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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6.01.24.주일설교<롬6:17~18.본래를 기억하는 사람>

by 설렘심목 2016. 1. 25.

2016.01.24.주일설교<6:17~18.본래를 기억하는 사람>

 

어떤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의 평생이 달라집니다. 827-28절에선 제자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던가?” “더러는 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훗날 베드로의 설교로 한번에 5천명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고등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질문에서 질문으로 꼬리를 잇게 됩니다. 결국 생각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질문하고 또 답을 내는 것인데 가장 근원적이며 절실한 질문은 자기존재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조차 하지 않고 관심도 없이 살아갑니다. 존재에 대한 관심과 질문이 없으면 종교와 철학에도 관심이 없게 됩니다. 그냥 주어진 환경 속에서 먹고 눕고 자식기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짐승도 그렇게는 살아갑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 중 대표적인 게 지능과 문화와 종교입니다. 말과 글로 뜻을 표현하고 그 결과 생각이 깊어져 생각의 마지막인 존재의 질문에 답을 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새겨져 있고 그건 어느 때의 사진입니까? 지금 예배하는 모습이 아니라 본래 누구였냐는 것을 묻습니다. 본문 롬6:17a절을 함께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모든 인간이 본래 죄의 노예였습니다.

 

본래 죄의 노예로 사망 외에 길이 없던 절망적 존재가 자신임을 분명히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겸손이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읽은 사람이라면 성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신약에는 구원받기 전의 인생들, 곧 우리의 과거를 보기에 유익한 몇 구절이 있는데 두 개만 봅니다.

3:10.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자였습니다. 본래 가진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4:13. 본래 학문 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아는 게 없었다는 겁니다.

나면서 못 걷는 몸, 타고난 불행, 이는 에덴추방 이후 모든 이에게 다가온 불행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나면서부터 죄의 노예, 곧 죄인들이었습니다. 내가 어찌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면서 장애아로 태어난 아기와도 같이 누구나 영적소경이라는 중증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주의 영이 찾아주시지 않는다면 그 어느 누구도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고 대부분 엉뚱한 것에 이끌려 평생을 천국과 무관하게 살게 됩니다. 그런 불신자들은 대개 본래 죄의 노예였던 상태가 계속 유지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죄와 사망과 지옥으로 이어지는 마귀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물론 화려한 이력으로 포장돼 그럴싸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죄와 사망과 지옥이라는 불행한 행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 존귀한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불행한 불신자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천양지차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몸으로 이 땅을 딛고 있는 동안은 그 하늘과 땅의 격차를 실감나게 설명하기엔 말과 글이 충분치 않지만 그렇다고 그 격차가 좁혀지거나 사실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본문 아래쪽 롬6:23절을 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린 하늘같은 은총을 입어 죄를 면해 천국을 약속받았고 저들은 비록 훌륭한 삶을 살아도 예수를 모른 채 땅에 묻혀 음부를 헤매며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분명 우리도 죄의 노예로서 본래 저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어떤 이유로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는지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 주의 손에 붙잡혀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성도가 돼 예배자라는 복되고 거룩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8:12~14a절을 찾아 함께 읽기 원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2. 배부르면 쉽게 타락하는 게 인간입니다.

 

훌륭한 인격과 신앙의 소유자며 노래 잘하는 성군 다윗이 배부르고 여유가 생기자 타락해서 참혹한 대가를 치릅니다. 동방의 의인 노아도 농사가 풍년이 들어 배부르자 술에 취해 돌이킬 수 없는 수치를 당합니다. 겸손한 청년 사울은 왕이 되자 교만해져서 결국 세 아들과 함께 한날한시에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엘리제사장도 결국 너무 잘 먹고 배불러 아들교육 제대로 안한 채 가문이 멸망하고 자신도 목이 부러져 아들 둘과 며느리, 갓 나은 손주 이가봇까지 모두 연이어 죽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총서라는 잠언30:8절에서는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함으로 풍요나 가난으로 인해 범죄할까 염려하는 성숙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초심을 잃는 것 시간문제입니다.

세월이 지나 시간이 많이 가면 힘들었던 날을 까맣게 잊고 여유롭고 느긋해져 거들먹거리게 됩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로또1등 당첨자를 추적한 결과 90%가까이 당첨전보다 더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는데 불과 3년에서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얼마 전 242(189억 실수령)억을 받은 사람은 무일푼으로 망했는데 거짓말로 빌린 13천 빚을 못 갚아 사기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꼭 같은 사람들의 반응은 아깝다. 그 돈 내게 주면 정말 의미 있고 귀하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약속 안에서 반드시 그 약속 성취하시는 주님 앞에 크고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인생 한 가운데서 주님을 찬송하며 기뻐하며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공급을 증거하면서 지금과는 다른 부요한 삶을 보장받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 부자가 된다는 겁니다.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감사이미 이뤄졌고 이뤄질 노래입니다. 그때 오늘 이 설교를 기억하시기 당부합니다.

 

3. 주신 복과 주실 복을 유지, 확장시키는 건 겸손뿐입니다.

 

이제 다시 저와 여러분에게 스스로 묻습니다. 내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던가? 내 심령 깊은 곳에 어떤 사진으로 새겨져있는가? “이스라엘지파 중에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사람이고 베냐민지파 중에 우리가문은 가장 작은 미약한 가족(삼상9:21)”이라면서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무엘에게 말하던 사울청년, 그는 사무엘이 찾을 때도 짐 보따리 사이에 숨어있었던 본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10:22)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던 부자 삭개오, 동족에게 로마앞잡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넉넉하게 살아도 고개를 들지 못하던 삭개오, 그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늘 더러운 세리라는 이름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는 본래 심성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한평생 짧은 것 같아도 수많은 날 들 다 말할 수 없는 수치와 크고 작은 행복과 고통이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도 청소년 때 얼굴과 장년 때와 노년의 얼굴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명함에 십년 전쯤 얼굴을 올려 놉니다. 어떤 명함을 받았는데 대단한 조각미남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복구불능상태의 비만이었고 얼굴도 쟁반같이 둥근 달이라 전혀 옛 모습이 상상되질 않습니다. 그 분은 지금 이래도 내가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비록 이뤄지지 못한다 해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본래의 깃발을 그 사진 그 시절에 깊이 꽂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속 명함사진을 어느 때의 것으로 새겨놨습니까? 이제 설교의 결론이 나옵니다. 누구처럼 가장 싱싱하고 아름답고 멋진 시절의 사진을 걸었습니까? 내가 본래 이런 인물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내가 본래 이랬는데 살다보니 이렇게 된 게 내 책임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 마음 속 명함에 새기는 사진이 여러분의 본래모습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본래의 모습이 이후의 삶과 정신과 믿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 명함사진에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을 내려놓고 가장 힘들고 비참했고 수치스러웠던 날의 얼굴, 초췌한 얼굴, 퀭한 눈망울, 죽음을 사모하던 절망의 날, 밤을 새워 울던 그 얼굴을 올려놓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 묻는 스스로의 질문 앞에 말해야 합니다.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사망의 그늘에 앉아 아무런 대책없이 죽어가던 죄의 노예였었노라고,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본래 그랬던 내가 오늘 여기 예배한다는 것이 크신 주님의 은총 아니고 과연 무엇인가 자문하며 구원의 감격을 뜨겁게 새로 일궈내야 합니다.

 

독일은 악명높은 나치의 가스실 아우슈비츠를 그대로 유지하여 민족적 회개를 호소하는데 선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히로시마원폭돔을 그대로 보존해 다시는 이렇게 당하지 말자는 국민적 도전과 경각의 자료로 사용합니다. 방향은 달라도 과거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 시간 중대한 미션하나를 수행하기 원합니다. 기죽어 살고자 함이 아니라 주신 복 주실 복을 감사와 겸손으로 확실히 붙잡는 귀한 일입니다. 모두 눈을 감으시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 어느 한 장면을 정지시키거나 짧은 동영상으로 끌어내 여러분의 본래모습으로 가슴속 명함사진에 올려놓습니다. 그 장면은 수시로 바꿔 놔도 좋습니다. 지금 가장 힘들었던 첫 사진이나 동영상이 올려 집니다. 가능한 한 가장 어려워서 쓰러지기 직전 힘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올려놓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 기도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새생명의 주여. 모두의 마음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 하나를 기억해 내 마음판에 새깁니다. 지금 주님은 그 힘들었던 장면을 보십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서러웠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얼마나 억울했던지 모릅니다. 많이 아팠습니다. 많이 미안하고 죄송했습니다. 차라리 죽은 자가 부러웠습니다. , 아버지 내 생명의 근원이시여, 영혼과 몸의 구주시여, 그날을 어찌 잊겠나이까? 결단코 그날, 그 눈물과 그 아픔을 잊지 않겠나이다. 저는 본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제 본래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이렇게 복되고 거룩한 자리에 앉아 창조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으니 주께 생명조차 아깝지 않은 인생인 줄 절실히 아나이다. 예수그리스도 우리가운데 계셔서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모든 약속을 이뤄 가시니 우리가 오직 주를 의지하고 기뻐하며 남은 생애, 본래의 모습을 잊지 않고 그 놀라운 구원의 감격으로 힘 있게 살기 원합니다. 마음이 느슨해지고 게을러질 때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마음의 창에 본래의 모습을 선명하게 새기게 하신 주여! 잊지 않고 겸손의 근거를 삼고 거울삼아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는 강인하고 겸손하며 어여쁜 영혼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