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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3.12.01. 주일낮예배<창25:19-23.언약의 열매, 현실>

by 설렘심목 2013. 11. 30.

 2013.12.01. 주일낮예배<창25:19-23.언약의 열매, 현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실현되는 현실입니다. 21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 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16절을 더 읽기로 합니다.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알려진 바와 같이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고 이스마엘은 불신앙의 증거요,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얻은 육신의 아들입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은 이미 약속처럼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자손의 첫 아들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이토록 미약합니다. 대를 이은 심한 가난으로 늙어 결혼해서 100세에 낳은 이삭도 40에 결혼했는데 또 임신이 안 됩니다. 리브가에게 자녀가 안 생겨 이삭이 기도로 임신한 게 에서와 야곱 쌍둥이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결과로 약속에서 벗어난 이스마엘은 오히려 13~16절을 보면 열두아들이 열두방백의 조상이 됩니다. 야곱보다 앞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에게 뭘 말씀하고 있습니까?

 

1. 미약해 보이는 약속의 출발입니다.

 

언약의 시작은 그렇게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고 풍성한(욥8:7) 성취로 언제나 약속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증거하십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인하여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습니다. 갈3:28-29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가 예수믿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녀가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성경 오늘 본문은 약속의 자녀에게 처음 시작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이삭은 자녀가 없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응답으로 얻은 자녀가 태 안에서부터 벌써 다투기 시작합니다. 부모의 행복은 자녀의 화목과 번성에 있습니다. 두 형제가 서로 싸워대면 그것은 부모님께 주먹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위대한 하나님께서 하신 큰 민족의 시작이 이렇게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여기 저와 여러분을 향한 위로의 음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재모습이 절망적입니까? 참으로 변변치 않고 매끄럽지 못해서 누구와도 만나는 게 두렵습니까? 하나님을 먼저 만나세요. 말씀안에서 분명한 약속을 붙잡기 바랍니다.

약속의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문이 창대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십니다. 비참한 마음으로 올린 기도가 큰 복의 문이 되었지만 그렇게 간신히 얻은 쌍둥이가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으니 사람보기엔 싹이 노랗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삭의 후손은 약속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족이 되어 약속을 바라보는 언약백성의 씨앗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 복의 근원이 되는 다윗의 가문을 이어갑니다.

이번에는 본문 창25:23절을 함께 읽기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국민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로마서 9장에서는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9: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어떠한 자격과 무관합니다.

 

2. 자격없이 거저받은 구원입니다.

 

롬9:15-16절을 함께 찾아 읽기로 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요,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뜻으로 우리를 불러주셔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거저받은 구원이 감사해서 말씀에 순종하기를 결단하고 충성된 자로 살기를 노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소원하고 노력해서 구원하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소원과 노력은 거저 받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당연한 반응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의 지적처럼 에서나 야곱이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고 에서는 동생의 나라를 섬기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서가 불평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은 그것이 무흠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롬9:19-23절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피조물의 항변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선언적 기록이 있는데 질그릇을 만드는 자가 큰 그릇과 작은 그릇과 비싼 그릇과 허드레 그릇을 만드실 권한이 있다는 말로 하나님의 주권 앞에 모든 이견을 물리칩니다. 감히 피조물이 어찌 꾸짖듯이 질문(詰問)할 수 있는가? 피조물은 그저 자신의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그 뿐입니다.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충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 됩니다. 오직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할 뿐 입을 열 수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받은 구원에 다만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송으로 주를 높이기 원합니다.

우리는 다 야곱같이 아무 자격도 없고 조건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물은 다만 기뻐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해서 남은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해야 합니다. 다 드려도 다 갚지 못할 큰 은혜를 받은 우리들입니다.

본문 25-26절을 함께 읽습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였더라.”

에서는 나면서부터 온 몸에 털이 많은 털보였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을 손으로 잡고 나왔습니다. 이 두 마디는 쌍둥이 형제의 성향을 말하고 있습니다. 27절에서 에서를 들사람이라고 하여 그의 야성적인 면을 강조한데 비해 야곱은 엄마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로 소개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웃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에서이지 야곱이 아닙니다. 계산적인 꾀돌이야곱, 중요한 건 하나님의 선택기준이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기서 우린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언제나 약자 편에 서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에서는 늘 자신만만한 사나이였고 누군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로서 부끄럽다는 사람이라면, 야곱은 엄마가 없으면 허전하고 불안하고 혼자서는 뭐든 자신없는 유약하고 눈치만 빨라 약삭빠르고 의존적인 아이였습니다.

얌체 같아도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 설 수 없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훌륭한 인격체라도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립심강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급하지 않습니다. 자립심은 자칫 알량스런 자존심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은 믿음과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겸손을 붙잡기 바랍니다. 낮은 자의 주님이 자칭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비록 유약하여 엄마치마끈을 놓지 못하는 겁많은 아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겁쟁이에게 위대한 하나님의 유업권을 잇도록 영광을 베푸셨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족한 것투성이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도무지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반면 뭐든지 자신만만하여 무능한 사람을 보면 한심하게 느껴지고 답답하고 화가나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끝내 낮아지기 축복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여 언제나 히브리인임을 선포함으로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 혼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이 제게 있습니다. 주님없인 잠시도 버틸 수 없는 인생입니다.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뢰는 순간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즉시 찾아주셔서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 하나님과 사귀어 살면 여러분의 인생은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출발할 것입니다. 인생 100평생에서 영원으로 옮겨갑니다. 치졸하고 옹색한 죄악의 세계에서 광활하고 끝이 없는 공평과 풍성과 기쁨의 땅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손아래 놓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거듭남의 경험이 분명치 않으신 분들은 오늘 이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이미 구원의 확신이 있고 성령의 체험이 있는 분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으로 영혼의 새 힘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 믿은 대로 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