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0. 주일예배<민33:50-56. 악은 다 부서 버리라.>
본문 앞 40-49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 가까이 온다는 것을 가나안 아랏왕이 듣고 나와서 진을 치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는 명령이 50-56절인데 그 내용이 악을 처단할 때 남김없이 부서 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승리를 전제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승리는 기약됐지만 그 과정에서 그곳 주민들을 남겨둔다면 장차 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시가 된다는 겁니다. 명령의 내용을 살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로 합니다. 51-53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스라엘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1. 거민들은 다 몰아내고 우상은 흔적도 없이 부서 버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할 때 요나서의 니느웨 성읍주민 외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본문은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몰아내라는 것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니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등진 우상숭배자와는 절대 함께 살지 말고 그 흔적도 쳐다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땅에서 몰아내라고 한 것은 땅을 빼앗아 차지하되 옛사람들을 남김없이 쫓아내라는 것인데 이 명령대로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55-56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 눈에 가시와 너희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2. 청산하지 못한 죄의 잔재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불행의 씨가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백성들이 몰아내야 할 가나안 땅 주민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버리시기로 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보기엔 매우 순박하고 인간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외모가 다른 민족에 비해서 사납게 생겼다거나 성격이 못됐다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소를 숭배하는 인도인들을 보면 어느 나라 민족보다 선량합니다. 거리에서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큰 욕심도 없고 불행은 과거의 업보로 알고 다음 세상에서 보상받는 윤회의 환생을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한 자의 편안함이 민족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 내쫓아야 할 가나안사람도 일대일로 만나보면 대개 다정하고 선량한 이웃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남김없이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남겨둔 자들이 결국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 즉 불행의 씨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몽돌을 사랑하고 몽돌되기를 사모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관계의 기준점과 잣대는 오직 절대하신 하나님이 돼야 합니다. 즉, 한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윤리나 성품이나 능력이나 학력이나 재산이나 용모가 아니라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과 어떤 관계의 사람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관계의 성공이나 친밀도의 여부는 생각과 시각의 일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일반적인 견해에서 더 근원적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의 문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 진로로 답을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며 함께 경배하고 노래할 때 우리는 비록 세련되지 못해도 결국 깎여가며 몽돌이 돼 좋은 동지가 될 것입니다. 평생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하나님의 처소에서 내침을 받고 추방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 사랑하는 관계에서 그로 하여금 내 곁에 머물도록 하려면 반드시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함께 찬송할 수 있도록 전도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불신자는 결국 내 불행의 출발이 된다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56절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남겨둔 우상숭배자들에게 당할 괴로움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자신이 이스라엘백성에게 부을 진노의 잔이 대적에게 준비되듯 준비됐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아시다시피 강경한 경고는 깊은 애정에서 출발합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를 극진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이시며 죄와 무관한 순결 그 자체십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만나길 원하지만 죄인의 모습으로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죄인사랑에는 그래서 죄를 덮어 가리는 속죄의 제사가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백성은 제사주관자, 곧 예배자의 합당한 삶과 고백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운데 죄에 물든 모든 것을 내보내라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인정상 차마 내쫓지 못한 것들이 훗날 우리의 고민과 불행이 된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은 살살 달래어 내보내는 게 아니라 본문말씀처럼 몰아내는 것입니다. 몰아낸다는 것은 나갈 수밖에 없는 곳까지 몰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아직도 은밀히 숨어서 쫓겨나가기를 거부하고 교묘하게 속삭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이행되는 거룩한 땅, 하나님의 성전 우리 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게으름입니다. 가장 흔한 악의 도구입니다. 게으름을 사단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지만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이며 도구인 건 분명합니다. 마25:26절에서 주님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으로 게으름을 악한 것과 동일하게 보고 나무라셨습니다. 게으름의 특성은 방치하면 점점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잠언에선 게으름에 대한 충고가 많이 나옵니다. 잠12:24절에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돼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19:24절에선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올리기조차 성가싫은 음식이 자기가 노력해 구한 게 아니라 구걸해서 얻은 거라고 20:4절에 밝힙니다. 무서운 적입니다.
2) 쾌락입니다. 참으로 내쫓기 힘들고 이기기 어려운 것이 쾌락입니다. 이는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악입니다. 쾌락은 철저히 육신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쾌락은 보통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신앙가운데 성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생을 모르고 천국과 무관한 자들은 육신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 생각대로 다음 오는 저 세상의 예수님 통치와 그 나라가 없다면 쾌락이야말로 인간들의 천국이요, 인생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불멸하는 고품격의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다시 살아 하나님과 동행하면 비록 육신을 지녔지만 인간은 영생을 보장받은 의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됩니다. 때문에 속히 썩어 사라질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거룩하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멀리하게 됩니다. 거룩과 세속의 구분기준은 무엇일까? 간단합니다. 열매를 보면 됩니다. 육신에서 그쳐버리는 것은 대부분 속된 것이고 육신을 뛰어넘어 영원한 영혼의 희락과 주의 기쁨이 함께 하면 그게 거룩입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육신의 즐거움도 거룩할 수 있고 또 속되어 주님의 미움을 사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눕는 것은 인간이 삶을 지탱하는데 필수적인데 건강해야 할 이유를 주님의 성전이라는 이유에서 찾고 성실하게 몸을 관리하는 건 거룩한 일입니다. 즉 식욕, 성욕, 수면욕은 죄가 아니지만 食道樂이나 性倒錯, 늦잠이란 말은 다분히 세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쾌락과 거룩의 차이는 곧 목적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단순히 육신만을 위한 것이냐를 보면 쉽게 구별됩니다.
3) 규모(規模)의 부족입니다. 규모있는 살림살이, 질서있는 행동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한마디로 넘치거나 부족하거나 앞서거나 뒤치지 않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차량운전으로 말하자면 어디서 브레이크페달을 밟아야 할지 어디서 속도를 내야 할지를 정확히 구분한다면 규모가 있는 인생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규모감각의 부족은 옛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시간이 없다면서 늘 사소한 일, 엉뚱한 것에 시간을 허비합니다. 이 규모 없는 옛사람을 쫓아내야만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가 없습니다. 잠시 규모와 질서가 없는 예를 들어봅니다.
(1) 별로 바쁘지도 않은데 늘 허둥대고 서두르는 버릇이 있습니다.
(2) 뭘 먼저 해야 할지 늘 어수선해서 우왕좌왕합니다. 중요한 일과 바쁜 일은 다릅니다. 이걸 구별 못하면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이 종종 엇갈려 관대할 곳에서 예민하고 냉정하게 잘라야 할 곳에서 부드럽고 친절해서 낭패를 당합니다.
(3) 이미 결정된 일, 바꿀 수 없는 일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초조하게 돌아봐 인생을 늘 소모합니다.
(4) 작고 큰일을 결정할 때 너무 신중해서 망설이다가 좋은 기회를 놓칩니다.
(5) 도둑이 들어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갈 만큼 금방 도둑맞은 집 같습니다. 발 디딜 틈 없는 풍경이 늘 지속돼 이미 익숙하고 정리 잘된 집에 가면 낯설고 썰렁해 편안함이 없고 안정감을 못 느낍니다.
(6) 시간이나 개념과 관점과 정체성에 구분선이 모호합니다. 쉬운 예로 정체성의 경우, 예배드릴 때 예배자인지 방청객인지 개념이 없습니다. 시간의 경우엔 쉬는 시간인지 일하는 시간인지 구분이 없습니다. 자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비몽사몽 안개 속 같은 인생입니다. 개념과 관점은 더욱 심각합니다. 자칫 기본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개념 없다는 말은 사람이 들어선 안될 치명적인 모욕입니다.
무엇보다 예배에 관한 개념이 뚜렷해서 주님께 칭찬받고 그 증거가 가문을 이어 증거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몽돌가족여러분. 저와 여러분 안에서 몰아낼 것을 몰아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넘어서 대적에게 행하실 일을 우리에게 행하신다고 까지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뒤집어서 들으면 어떤 말씀입니까?
몰아낼 것을 몰아내기만 한다면 모든 언약의 복된 성경의 기쁜 사건들 다 우리들의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손안에 있는 능력이 다 성도와 교회의 능력되는 줄 믿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말씀으로 이길 길을 제시받았다면 이제 기도로 그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받은 능력은 이제 반드시 내가 움직여 이뤄진다는 것을 믿고 믿음 충실한 행함의 의지로 쟁취하시기 축복합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열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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