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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바람직한 기독교 교육 - 이 경직 교수 (백석대)

by 설렘심목 2012. 8. 2.

바람직한 기독교 교육

이 경직 교수 (백석대)

기독교 교육이라는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로, 기독교를 교육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으며, 둘째로 기독교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첫째는 교육의 내용을 가리키며, 둘째는 교육의 방법을 뜻한다. 교육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둘째 의미를, 즉 교육의 방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교육 방법을 제안하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교육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교육 방법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이 있다. 서당식 교육을 옹호하는 전통적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이란 선생이 자신에게 있는 지식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에 따르면, 지식은 완결되어 있고 변치 않는다.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훈장은 사서삼경을 다 외기만 하면 된다. 사서삼경의 참 뜻을 아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배우는 학동도 사서삼경을 소리내어 읽고 외울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이해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관에 따르면, 가르치는 사람은 그저 강의안을 읽으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되고, 학생은 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일방적인 전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육은 하드웨어(Hardware)에 소프트웨어(Software)를 계속 집어넣는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탁월한 컴퓨터 도사라도 286 컴퓨터에 펜티움(Pentium) 컴퓨터에서나 작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집어넣을 수는 없다. 교육 수요자의 능력과 수준을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한다면,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눈높이' 교육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 수요자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들로 하여금 대답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단계로는, 교육 내용을 가능한 한 그들이 소화해낼 수 있는 수준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많은 양의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적은 양의 지식이라도 충분한 토의와 설명을 통해 완전히 학생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286 컴퓨터의 성능을 고성능 Pentium IV 컴퓨터로 업그레이드(upgrade)시켜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지식이 귀해서 어쩌다 구한 책을 애지중지하면서 소중하게 필사 보존하던 중세 시대가 아니다. 도리어 한 사람이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는 시대이다. 이제 얼마만큼의 지식을 쌓느냐가 중요하기 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식과 정보 자체보다 지식과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이다. 또한 지식과 정보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경우에 불과 1-20년 전의 지식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실정이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많은 지식을 쌓았다 하더라도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사회에 진출해서 제대로 사용하기가 어렵다.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은 이미 옛 것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육은 평생 교육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도 시대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 대학교육의 초점은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데 두기보다,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두어야 한다. 처리 속도가 느린 286컴퓨터에 쓸모없게 된 정보를 잔뜩 저장하는 것보다는 많은 정보를 (아직 지니지는 못하더라도) 담을 수 있는 펜티움 IV 컴퓨터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학생은 의존적인 태도를 벗어나 자립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평생 살아가면서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제안을 몇 가지 하고자 한다.

1. 우선 책을 정확하게 읽도록 해야 한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러한 훈련을 시킨다. 우리 나라의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교육 현실을 냉정히 들여다 보면, 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제대로 읽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글로 된 책을 읽고서 그 내용을 '자신의 말로' 재구성해서 표현해 보라는 요구를 받을 때 제대로 해낼 수 있는 학생이 대학생 가운데서도 아직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생각을 어설프게 감상문조로 쓰게 하는 일에 앞서 먼저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텍스트를 '자신의 말로' 재구성해서 요약해내는 과제를 많이 주어야 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도 성경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이다. 그렇다면 뜻도 모르고 천자문이나 사서삼경을 그저 외기만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교육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고전을 읽는 기회를 많이 줄 것을 제안한다. 특히 신학부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고전을 읽는 훈련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학교 강의 시간이나 채플 시간에 들은 설교를 그대로 적어 교회에서 다음 주 설교로 사용하거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기웃거리는 신대원생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데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도리어 그들이 학부에서부터 성경을 정확히 읽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일반 학부의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졸업 후 어떤 직종에서 일하든지 간에 글을 읽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외국 기업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 글자 하나의 의미까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글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큰 손실을 입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따라서 천안대학교가 글을 정확히 읽을 줄 아는 사람을 키워낸다면, 우리 학생들은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환영받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문자 대신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 시대는 또 다른 중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극소수의 학자만이 라틴어로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시대에 신앙 교육은 성당 벽화 등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미지를 통한 교육은 직접적이고 감성적이어서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는 내용도 옳아야만 한다. 글을 읽는 훈련을 시키지 않았던 중세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외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시키는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이다.

2.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고 발표할 기회를 많이 주기를 제안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치열한 경쟁 사회이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논리정연하고도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수학 시험에서 해답이 중요한 만큼 풀이 과정도 중요하듯이, 학생이 내리는 결론도 중요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논리정연한지도 중요하다. 아무리 옳고 좋은 결론이라 하더라도 설득에 실패하면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학부를 예로 들면, 이러한 훈련을 거친 학생은 장차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수 있다.

3. 자신의 생각을 글을 통해 일관되게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신학논문공모전과 같은 행사를 장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작문 수업 등을 통해 글쓰기 기초 훈련을 시켜야 하며, 과제물로서 보고서나 논문을 쓰게 하고 첨삭을 통해 학생이 개선해야 할 점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서 학생의 쓰는 능력이 개선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한다. 논리적인 말보다는 감성적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 더 효과를 거두는 시대이다. 감성에 호소하기만 하면 전달되는 내용에 관계없이 설득이 되는 시대이다. '묻지마 투자'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감성과 직관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차분하게 앞뒤를 따지지 않는 시대이다. 그러나 '묻지마 투자'가 가산을 탕진하는 결과를 낳듯이, 감성적 직관에만 호소하는 설득은 맹목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기 쉽다. 자신이 설득되는 내용이 참인지를 따져 볼 수 없는 사람으로 이 사회가 가득찬다면, 이 사회의 몰락을 그리 멀지 않다. 우리 천안대학교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이러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감성으로만 흐르는 풍토 속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제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렇게 키워진 능력이 올바른 목적에 쓰여지기 위해서는, 학생의 인성이 올바로 세워져야 한다. 제대로 된 가치관과 윤리 의식이 필요하다. 286 컴퓨터 대신 펜티움 IV 컴퓨터를 갖추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기껏해야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을 더 잘 보는데 쓴다면, 차라리 286 컴퓨터에 머무는 편이 낫다. 탁월한 능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능력을 지닌 사람의 인성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은 독일어로 Bildung이다. 도야를 통해 인격을 세운다는 뜻이 이 단어에 들어 있다. 이를 통해 올바른 인성 교육이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통해 올바른 인성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사람은 복음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인격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성경 관련 수업에서 성경을 읽는 일과 채플과 선교 단체 등을 통해 복음을 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학생은 복음을 말을 통해서만 접하지 않는다.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의 삶에서 말씀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본다. 학생은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선생 아래에 있을 때 그 말씀을 쉽게 받아들인다. 가르치는 사람의 언어와 태도 등이 학생에게 영향을 끼친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모범적이고 인격적인 태도로 학생을 대하는데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종의 형태로 오셔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교수가 권위 의식을 버리고 낮아져서 학생을 섬길 때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는 학생을 길러낼 수 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듯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본받아야 하듯이, 학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하는 교수에게서 자신의 삶의 모델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가르치는 교수뿐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돕는 직원도 그러한 삶의 모델을 학생에게 보여주어야 본받아야 한다. 학생에게 권위적이고 고압적으로 대하기보다 학생을 동생과 자녀처럼 도와주며 섬겨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은 지식에 앞서 인격을 배울 것이다. 인격이 올바로 서면 지식 교육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며,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될 것이다.

올바른 교육은 전인격적인 교육이다. 학생의 지성과 감성, 의지를 모두 조화롭게 길러내는 것이 교육이다. 읽기 훈련 등을 통해 학생의 지성을 계발할 수 있으며, 신앙 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인성을 세울 수 있다. 또한 학생이 배우고자 하는 의지 또는 동기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자발성을 유도해야 한다. 질문을 꺼려하고 토론을 피하는 수업 분위기는 학생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결국 배우려는 의지도 약화시킨다. 비록 학생의 이야기가 정리되지 못해 일관성을 잃었다 하더라도, 우선 학생을 격려해야 한다. 학생은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마음을 열고 학습에 임한다. 그래서 학생의 이야기를 무조건 반박하기보다는 학생의 이야기에서 의미있는 부분을 끄집어 내어 발전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토론은 선생이 학생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토론의 목적은 토론을 통해 학생이 자신의 생각 가운데 올바른 부분을 살리고 틀린 부분을 버리도록 하는데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세워나갈 수 있다. 대학 교육은 붕어빵처럼 똑같은 소리를 내는 학생을 만들어내는데 있기 보다, 다양하면서도 창의적인 학생을 키워내는데 있다.

세계의 3대 위인에 들어가는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젊은이 교육에 바쳤다. 그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만 하는 당대 아테네의 교육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교육자의 사명은 학생이 스스로 지식을 찾아가도록 돕는데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표적인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생각을 물려받으면서도 나름대로 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도달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외적으로만 흉내내었던 젊은이도 일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얻기 위한 전단계로서 상대방의 의견이 정말 확실한지를 검토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곤 했다. 그를 외적으로만 모방했던 젊은이들은 비판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비판하는 일만 즐겼다. 우리 주변에서도 어설프게 철학하는 사람 가운데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젊은이들을 매니어(manikos), 즉 맹목적 추종자라고 불렀다. 교육은 선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육은 자발적이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학생은 결국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선생과 다른 생각일지라도 마음껏 내놓을 수 있고 검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선생은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학생의 발전을 두려워하면 희망이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독교 교육은 참 스승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선생은 학생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부터 배우도록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어떤 선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는 안된다. 따라서 선생은 항상 자신이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겸손이 생긴다.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겉으로는 겸손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속에는 더 큰 교만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이 부족함을 알 때 학생에게 열린 자세를 보일 수 있다. 학생을 일방적 지식의 수용자로만 여기지 않고 함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동역자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생은 먼저 알았고 조금 더 안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학생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귀중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학생을 존중하고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학생이 비록 두서없이 이야기한다 해도 그 가운데서 의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나귀를 통해 선지자 발람에게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는데, 선생은 학생의 이야기속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을 지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생은 항상 배우려는 선생의 자세를 배우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선생은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이시다. 강의시간이나 면담시간에 성령께서 선생과 학생을 함께 가르치시도록 해야 한다. 선생은 학생을 위해 사용되는 보조자이어야 하며 동시에 성령님께 배우는 학생이어야 한다. 따라서 항상 기도로 강의를 준비해야 하며, 강의를 시작할 때 성령님의 임재와 도움을 빌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보다 지식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확히 읽고 논리정연하게 쓰고 발표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또한 이렇게 길러진 능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쓰여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는 인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가르치는 교수와 가르치는 일을 돕는 직원은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학생을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은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일꾼으로 자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스승이시며, 교수와 직원은 학생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보조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성령께서 강의에 임재하셔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열심을 내어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시도록 모든 강의를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인성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