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8.주일설교(수6:6~16. 칼대신 찬양과 믿음으로 하는 전투)
여호수아를 통한 여리고정복은 우리가 한평생 믿음의 성도로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성경의 교훈 중 중요한 교리와 진리가 있는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도 집중해서 듣고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적용하시면 승리는 말씀하시는 주님이 보장이신 줄 믿기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칼대신 찬양과 믿음으로 하는 영적전투입니다. 왜 불행합니까?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결과입니다. 불행한 이에게 일러주는 행복의 비결은 간단하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정반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본문 8~9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행복한 삶의 첫 발길 그 첫째,
1. 말씀앞에 찬양이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법궤 앞에 일곱 제사장이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삶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지침이 되고 생명의 길잡이가 돼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말씀 앞에 제사장의 나팔소리가 앞서 갑니다. 이는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떤 자세여야 하는가를 분명히 일러주는 귀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성도의 삶은 그 말씀을 듣는 성도의 자세가 노래하는 상태여야 한다는 겁니다. 찬양은 즐거운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즐거운 마음은 주변이 평화롭고 곳간에 곡식이 가득하고 미래가 보장될 때 생기는 마음인데 현실이 그렇습니까? 못마땅한 현실을 보면 말씀을 앞세워 나가기도 쉽지 않고 말씀 앞에 찬양이란 더욱 어렵습니다. 당장 일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물질과 환경과 인맥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부족해서 산을 넘기가 벅찬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여리고성은 주전 7천여 년 전에 독립된 문화가 형성된 난공불낙의 요새도시로서 히브리민족이 차지하기엔 만만치 않은 힘있는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을 능가하는 특별한 권세였습니다. 칼과 창대신 나팔을 잡은 제사장들이 맨 앞에 서고 다음 언약궤가 공격대열이 되었다는 것은 실로 세상논리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견해와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게 믿음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법칙으로 하나님은 해석되지 않습니다. 믿어드려야 열리는 성경이요, 하늘나라의 이치요, 진리요, 십자가입니다. 도무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 성문, 찬양의 나팔과 믿음의 행진이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산처럼 서있고 파도처럼 다가오는 문제들과 성도들을 억누르는 삶의 크고 작은 애환들은 오직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바다에 그물을 내린 베드로처럼, 찬양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지표삼아 나아갈 때 반드시 무너질 줄 믿습니다. 이번에 10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성도의 행복한 삶 그 시작 두 번째,
2. 말씀에 반응하며 세상과 환경 앞에 선포하는 신앙입니다.
고백되지 않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말처럼 우리들의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말씀 앞에서 반응하고 그 반응을 만인이 알도록 세상 앞에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주변에 알아야 하는 겁니다. 본문 10절은 여리고성을 말없이 조용하게 돌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외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복음이 때를 따라 영글면 반드시 소리쳐 외치면서 옛 자아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고 밝히 드러날 줄 믿습니다. 열악하고 지치는 환경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고요하게 견디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소리치라 하실 때엔 크게 외쳐 우리의 신앙고백과 감사의 간증이 만민세상을 향해 우렁차게 울려 퍼질 줄 압니다.
끝으로 본문 15~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성도의 행복한 출발 그 세 번째,
3.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합니다.
나팔을 잡은 제사장들을 선두로 언약궤가 따라가는 이스라엘의 행군은 6일간 여리고성을 믿음으로 밟으며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은 일곱 번을 돌았습니다. 왜 그래야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고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 약속을 지키시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과 때를 하나님이 우리의 것으로 하지 않고 당신의 것으로 하셨다는 겁니다. 주님이 옳습니까? 우리가 옳습니까? 주님이 정확합니까? 우리가 정확합니까? 흠이 없고 실수도 없고 가장 확실한 승리는 주님의 때와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요9:6~7절에 보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또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와 용서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6~8절에 보면 주님이 땅에 앉아 뭔가를 쓰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난해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굳이 해석할 게 없습니다. 사람은 알 수 없는 과정을 허락하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뻐하며 순종하는 일입니다. 여섯 번까지는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엔 일곱바퀴를 돌라고 하셨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생명과요, 죽이는 건 선악과입니다. 분석하지 말고 그대로 아기처럼 믿어야 할 건 그대로 믿고 꼼꼼히 살펴서 구별할 건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그대로 믿고 마귀의 것은 살펴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믿고 순종하는 일이지 못미더워 따져보는 헤아림이 아닙니다. 반면 마귀, 악한 영 앞에선 짚고 되짚고 또 살펴서 주님께 거듭 묻고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때와 방법을 주님께 묻고 의뢰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은총을 더하시는 분입니다. 내생각 내방법은 모두 내가 책임져야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뢰한 일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모두 주님이 인도하시고 책임지십니다. 주님을 높이며 특별히 힘든 정황가운데 주님의 때와 주님의 방법으로 우릴 인도하시는 주님을 더욱 찬양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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