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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2.02.26. 주일설교 <창 4:3-7. 가인과 아벨의 제사>

by 설렘심목 2012. 10. 2.

2012.02.26. 주일설교 <창 4:3-7. 가인과 아벨의 제사>

 

고대농경시대에는 지금과 많이 달라서 성경이 말하는 땅의 소산과 기르고 있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아벨의 그것에 비해 분명히 격차가 있는데 양의 첫 새끼를 드린 아벨과 가인의 제물 땅의 소산, 그 격차는 하나님을 향한 중심의 격차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격차라 함은 제물의 내용을 말함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중심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아벨과 가인의 중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본문 5~6절입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왜 안 받으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제물을 안 받으신 하나님 앞에 분하여 안색이 달라진 가인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히9:22절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흘림이 없이는 용서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편 신26:2절, 10절과 잠3:9절에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듯이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는 율법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읽은 5~6절에 나타나 있듯이 바른 중심으로 드렸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과 가인의 제물에는 어떤 차이가 있길래 가인의 제물인 농사의 소산물을 받지 않으신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제사는 희생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1. 내 죄를 대신할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을 살핌에 있어서 어떤 것이 희생이었는가는 자명합니다. 가인은 “첫”자가 빠진 곡식소산물이었지만 아벨의 제물은 피를 흘린 양의 “첫”새끼 희생이었습니다. 희생은 대신 죽는 걸 말합니다. 희생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대신 죽을 수 없습니다. 아벨이 드린 희생제물 양의 피에는 이러한 속죄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곡식도 예물입니다. 그러나 곡식이 희생은 아닙니다. 제사엔 희생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은 평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드리지 못했던 가인의 생활자세가 제물로 드러난 사실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희생이 없는 삶은 희생이 없는 제사로 나타났고 그것은 사랑이 고갈된 가인의 분노에서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의 얼굴은 실패한 예배자의 얼굴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믿음과 양심과 인격에서도 실패하게 됩니다. 훗날 그것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으로 증거됩니다.

 

2. 희생없는 예배는 결국 불행의 시작일 뿐입니다.

 

본문에서의 제물은 제사자의 중심이 담겨 있는 것이기에 제물을 드리는 제사자와 제물을 함께 묶어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즉 제물과 제사자는 따로가 아닙니다. 헌금과 예물은 곧 그 사람을 말합니다.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의 삶과 믿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물이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되어 제단에 올려져도 믿음과 삶과 중심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 예물은 주님의 기쁨에 이르지 못합니다. 충성스러운 성실함이 예물안에 아름답게 담겨져 있는 예배라면 주님은 그 영혼과 육체에 대한 모든 삶에 간섭하시고 끝내 형통으로 주장하실 줄 믿습니다.

6~7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3. 삶과 예배는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분해서 안색이 변하자 “선을 행하지 않아 죄가 지금 문앞에 와서 널 원하지만 너는 죄를 이기고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제사, 곧 예배란 무엇입니까?

 

1) 행하지 못한 선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로 망하는 게 아니라 회개가 없어서 망합니다. 그러므로 징계중 징계는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하나님은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회개는 목표점을 바꿈으로 충분합니다. 잘못된 과녁을 옮길 때 그동안 엉뚱한 목적으로 살아온 데 대한 후회가 통곡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목적으로 해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성경과 다른 기준을 갖고 열심히 달려왔던 걸 깨닫고 돌이키는 게 회개입니다.

 

2) 문 앞에 와서 엎드려 기다리는 죄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회개를 제대로 했다면 죄는 다스려집니다. 내인생, 내마음의 문앞에서 웅크려 도사리고 있는 죄는 내 삶과 영혼을 통째로 먹어치우려고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엎드려있다는 것은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공격의 때만 기다리는 걸 말합니다. 이때 회개하지 않고 거듭 주님을 떠난 삶을 살아간다면 비로소 기회를 얻어 달려들 것입니다. 죄는 문앞에 엎드려 아직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과 믿음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일단 들어오면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 후에야 정리가 됩니다. 은혜의 신약시대에 특별히 제사장인 우리들의 삶은 그래서 산 제물의 삶입니다. 보통 예배자적 삶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곧 산 제물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나는 우리 비전성도 믿음의 모든 권속들이 한결같이 바르게 잘살기 소원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바르게 잘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왜 바르게 살아야 하고 또 잘살아야 하는가? 자신의 삶에 거룩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성도, 우리 모두 그런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 건강한 가운데 기뻐하는 삶의 이유가 오직 예수 잘 믿기 위한 것 외에 아무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목적은 예수요, 모든 삶의 과정이 되는 값지고 거룩한 제사장의 한평생은 사랑없인 불가능한 희생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희생이 없어서 가인은 제사에 실패했습니다. 제사의 실패가 삶의 실패로 나타난 가인, 결국 시기심으로 동생을 죽인 인류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제물된 삶, 다른 말로는 희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 곧 살인자의 후예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고 거듭나서 새 인생. 새 영이 되었으니 희생적 신앙고백으로 예배와 삶이,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애쓰며 힘을 다할 때 주님이 모든 마무리를 아름답게 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