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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4.12.07.주일낮예배(고후5:1~7. 현세(現世)를 이기는 믿음)

by 설렘심목 2014. 12. 7.

2014.12.07.주일낮예배(고후5:1~7. 현세(現世)를 이기는 믿음)

 

오늘도 주시는 생명의 양식 말씀이 또 시작되는 연말 한 주간의 새힘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금 이 세상, 현세(現世)를 이기는 믿음 받을 줄 압니다. 한절씩 읽고 편한 말로 들어봅니다.

 

1절“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당시 나사렛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건 생명이 걸린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언제 잡혀가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 바울은 하늘의 처소, 곧 본향집과 신령한 몸을 말합니다.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잠시 의지하고 있는 장막 우리의 육체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토담집과도 같습니다. 외부의 환경에 늘 노출돼 장래를 알 수 없는 육체에 영원한 소망은 없습니다.

 

2절“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간절한 성도들의 바램은 사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와 신령한 몸에 거하는 겁니다.

 

3절“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오직 생명의 말씀, 곧 약속으로 의의 옷을 입는 일은 우리 성도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날 불언중 주님의 재림이 말씀대로 이뤄지면 그날 거기서 벌거벗은 채 세상 불신자들처럼 드러나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4절“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가 마치 무거운 짐을 진 듯 힘겨워하는 건 단순히 사는 게 고달파 육신을 벗고 싶은 게 아닙니다. 우리가 힘겨워하는 건 더욱 하나님의 소원에 합당한 영적 경건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믿음의 강화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고뇌가 삶에 지친 호소가 아니라 거룩과 순결을 향해 진일보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고민은 항상 세상걱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자기성화를 위한 고뇌는 결국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는 것 즉 육체가 영혼 앞에 굴복 당해 경건해 지는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망하는 바, 벗고자 하는 것이 육신이란 옷이 아니라 육체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실현이 그 나라를 썩을 육체 위에 신령한 몸을 덧입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다스리는 육체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통과한 영혼의 영원한 삶이 현실의 모든 부조리와 고통을 이기게 할 줄 믿습니다.

 

5절“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한 신앙성숙과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우릴 향한 계획과 꿈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 안에서 성화를 이루실 주님이 당신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은 그것이 최상의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걸 말합니다.

 

6~7절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5절 말씀처럼 성령이 보증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은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잡아줍니다. 그래서 몸으로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여 살기 힘든 줄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몸으로 증거하려면 오직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인 믿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행함은 얼핏 보기에 다분히 물리적입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거의 정신적입니다. 보이는 활동은 물리적이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생각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1. 우리의 기쁨도 소망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바램과 기쁨은 여기 땅에 있는 토담집이 아닙니다. 세월을 따라 낡아 무너질 흙집은 영원한 처소를 향하는 길에 잠시 머무르는 시골간이역이나 하숙집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잠시 머물 여기 흙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중한 만큼 들어줘야 할 고달픈 요구도 많고 같이 사이좋게 가야 할 영과 늘 갈등하고 다툽니다. 그래서 이 육체를 모질게 다뤄도 안되고 그렇다고 요구를 따라 편하게만 대접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처럼 악한 세대에 시간세월을 아끼려면 주신 한평생을 건강하고 알뜰하게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한번 밖에 없는 육체의 날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이는 몸으로 증거하고 이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짧은 생애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몸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고 바른 목적을 위해 요긴하고 복되게 사용될 것입니다.

영원한 집에서 영원한 삶을 최상으로 살기 원하는 저와 여러분, 짧은 나그네 삶을 최선의 믿음 안에서 자신을 불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치지 않는 방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 맞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신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신앙인격체는 자신에게 먼저 단호하되 학대하지 않고 자신에게 냉철하되 항상 스스로 격려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유효적절한 자기관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 찾기 어렵습니다. 어찌해야 보다나은 신앙인격으로 성화될 수 있을까? 2절을 함께 읽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2. 간절히 사모하는 것으로 신앙인격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사람은 그가 간절히 사모하는 그것이 그를 차지하여 결국 그렇게 변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곧 이 육신장막을 벗고 받게 될 신령한 몸으로 우리의 소망을 삼아 간절하게 탄식하며 바라면 성령의 임재와 보증을 통해 여기 이 땅에서 우리는 신령한 영의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인간이 살면서 무엇을 바라는가? 그 바라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인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로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육체를 살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탄식하듯 간곡한 마음으로 깊은 믿음과 영을 간구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처소, 곧 신령한 몸으로 덧입기를 탄식하며 원한다면 자비로운 주님은 분명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4절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3. 믿음 붙잡고 영으로 싸우는 싸움은 영생하는 신령한 몸을 소망함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을 육체로 산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건 육체를 누를만한 영의 소망이 어느 것보다 뜨겁고 실질적이면서도 체험적이어야 합니다.

 

저는 오래 전 삶은 느낌(Feel)이라고 선언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 인간이란 놀랍게도 환경으로 행불행을 느끼지 않고 마음속에서 느끼는 대로 규정해버리는 심인성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 느낌은 그리고 상대적입니다. 자신보다 힘든 사람 앞에선 안도하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 앞에선 초조하고 불행합니다. 행불행을 결정하는 잣대가 수시로 바뀝니다. 그래서 인간이 말하는 행불행은 사실상 믿을 게 못됩니다.

 

본문에선 육신장막을 입고 사는 우리가 무거운 짐진 고통으로 탄식하는데 그 탄식하는 한숨소리의 해석이 다릅니다. 피할 수 없는 역경과 수치속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이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고통앞에서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 고난을 통해 신령한 몸, 즉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덧입기 원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 이유가 뒷부분에 나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썩을 육신이 영생의 진리 복음 안에 파묻혀 정복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육신이 영생복음에게 제대로만 붙들리면 우리들의 탄식과 신음은 죽어 저 천국은 물론이요, 살아서도 여기서 천국을 실감하며 믿는 자의 승리를 넉넉하게 선포하게 하는 과정인 줄 확신합니다.

 

이제 끝으로 죽을 육체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 안에 묻혀 보이지 않고 영광의 주를 노래하며 복되게 가는 데 필요한 몇 가지만 함께 확인하며 마칩니다. 썩을 몸으로 신령한 삶을 사는 길,

 

하도 들어 외워버린 신앙생활 ABC, 늘 들어왔으나 잘 안되는 신앙생활의 기초를 다집니다.

 

1)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시19:10절에 성경이 어떻다고 합니까?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합니다. 밥은 하루 굶어 눈이 퀭할 육체건만 영은 시들어 가는데 종일 말씀을 안봐도 목마름을 못느낀다면 그건 영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딤후3:17절에선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썩을 몸으로 신령한 삶을 살려면 두 번째,

 

2)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반복훈련을 꾸준하게 하다보면 어느 새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된 건 금방 생활이 됩니다. 신령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에게 기도는 마땅히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빌4: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고 렘29:11-13절에도 기도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성도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구하지 않아 주시지 못한 많은 것들이 하나님 손에 가득한 것을 영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썩을 몸으로 신령한 삶을 살려면 끝으로 세 번째,

 

3) 예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기도와 예물과 찬송과 말씀선포라는 일정한 형식을 갖습니다. 이렇듯 예배가 갖는 외형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합니다. 예배중 감동도 없고 또 예배 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자신을 보면서 실패한 예배라고 실망하는 겁니다. 거듭 일러드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올려드리는 예배의 외형은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놀라운 일 곧 하나님의 계획과 왕성한 활동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축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이 가장 귀한 첫째 예물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현세를 이기는 영적 삶은 현세를 뛰어넘는 소망을 믿음으로 품고 살아가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현세를 뛰어넘는 소망은 간절히 사모하는 예배와 멈춤없는 꾸준한 기도생활과 성경읽기의 습관, 거기까지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주님이 하실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에 우리는 현세를 이기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있는 영적성도가 돼 있을 것입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