번 더 읽기로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은 지극히 인격적이십니다. 느끼시되 깊게 느끼시고 진실을 원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그래서 알고보면 간단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뒤로하고 다만 사랑가운데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그 조건이 있는 동안만은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조건들은 모두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얼굴이 예쁜 것은 건강이 나빠지면 속히 무너집니다. 재산도, 가정환경도, 학력도, 건강도, 인격도, 사랑의 관계를 북돋을 수는 있지만 사랑의 절대적인 요소는 되지못합니다. 사랑은 그저 네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넉넉한 내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교회문밖에 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음성을 듣고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문을 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후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여러분을 노크하는 중요한 주님의 메시지, 그 첫째는, . .
1.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
이미 밝혔듯이 우리 주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친히 인생들을 살피시고 도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전지전능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첫날 두려워 떨며 문을 겹으로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실 때에 닫힌 문을 그냥 통과해 오셨던 것 기억합니다.
과학과 무관한 주님의 절대적인 신성과 초월성을 선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책망받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문밖에서 두드리니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잠긴 문과 상관없이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굳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 자유의지에 의한 자원하는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가치는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며 기뻐서 청구하고 받아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지만 열라는 주님 음성 듣고 스스로 문을 열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굳게 닫힌 바울의 마음 문을 다메섹 길 위에서 여지없이 부서 버리고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사흘간 앞을 못보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의 선포로 눈을 뜹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은 책망받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자원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7:7절 이하에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두드릴 때 주님의 문, 천국의 문은 믿음으로 열릴 것이고 한편 주님이 사람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 죄로 인해 갇혔던 감옥의 문, 구원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여기 그 대상자는 “누구든지”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낮은 자 높은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다 존귀한 영혼이요, 소중한 생명들입니다. 그렇게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기 바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굳은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설교를 통한 성경말씀으로 노크합니다. 관계로, 건강문제로, 직장진로로, 물질문제로, 자녀문제로, 부부문제로, 각종 고민으로 노크하십니다. 가장 바람직하고 무난한 것은 말씀으로 찾아와주실 때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중환자실에서 우리 문을 두드리는 주님음성을 듣습니다. 교통사고현장에서 주님음성을 만나게 됩니다. 부도가 나서 몸을 숨기는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가출한 자녀를 찾아 나섰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기도하는 가운데 찬송부르다가 주님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듯 시력 약하고 게으르고 무능한 양떼는 목자의 음성, 곧
2. 주님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방금 들으신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음성인 말씀을 들어야 영혼이 살아나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셔서 말씀으로 존재의 의미와 권세와 그 증거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모든 원하시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특별히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영존하시는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즉 주님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서 그 분의 뜻 앞에 순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삼상15:22절에서는 사무엘선지자가 불순종한 사울왕에게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귀 기울여 듣는 것, 주의 뜻을 살펴 헤아려 그 뜻을 따르려고 애를 써서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려 하는 것, 이것이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뭐보다 낫다고 했습니까?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귀 기울여서 경청하고 긍정적으로 받아 그대로 따르려하는 것이 수양의 기름 즉, 극상품의 제물과 예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고개가 꺽여 임금의 음성에 기울이는 내시의 귀가 되길 축복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조선시대내관처럼 우리의 왕 주님음성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매우 논리적입니다.
그냥 문을 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어본 후 확실하면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두드린다고 함부로 문을 열면 위험합니다. 요10:9-10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주님음성인지 이리의 음성인지 구별하는 은혜로 지혜와 분별력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3. 마음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주님음성은 사랑의 음성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의 허울을 쓰고 그 이름을 빙자해서 사랑인척 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고 오직 예수로 인한 것이냐는 겁니다. 다른 어떤 불순한 의도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십자가의 대신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 그대로라야 합니다. 들리는 음성이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의 음성이면 주저하지 말고 즉시 문을 열어야 합니다. 환영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1:12”고 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환영하는 자에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과 천지와 환경조차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여는 것으로 됩니다. 뭔가 대단한 것으로 값을 치르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골고다 고난의 언덕에서 십자가 죽음의 형벌로 우리들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주님의 음성 앞에 항상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마음 문을 열고 결단의 문을 열고 감사의 문과 긍정의 문을 열게 되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주님이 들어오셔서 더불어 먹게 됩니다.
주님 내안에 오시기만 하면 주님은 나로 더불어,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함께 먹게 된다고 하십니다. 내안에 가득했던 내 주장과 내 소견, 내 감정들을 모두 비운 뒤에 주님을 초청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내안에 주님만이 풍성을 이루게 됩니다. 본문에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은 주님과 더불어 영이 연합해 기뻐할 때 그것을 천국의 잔치로 비유하게 된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주님과 한 뜻되어 기쁨의 잔치가 열리면 거기서 함께 취하게 되는 수많은 영혼과 육체의 포도주와 떡이 있습니다. 거저주시는 이 선물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 늘 넉넉하게 채워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풍성의 주님은 인생과 다른 양식을 구하십니다. 요4:34절에 시장기를 느낀 제자들이 주님께 뭘좀 드릴까하는데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양식인데 이 시간 우린 어떤 별미를 드렸는지 아니, 우리가 주님의 어떤 별미가 되어 드렸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소홀히 하여 게으를 때 주님은 목마르고 주려 허기진 마음으로 우리들의 순종과 섬김과 헌신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몽돌인 여러분. 우린 살면서 많은 불행과 아픔을 겪습니다. 그런데 서러움, 서러움해도 배고픈 서러움이 가장 힘든 서러움입니다. 요즘은 너무 풍족해서 실감이 나지 않는 말씀이지만 배고픈 서러움은 어떤 것보다도 서럽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린 평생 배고프지 않기 바랍니다. 먼저 주님의 마음이 허기진 배로 시장기를 느끼지 않고 든든하시도록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위해 성실할 때에 주님은 포만감을 느끼시고 기뻐하십니다. 이삭도 아들을 축복할 때 별미를 청구했습니다. 맛있게 먹고 좋은 기분으로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풍성하고 값진 천국시민다운 삶을 이 땅에 살면서, 채우시고 고치시고 복되게 하신 당신을 자신있게 선포하기 원하십니다. 그 첫 문을 오늘 본문으로 열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과 더불어 주님이 베푸신 놀라운 것들을 마음놓고 가져다 풍성을 이루고 또 나누되 주신 주님을 자랑하게 되기 바랍니다.
아울러 그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주신 것 아낌없이 쓰임받도록 기도하며 행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복음 중 복음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문을 열어 주님과 더불어 먹고 기쁜 삶이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축복만으로 한정시켰던 라오디게아교회의 영적무지가 우리에게 없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잘 사귀면 잘 먹고 잘산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신앙공식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깊은 교제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중심과 그 나라와 의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던 라오디게아교회가 되지 않게 날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문밖에 서서 우리 맘을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속히 달려 나아가 활짝 연 마음 옥토에 복음의 씨가 심겨지게 하옵소서.
남은 생애 주님과 더불어 새 생명공동체 몽돌비전 귀한 식탁가운데 함께 먹고 마시고 나누어 오는 저세상 뿐 아니라 여기 이 세상에서도 좋으신 주님과 그 보이는 나라를 자랑하고 선포하여 전도로 승리하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직분자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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