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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2.02.19일 주일예배<히5;11-6:3. 초보에서 벗어나는 믿음>

by 설렘심목 2012. 10. 2.

2012.02.19일 주일예배<히5;11-6:3. 초보에서 벗어나는 믿음>

히브리서기자는 우리들의 대제사장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모형을 따라 나타나신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왕중 왕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멜기세덱의 내용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초보의 믿음을 지적합니다. 믿은지 제법 오래되어 이제는 새신자들을 양육하고 가르칠만한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아무리 귀엽고 예뻐도 그 아기는 잘 자라서 부쩍 부쩍 커야 합니다. 나이에 맞는 외모와 내면성숙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성장이 멈춘 어떤 사람을 TV에서 봤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초등학생의 외모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희귀병의 비극입니다.

밥을 먹어야 할 나이에 치아가 나오지 않고 기저귀를 갈아대며 아직도 엄마에게 매달려 젖만 먹는다면 그 가정에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집안에 자녀는 꽃입니다. 그러나 성장이 느리거나 멈춘 자녀는 꽃이 아니라 찌르는 가시로 끊임없는 아픔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앞에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믿은지 몇 년씩 되어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안개속을 헤매며 기독교의 기초적인 교리도 모르고 그냥 대충대충 믿고 있는 건 아닙니까? 도대체 에덴동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하지도 않고 안 믿는 친구나 누가 물어보면 “성경은 말입니다. 따지지 말고 성경그대로 믿어야 합니다.”하면서 얼떨결에 믿음 깊은 대답을 하는 건 아닙니까? 본문 한절한절 살피는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13절을 봅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먼저 젖과 단단한 음식의 영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넘어가기 원합니다. 젖이란 소화기능이 아직 미숙한 상태에서 먹어야 하는 음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깊이가 다 다릅니다. 깊은 말씀은 쉽게 납득이 안 되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깊은 말씀은 오묘한 맛이 있어서 감동과 권세가 말씀을 받아먹는 이로 하여금 사로잡히게 합니다. 신앙인격이 변화하고 관계에 변동이 일어나며 예배생활이 달라집니다.

 

한편 젖 먹는 믿음에 비유되는 영적인 상태는 지극히 기초적인 성경원리나 말씀을 듣는 것 외에 약간 난해한 것들은 머리아파하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아직 미성숙하여 소화능력이 거기까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말씀에 익숙하지 못하니 음성구분이 안되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도하기보단 주변을 살펴 눈치껏 알아서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젖을 먹는 자는 아직 어려서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의의 말씀이란 그리스도의 말씀, 곧 성경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젖을 먹는 자는 믿음의 말씀을 경험치 못했다는 건데 구체적으로 믿음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자신에게 이뤄진 성경적 경험”입니다. 즉 내가 믿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았더니 역시 진리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승리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른 바, 신언행의 일치로 경험되는 진정한 의미의 보람과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초보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적으로 믿음을 구현하는 사람은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임재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의의 본질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진정한 의는 불가능한 것(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라는 주어로는 모두 실수요, 죄요, 부끄러움이요, 회개거리요, 미숙이요. 반면, 자랑하고 드러내고 존귀하게 높이는 모든 말은 한결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라는 주님께서 주어로 등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는 깨달아 알고 있는 영적감각을 사용함으로 선악, 곧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며 그것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통과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라고 밝힙니다. 지금 5:14절입니다.

간단히 정리한다면 영적성숙은 반드시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하여 이뤄지고 그런 사람은 이제 어떤 말씀도 잘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6장 1절로 넘어갑니다. 1~2절에서는 기독교의 초보에 대해 설명이 나옵니다.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대한 교훈을 기초적인 믿음의 터라고 말합니다. 2절을 함께 읽고 내용을 마무리합니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기초를 벗어나 완전한 데가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인간에게 완전이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3절에 그것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나님의 인도와 허락하심이 없다면 우리로서는 믿음의 완성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의 완전한 곳, 즉 믿음의 완성은 행함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미 모두 신앙의 초보인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영생과 심판에 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제 믿음의 완성을 향해 부단히 평생을 나아가는 신앙완성이란 이런 교훈을 몸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죽을 때까지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우리가 이것을 하나씩 이뤄가게 됩니다.

 

3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잠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없이도 잘 하는 일은 죄를 짓는 일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행함을 통한 믿음의 성숙과 완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끝없는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히브리서기자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절절히 와 닿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믿음의 기초를 잘 닦아서 양질의 신앙인, 곧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잘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앞에서 열심을 내지 못하여 늘 기초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결국에는 믿음의 모습대로 삶의 수준과 질이 결정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수준과 품격에는 물질과 건강의 문제도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거듭 당부하지만 예배의 성공은 인생성공의 첫 단추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실한 예배자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성실하려는 노력은 자신의 삶과 가문과 후손과 나아가서 속한 민족과 나라앞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웃에게 성실한 것입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성실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인간모두 게으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에는 부지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이 믿음의 성장과 행함으로 완성을 향해 열심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